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수저 생활백서-5화 (5/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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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2)

“절제되고 심플한 디자인을 강조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큰 액정으로 언제 어디서나 영상과 음악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것으로 광고 컨셉을 잡기로 합시다.”

장하나가 한쪽 팔을 들며 물었다.

“광고 모델은 지금 픽스되어 있는 배우로 그대로 갈까요?”

“컨셉이 완전히 바뀐 만큼 모델 역시 교체를 해야 되겠죠.”

“하지만 이만한 네임벨류를 가진 모델을 바로 섭외하기가 쉽지 않은데······.”

장하나가 곤혹스런 표정을 지은 채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당연히 이 부분도 생각해 둔 것이 있던 재성이 바로 해결책을 제시했다.

“네임벨류는 상관없습니다. 그것보다는 얼마나 광고 컨셉에 잘 어울리고 신세대의 톡톡 튀는 감성을 표현할 수 있느냐에 중점을 두도록 하세요.”

“그럼 신인도 상관없으신 겁니까?”

장하나의 물음에 그는 망설임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미지가 굳어 있는 기성 모델보다 신인이 더 좋은 효과를 낼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미리 선을 그어놓지 말고 폭 넓게 모델을 구해보도록 해요. 아. 그리고 모델료는 기존에 책정된 것보다 더 늘려줄 수 있으니까 염려하지 말고요.”

“알겠습니다.”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한 재성은 잔뜩 지친 표정을 짓고 있는 직원들을 보며 말했다.

“오늘은 이쯤 하고 내일 구체적인 시안과 모델을 확정하겠습니다. 각자 아이디어를 생각해서 오도록 하세요.”

“······네.”

“후우. 알겠습니다.”

오랜 회의에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재성이 서류를 챙겨서 나가자 여기저기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으아, 죽겠다.”

제일 먼저 테이블에 뻗은 건 권혁재 대리였다.

맨 처음 재성의 눈에 띈 탓인지 회의 중에도 계속 이름이 불린 그였다. 때문에 완전히 기력이 빠져 버린 것이다.

“대리님, 완전 찍힌 거 아니에요?”

“그렇지? 나도 그런 거 같아······.”

권혁재 대리가 테이블에 머리를 쿵 찍었다.

“그러게 왜 나서서 눈도장을 찍혀요. 바보같이.”

“야, 내가 저렇게 나올 줄 알았냐? 맨날 놀고먹던 인간이 갑자기 나대려고 하니까 얄미워서 그랬지.”

“하긴 저도 처음엔 좀 거북하더라고요.”

근데 참 별일도 다 있지, 하면서 장하나가 턱을 괴었다.

“아니, 사람이 갑자기 저렇게 바뀔 수가 있나. 오늘 말하는 거 보니까 완전 똑 부러지던데.”

“뭐, 지금까지는 재벌가 막내아들이 힘을 숨기고 있었다······ 이런 거야?”

권혁재 대리가 비웃는 얼굴로 말하자 장하나가 정색했다.

“어머. 진짜 일부러 바보짓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죠. 지금까지는 아래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 관찰하고 있었던 거고.”

“장하나 씨, 만화책을 너무 많이 봤어.”

“그럼 우리 내기할래요?”

“그래, 하자. 해.”

권혁재 대리는 자신만만하게 콜을 외쳤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몰라도 분명 일주일을 못 버티고 예전처럼 놀고먹는 낙하산으로 돌아올 게 뻔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유치하게 싸우는 사이 황창민 부장이 손뼉을 탁 쳤다.

“다들 뒷담화는 이쯤 하고 슬슬 일어나지.”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단숨에 얌전하게 바뀌었다.

“내일도 회의가 있으니까 오늘처럼 얼떨떨한 상태에서 당하지 말고 준비 철저히 해오도록 해.”

“예.”

입을 모아 대답한 팀원들은 갑자기 쏟아진 일거리에 암담한 표정을 하곤 각자 물건을 주섬주섬 챙겼다.

그때 여직원 한 명이 회의실 문을 삐쭉 열고 들어왔다.

“다행히 안 가고 다들 계셨네요.”

“현주 씨. 왜? 전달할 이야기라도 있어?”

서무 업무를 보는 김현주가 여기엔 왜?

황창민 부장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그녀는 손에 든 서류 봉투를 펼치며 대답했다.

“본부장님께서 늦었다고 택시비를 지급하라고 하셨어요.”

“택시비를?”

“예.”

그때 불쑥 권혁재 대리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얼만데?”

“한 사람당 10만 원씩이요.”

“이런 세상에!”

그 말을 들은 팀원들의 얼굴에 환한 기쁨이 넘쳐흘렀다.

가끔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야근하면 교통비가 지급되기도 했다.

보통 많아봤자 2~3만 원가량이다.

하지만 무려 10만 원이나 준다고 하니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황창민 부장마저도 입꼬리를 씰룩일 정도였다.

“캬, 역시 금수저!”

권혁재 대리는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세우며 외쳤다.

방금 전까지 까대던 것치고는 매우 빠른 태세전환이었다.

“재벌 3세라 그런지 씀씀이가 다르네요.”

“그러게.”

언제 지쳤었냐는 듯, 다들 택시비를 받고 크게 기뻐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황창민 부장은 팀원들을 마구 쥐어짜다가 이렇게 또 은근히 챙겨주며 쥐락펴락하는 재성의 처세술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뿔난 망아지인 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능구렁이가 따로 없군.’

***

재성은 환한 전조등 불빛을 밝히며 대형 고급 세단 한 대가 들어서는 걸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이제 온 거냐?”

뒷좌석에서 내린 박경수 회장이 재성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설마 그새를 못 참고 또 친구들과 술을 퍼마시고 온 건 아닐 테지?”

“아닙니다.”

“그럼?”

“회사에서 직원들하고 회의하다가 퇴근이 조금 늦었습니다.”

“일하다 온 거라고?”

“네.”

박경수 회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괜히 혼이 날까 봐 핑계를 대는 건 아니겠지.”

노골적으로 불신하는 눈빛이었다.

“확인해 보면 바로 들통날 일인데요. 제가 왜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흠.”

재성의 말대로 전화 한 통이면 회사에 있었는지 아닌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굳이 확인해 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예전과 달리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는 모습 때문일까?

박경수 회장은 눈썹을 슥 치켜 올리더니 말했다.

“그렇게 말하니 믿어주마. 대신 며칠도 안 돼 다시 예전처럼 행동할 거라면 아예 지금 그만두는 것이 나을 거다. 어설프게 기대를 만들면 실망도 더 커질 수 있어.”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염려 마십시오.”

“······.”

박경수 회장은 크게 표정 변화 없이 답하는 막내아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렸다.

먼저 대문을 넘는 박경수 회장을 재성이 곧바로 뒤따랐다.

***

“새 핸드폰 광고 기획안을 새로 수정하고 있다고?”

어젯밤 일이 마음에 남았던 박경수 회장은 오전에 비서실장을 불러들였다.

겉으로는 정신을 차린 듯해 보여도 실제로 회사 생활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그게 정말인가.”

뜻밖의 보고에 박경수 회장은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최측근 심복인 정태규 비서실장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기존 안을 버리고 컨셉부터 완전히 새로 잡고 있는 모양입니다.”

“제품 출시가 코앞인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

“맞습니다.”

“그런데도 기획안을 엎어버리고 새로 만드는 중이라고?”

“그렇습니다.”

의자 등받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며 박경수 회장이 말했다.

“저번에 한 소리 들었다고 간이 좀 붓기라도 했나 봐?”

“그래서 전자 무선 사업부에서 말이 많은 상황입니다.”

까딱 잘못했다간 줄줄이 일정을 미루거나 광고 없이 제품을 출시해야 될지도 몰랐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대체 어쩔 셈이지.’

설마 대책 없이 일만 벌이는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박경수 회장은 턱을 매만졌다.

“원래대로 진행하라고 지시를 내릴까요.”

슬쩍 분위기를 살피며 묻는 말에 박경수 회장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냥 내버려 둬.”

“하지만······.”

“오히려 좋은 기회야.”

박경수 회장은 느긋하게 다리를 쭉 뻗었다.

“이번엔 제법 의욕을 가지고 일하려는 것 같은데, 무언가 제대로 해낼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자칫하면 회사에 큰 손해를 끼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회장이 결정을 내린 이상 이의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그러니까 경쟁 제품들과 비교해 가장 큰 장점인 대형 핸드폰 액정을 전면에 내세우는 광고를 하자 이 겁니까?”

시선을 받은 권혁재 대리가 곧장 대답했다.

“와이드 PMP폰이라는 혁신적인 기능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블루폰 그 자체로 시대를 앞서 나가는 리더임을 강조하는 겁니다. 거기에 개인의 개성을 나타내는 아이콘이라는 이미지를 소비자들에게 심어주는 것이 핵심입니다.”

재성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극과 극인 상황을 비교하는 것이 유행이라는 점에서 착안했습니다. 넓고 좁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똑같은 춤을 추며 파티를 즐긴다. 그런 장면을 코믹하게 연출해 재미도 주고, 소비자들의 흥미를 유발시키는 게 포인트입니다.”

“확실히 첨단 기능들만 강조하는 경쟁사 광고하고 차별화가 될 수 있겠군요.”

처음 광고 컨셉을 새로 잡는다고 할 때 반대했던 황창민 부장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제 생각에도 아주 참신한 아이디어인 것 같습니다.”

그 역시 마음에 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방금 떠오른 건데 ‘넓게 놀아라. 플레이가 달라진다!’. 광고 카피로 어때요?”

재성이 툭 던진 말에 팀원들은 오, 하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거 괜찮은데요.”

몇 번 문구를 곱씹어보던 권혁재 대리도 마음에 들었는지 의외라는 눈으로 재성을 쳐다보았다.

“진짭니까? 괜히 내 말이라고 무조건 좋다 하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 봐요.”

“아뇨, 정말 그럴듯합니다.”

“짧고 간결하면서도 말하고 싶은 주제가 딱 드러나 있어서 좋은걸요.”

표정을 보아하니 진심인 것 같았다.

‘역시. 사람들 생각하는 건 다 똑같군.’

방금 재성이 내뱉은 문구는 그가 기억하고 있던 과거에서 실제로 쓰였던 광고 카피였다.

재성은 팀원들의 반응이 호의적인 걸 보면서 이번에도 똑같은 전략이 먹힐 것을 확신했다.

“컨셉은 이렇게 잡기로 하고 내일 안으로 콘티 작업까지 끝내도록 하세요.”

쉴 틈 없이 빡빡한 일정에 권혁재 대리가 초췌해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하아. 알겠습니다.”

다들 힘들어하는 걸 알았지만 출시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재성은 고개를 돌려 황창민 부장한테 시선을 주며 말했다.

“다음 주에 촬영을 들어가면 출시일 전에 완성본을 만들어낼 수 있겠죠.”

“너무 촉박한데 차라리 무선 사업부하고 협의해서 출시일을 일주일만 뒤로 미루면 어떻겠습니까?”

살짝 우려를 표시하며 의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재성은 약간의 고민도 없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신제품 출시는 무엇보다 기선제압과 선점이 중요한데 그럴 수는 없어요.”

“그렇긴 합니다만······.”

재성은 회의실에 모여 있는 팀원들을 둘러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출시일 연기는 없습니다. 무조건 25일 신제품 런칭과 동시에 광고를 내보낼 거니까 어떻게든 일정을 맞추도록 하세요!”

한동안 정시 퇴근은 물 건너갔다는 생각에 다들 힘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단순히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타당한 이유가 있었기에 대놓고 반박하지는 못했다.

“······알겠습니다.”

계속 몰아붙이기만 하면 있던 의욕도 사라질 수 있었기에 그는 미리 생각해 둔 당근을 제시했다.

“대신 일정에 맞춰 광고 제작을 끝내고 결과가 좋다면 팀원 모두에게 특별 성과금을 지급토록 하겠습니다.”

“정말 그렇게 해주시는 겁니까?”

보너스 이야기에 팀원 한 명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재성은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회장님이 주머니를 안 여시면 개인 돈을 써서라도 성과금을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도록 해요.”

“와아!”

“본부장님 사랑합니다.”

“최고예요!”

자본주의의 노예로 변한 팀원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환호했다.

불과 일주일 전과 비교해 봐도 확연하게 다른 반응이었다.

내가 직접 보여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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