111화 진 회장 (1)2021.08.16.
“참 열심이네.”
“네?”
“위탁받으려고 참 열심이라고. 그런데 어쩌나 소용없게 되었는데.”
싸한 표정에 나는 몸이 굳어버렸다. 처음부터 내가 무슨 목적으로 여기 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이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애써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알고 계셨네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말할 수 없이 불쾌해. 남의 불행에 기뻐하며 어슬렁거리는 너 같은 하이에나 무리 말이야.”
불쾌한 표정이 진심임을 말해주었다. 왜 굳이 모르는 척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었는지 이해가 안 됐다.
“불쾌했다면 이런 자리를 거절하시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불쾌하다고 밝히실 수 있었는데, 왜 지금 말하시는 겁니까?”
“시연이 때문이다. 원치도 않게 이런 자리를 만들어야 했던 애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어.”
이 비서를 많이 아끼는 모양이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저도 이 자리에 나오고 싶진 않았습니다.”
“회사에서 원해서 어쩔 수 없이 나왔다는 거냐?”
“네.”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시연에게서 네놈이 돈에 움직이는 놈이라는 건 익히 들었다.”
도대체 나에 대해 뭐라고 말을 했길래 돈에 움직이는 놈으로 알았을까. 씁쓸함이 밀려들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설 순 없었다.
“네. 저, 돈에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랬다면 옥션에 들어오지도 않았겠죠. 옥션 회사 신입 연봉이 제가 벌던 금액의 100분의 1도 안됩니다.”
“돈 많이 벌었다는 자랑을 하고 싶어? 돈이 아무리 많아도 한순간에 없어져.”
“그런 자랑을 뭣하러 진 회장님 앞에서 하겠습니까. 제가 감히 만지지도 못한 금액을 주무르셨던 분인데요.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격이죠.”
자신을 높이자 진 회장의 표정은 약간 누그러졌지만, 그렇다고 경계심을 높지는 않았다.
“그런 말에 내가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습니다. 다만, 이 비서님이 저에 대해서 빨리 말하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분은 팀장님이나 총괄님이었을 겁니다. 이런 식의 만남은 저에게 큰 부담이거든요.”
“입만 살아서.”
진 회장은 코웃음을 쳤다. 내 말을 전혀 믿고 있지 않는 것이다. 못 믿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물어볼 건 물어봐야지.
“한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벌써 스카이 옥션이나 다른 갤러리와 이야기가 되신 상태라 소용없다고 말씀하신 겁니까?”
무언가 말하려던 진 회장이 멈칫했다. 그의 시선의 끝에는 멀리서 이곳을 향해 오는 이 비서가 있었다. 문득 이 상황을 이용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탑 옥션에 기회를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이 비서님이 지금 이 대화들을 알게 되겠죠.”
이를 악문 진 회장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속으로는 움찔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응시했다. 진 회장은 이 비서가 이러한 상황을 모르길 바란다. 양아치 같은 방법이나, 나를 하이에나로 여기는 사람이니 상관없다.
“왜 내가 소용없게 되었다고 했는지 알아내면 기회를 주지.”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악한 미소를 짓는 나를 보며 진 회장은 눈을 부릅떴지만 곧 표정을 바꾸었다. 이 비서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나도 진 회장을 따라 웃었다. 그녀는 진회장과 나를 번갈아보며 궁금한 듯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으셨길래 이렇게 분위기가 좋습니까?”
“신인 작가들의 기세가 무섭다는 이야기를 했다. 황유리 작가만 해도 세계관이 독특하고 신선하잖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비서가 온 이후에는 다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적당히 분위기에 맞춰 대답을 하면서도, 머릿속에는 어렵게 얻은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 진 회장이 차를 타고 떠나자 이 비서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분위기가 아주 좋습니다. 오늘 위탁 이야기 꺼내 보지 그러셨습니까?”
미안하지만 진 회장은 우리 쪽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이 비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만남이 이루어진 것뿐이라 얘기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너무 속 보일 것 같아서요.”
“그건 그렇습니다.”
“집까지 태워드릴 테니 제 차 타고 같이 가시죠.”
“아닙니다. 저는 그냥 버스 타고 가면 됩니다.”
부담스러운지 이 비서가 손사래를 쳤다.
“오늘 역할을 잘해주신 것이 고마워서 그래요. 여기서 멀지도 않잖아요.”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신세는요. 어서 타시죠.”
차를 타고 이 비서의 집으로 향하면서 나는 슬슬 먹이를 던지기 시작했다.
“사무 보조할 때 일을 잘하셨나 봐요.”
“잘하지 않았습니다아.”
이 비서는 부끄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데려다 주겠다고 한 진짜 이유는, 진 회장이 이 비서에게 왜 불편함을 숨기려 하는지 궁금해서였다. 이 비서에게 들은 바로는 그녀는 사무 보조일 뿐인데, 과도하게 그녀를 보호하는 그런 분위기랄까.
“그때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을 보면 ‘전설의 알바’ 정도 되었던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진 회장님 인품이 좋아 예쁘게 봐주셨죠.”
“자주 연락드리시나 봐요. 저 돈 밝히는 것까지 알고 계시던데요.”
껄껄껄 웃으면서 이야기했지만 돌려까기라는 것을 알아들은 이 비서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아니 그게……. 죄송합니다. 오해했었습니다.”
“아니에요. 그럴 수 있죠.”
진 회장과의 관계에 대해 이 비서가 숨기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지? 혹시…… 이 비서는 모르는 출생의 비밀이 있는 건가?
“오늘 보니까 딸같이 예뻐하시는 것 같아요.”
“네. 그렇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랑 저만 있어서 그렇게 살갑진 못하거든요. 오늘 두 분 모습 보니까, 누나나 여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렇게 제가 살가웠습니까?”
이 비서는 잘 모르겠다는 듯 갸우뚱거렸다.
“네. 부모님께도 그렇게 살가우세요?”
“그렇게 살가운 편은 아닙니다.”
그렇게 가족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별로 걸리는 부분은 없었다. 드라마처럼 출생의 비밀이 있을 리도 없을뿐더러, 만에 하나 출생의 비밀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사자가 모르면 내가 알아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런 이상한 생각까지 하는 것을 보니 내가 몰리긴 몰렸나 보다.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알아낸다? * 집에 돌아온 나는 오랜만에 집에 일찍 온 경환을 볼 수 있었다.
“웬일이냐. 이렇게 일찍 퇴근했어?”
“일찍 퇴근한 게 아니라, 몸이 안 좋아서 반차 냈어.”
그러고 보니 얼굴이 핼쑥하다.
“경환아. 일 빨리 그만둬. 너 그러다 정말 훅 가는 수가 있어.”
“그만둔다고 말했어. 이번 달까지만 근무할 거야.”
“진짜?”
“진짜. 몸이 못 버틸 것 같아서 말이야.”
“잘했어.”
“걱정이야. 이력서 여기저기 내고는 있는데, 연락 오는 데가 없네.”
푹 한숨을 쉰 경환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 경환을 보며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동종업계로 가려는 거야?”
“아무래도 그게 경력을 인정받으니까 좋지. 근데 출판업계가 월급은 짜고, 워낙 야근을 많이 해서 같은 일이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아예 다른 업계는 어때?”
나를 보고 경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른 업계? 예를 들면 어떤 곳?”
“옥션 회사.”
“형 회사 말하는 거야?”
“응. 우리 회사 작품 관리팀에서 사람을 구하더라구. 그래서 한번 생각해 보라고.”
경환은 자신이 없어 했다.
“나, 미술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 형하고 채령이에게서 주워들은 것이 전부야.”
“알면 좋지만, 작품 관리팀에서도 경력자를 원하는 건 아니야.”
“그럼?”
“쉬운 일이 아니니까 제대로 배울 사람이 필요한 거지. 잘 배우면 나중에 돈 모아서 수장고도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하는 거야.”
수장고를 운영할 수 있다는 말에 경환은 솔깃한 것 같았다.
“진짜 그럴 수도 있겠구나. 채령이는 그림 그리고, 나는 수장고 운영하고 그럼 좋을 텐데.”
“최상의 그림이지. 그리고 작품 관리팀이 경매팀보다는 바쁘지 않다고 하더라구. 적어도 지금 네가 다니는 회사보다 나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알았어. 고민해 볼게.”
“그래. 지원 결정하면 골동품 어떻게 다루는지 물어봐. 알았지?”
“응. 알았어. 고마워. 형.”
모처럼 경환은 예전의 해맑은 미소를 찾았다. * 다음 날, 나는 슬며시 회사를 빠져나와 근처에 있는 카페로 들어섰다. 구석진 자리에 내가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었다.
“총괄님.”
김도균이 인상을 찌푸린 채 나를 봤다.
“도대체 왜 멀쩡한 회의실 두고 여기서 만나자고 해요?”
“회의실은 보는 눈이 너무 많고, 옥상은 이 팀장님하고 지 팀장님이 자주 가셔서요.”
“이렇게 직원들 눈을 피하면서 할 이야기가 뭐예요?”
“어제 진 회장님 뵌 것 때문에요.”
그의 표정이 더욱 의아해졌다.
“그거라면 분위기 좋았다고 이 비서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그 분위기는 연출된 분위기예요.”
“네?”
나는 어제 어떤 상황이었는지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진 회장은 그 불쾌함을 이 비서에게 숨기고 싶었고, 한지감 씨는 그걸 기회 삼았다는 거죠?”
“네. 맞습니다. 그런데 소용없다는 말이 뭔지 모르겠어요. 진 회장 주변에는 SNS를 하는 사람도 없어서 정보를 얻기가 힘들어요.”
한마디로 꽉 막힌 상태였다. 한줄기 빛조차 보이지 않는 깜깜한 터널을 걷고 있는 느낌이랄까.
“십중팔구 다른 곳과 이야기가 오고간 것 같군요.”
“그래서 말인데요. 어디와 말이 오고갔는지 알아봐 주실 수 있을까요?”
“잘못하면 오히려 정보를 흘리는 꼴이 될 수 있어요.”
“그렇죠. 그럼 그냥 이대로 있어야…….”
내 말이 끝나기도 전 김도균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있을 수는 없죠. 스페셜리스트로서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어요. 내가 요령껏 잘 알아보도록 하죠.”
“네. 알겠습니다.”
김도균이 무언가 제대로 된 정보를 가져오길 바라는 수밖에는 없다. * 그 뒤로는 별다른 일 없이 일주일이 지났다. 탕비실에 들어서니 물을 벌컥벌컥 있는 다영의 모습이 보였다. 고객을 만나 열이 받는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무슨 일 있어?”
“……정말 열 받는 일이 있었어요. 지난번에 소장자 만나러 간다고 급하게 약속 취소했었잖아요.”
“그랬지.”
“근데 그 소장자가 계속 위탁 결정을 못 하더라구요. 그러면서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이기환 작가의 작품을 죽을 때 같이 가져가고 싶다는 거예요.”
“아아……. 정말 뒷골 당겼겠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가끔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부장품처럼 미술품들을 죽는 길에 가져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
“진짜 뒷골 당기죠? 전해듣기만 했지, 이런 말을 직접 듣게 될 줄 몰랐어요.”
“그러게 말이다. ‘의사 가셰의 초상’이 생각나네.”
“그러니까요!”
‘의사 가셰의 초상’은 반 고호의 인생이 집약되어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당대를 비관하는 시선을 불안한 구도로 보여준다. 1990년에 경매에 나왔고, 15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었다. 경매 당시 이 그림을 낙찰받았던 한 일본인 사업가는 이 그림과 함께 묻히고 싶다고 말해 세상의 공분을 샀다. 그때 분노한 사람들처럼 다영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예술 작품은 누군가의 소유인 동시에 인류의 유산이에요. 후대에 물려줘야 할 책임이 있다구요!”
“자신의 소유라고만 생각하는 거지. 그게 아닌데.”
한참 다영은 분노를 터트렸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자리로 돌아왔을 때 메시지 알림 소리가 울렸다. 김도균이 보낸 메시지였다.
‘접촉한 곳을 찾을 수가 없네요. 보안이 철저한 건지…….’
메시지인데도 아쉬움이 가득 실려 있었다. 일주일 동안 김도균이 알아봤는데도 없는 거면, 정말 없는 거 아닐까? ‘소용없다’는 진 회장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답답한 마음에 나는 포털사이트에 진 회장의 이름을 검색했다. 3일 전 일자가 있는 인터뷰 기사가 나왔다.
“홍 기자님이 한 인터뷰네.”
예술이란 무언가에 대한 인터뷰였는데, 진 회장은 김동인의 ‘광염의 소나타’를 거론하면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며 ‘마지막에 미술품과 동행한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 같다.’고 하였다. 인터뷰의 내용은 성공한 사람의 삶 같았다. 그 어디에도 파산을 앞둔 사람의 초라함 같은 것은 나타나 있지 않았다. 파산할 거란 정보가 가짜인 걸까, 아니면 자존심이 강한 사람인 걸까.
“그런데 왜 하필 ‘광염의 소나타’야.”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은 동의하지만, ‘광염의 소나타’를 좋아하진 않는다. 그 소설에서는 생명보다 예술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쓰여 있다. 미술업계에서 일하고 있지만 나는 그 점만은 인정할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예술 작품도 사람의 생명만큼 귀하지는 않다.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서 몇 개의 말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어쩌나, 소용없게 되었는데.
진 회장은 소용없게 되었다고 했다.
-이기환 작가의 작품을 죽을 때 같이 가져가고 싶다는 거예요.
죽을 때 작품을 가져가고 싶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접촉한 곳을 찾을 수가 없네요. 보안이 철저한 건지…….’
진 회장이 접촉한 곳을 찾을 수가 없다.
“작품과 함께 죽으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