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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우리 백화점도 꿀 좀 빨자.
대회가 가까워짐에 따라 여자 핸드볼 대표 팀을 전면에 내세운 마케팅 또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대회 기간 한정으로 TV에 나갈 광고도 새로 찍었고, 전국에 있는 전자 제품 매장에도 입간판과 전단지 등이 입고되어 곳곳에 비치되었다.
“어? 여자 핸드볼 대표 팀이다!”
막 전자제품 할인 매장 안으로 발을 들인 가족이 핸드볼 대표 팀 주장 박소진의 입간판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날아올라라, 대한민국’이라는 구호가 옆에 쓰여 있고 유니폼을 입은 박소진 선수가 주먹을 힘차게 들어 올린 포즈였다.
“거기 뭐 비리 많다고 하지 않았어?”
“에이, 선수들은 상관없지. 협회 윗대가리들이 다 해 처먹고 선수들한테는 아무것도 안 해줬대.”
“쯧쯧, 여자애들한테 그게 무슨 짓이야.”
“뉴스 보니까 불쌍하긴 하더라. 메달은 딸 수 있을까 몰라.”
어머니는 안타깝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그나마 광고라도 찍으니 다행이지. 이거 텔레비전 선전하는 거니?”
“응. 제일 전자에서 새로 나온 건데. 엄청 크지?”
그러자 함께 있던 아버지가 전시된 대형 텔레비전을 이리저리 꼼꼼하게 살펴보곤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화질도 깨끗하고 괜찮은 것 같네.”
“여보. 그럼 응원하는 뜻에서 이걸 사는 건 어때요?”
그러자 남편이 진짜? 하고 물었다.
“당신 사성 전자 걸로 사자고 했잖아?”
“사성 전자 텔레비전을 보고 오기는 했는데. 이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뉴스를 보니까 여자 핸드볼 대표 팀을 후원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한다니까 이번에 제일 전자 것도 사보죠. 뭐.”
“아빠. 나도 찬성! 지금 구매하면 여자 핸드볼 대표 팀 사인 볼도 준대.”
원래 생각해 둔 제품이 아니라서 잠시 망설이던 남편은 이내 머리를 끄덕였다.
“선수들이 태극마크 달고 열심히 하는데 나도 뭐라도 하나 사줘야지.”
결정을 내린 가족은 제일 전자에서 나온 제품들이 전시된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맞은편에 사성 전자 코너가 있었으나 이쪽만 손님들이 몰려 북적였다.
***
“막내 도련님의 계획이 제대로 먹힌 것 같습니다.”
“그래?”
손에 들고 있던 서류에서 시선을 떼며 박경수 회장이 관심을 보였다.
그러자 윤경욱 기획본부장이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여자 대표 팀을 후원하는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그룹 이미지가 크게 좋아지는 것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난주부터 전자에서 여자 핸드볼 대표 팀을 내세운 마케팅을 시작했는데 판매 실적이 20%나 뛰었다고 합니다.”
“아직 속단하기에는 이르지만 나쁘지 않은 성적이군.”
말투와 달리 박경수 회장의 입꼬리가 실룩이면서 위로 올라갔다.
자식 자랑을 싫어하는 부모는 없다고 골치만 썩이던 막내아들이 제대로 한몫을 해내고 있다니 기분이 흡족해졌다.
“더욱 고무적인 건 매출이 계속 상승세일 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아시안 게임 마케팅을 시작한 사성 전자의 판매 성적이 저조하다는 겁니다.”
사성 그룹 이야기가 나오자 박경수 회장의 입에서 참았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 큰돈을 들여서 아시안게임 공식 후원업체 자격을 받았는데 이거 손 회장의 속이 엄청 쓰리겠구만.”
“아마 모르긴 해도 지금쯤 사성 전자 임원들이 불려가 치도곤을 받고 있을 겁니다.”
“자네 예상이 맞을 거야.”
그러고는 심술궂은 얼굴로 말했다.
“이번 달에 있는 전경련 골프 모임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군. 손 회장 얼굴이 어떨지 볼만하겠어.”
모임에서 손무성 사성 그룹 회장을 놀려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런 박경수 회장을 보며 정태규 실장이 슬그머니 이야기했다.
“여자 핸드볼 협회와 관련해서 문체부에서 비공식적으로 제안을 하나 해왔습니다.”
“제안이라고?”
“네. 협회장을 비롯한 주요 임원들이 구속 조사를 받으면서 사실상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여자 핸드볼 협회를 맡아달라고 합니다.”
“맡아달라니, 협회장 자리에라도 앉으라는 소리야?”
“그런 것 같습니다.”
“관심 없으니까. 됐다고 그래.”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박경수 회장은 한쪽 팔을 내저었다.
그러자 윤경욱 기획본부장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놨다.
“그룹 이미지를 생각해서 고려해 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 건 대표 팀을 후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귀찮게 그딴 걸 맡아서 뭐 하겠어.”
박경수 회장은 심드렁하니 대답했다.
하지만 윤경욱 본부장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다시 말을 꺼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지 않습니까. 차명주식 사건 때문에 지금도 말이 많은데 이 기회에 이미지를 씻어내는 것도 좋지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기껏 판을 다 깔아놨는데 엉뚱한 놈이 와서 숟가락 올리게 놔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흐음.”
두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그렇게 설득하자 박경수 회장도 조금 마음이 흔들리는 듯했다.
잠깐 고민하던 박경수 회장은 팔짱을 낀 자세로 입을 열었다.
“그 문제는 조금 더 생각해 보도록 하지.”
***
책상 앞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재성은 노크 소리에 서류에서 시선을 뗐다.
“들어와요.”
그러자 권혁재 대리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대표 팀 전지훈련 일정이 확정됐습니다.”
“어디 봐요.”
권혁재 대리는 가져온 보고서를 공손하게 건넸다.
“대표 팀 코칭스태프하고 협의해서 전지훈련 장소는 아랍에미리트로 확정지었습니다. 아시안게임이 열리는 카타르 도하하고 가까울 뿐만 아니라 기후와 주변 환경이 비슷해 현지 적응을 하는 데 최적지입니다. 그리고 대표 팀의 안전을 위해 치안 상황도 고려했습니다.”
설명을 들은 재성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괜찮은 곳 같네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죠?”
“아무래도 카타르 주변에 전지훈련지로 삼을 장소가 그리 많지 않다 보니까. 다른 국가와 종목 팀들이 몰려 숙박 시설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 예약이 되어 있고 일부 남아 있는 곳은 고급 호텔뿐이라 예산이 초과될 것 같습니다.”
이미 다른 곳보다 한참 늦은 상황.
대회를 코앞에 두고 전지훈련지를 찾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부족합니까?”
“인원이 많다 보니 넉넉하게 잡아서 1억 정도가 더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룹 이미지 광고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회장님한테는 따로 승인을 받아낼 테니 걱정하지 말고 추가로 지원해 주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다른 간부였다면 쉽사리 결정하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오너가 사람답게 재성은 작지 않은 액수였지만 윗선의 허락을 받지 않고 전결로 추가 지원을 승인했다.
물론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고 있다는 것도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드리는 이야기인데 한 가지 건의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해봐요.”
“이왕 전지훈련을 가게 됐으니 대표 팀의 훈련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 그룹 이미지 광고로 내보내는 건 어떻겠습니까?”
“광고 영상은 이미 찍어서 방영하고 있잖아요.”
“맞습니다. 하지만 아직 아시안게임 개막까지 한 달 넘게 남았는데 계속 똑같은 걸 내보낸다면 국민들이 식상해할 겁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맛있는 음식도 한 달 내내 먹으면 지겨워 다시는 쳐다보기 싫어지는 법인데, 하물며 광고 영상은 더욱 빨리 싫증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권 대리 말은 국민들의 관심을 계속 붙잡아두기 위해 광고 영상을 추가로 더 제작하자는 거로군요?”
“그렇습니다. 전지훈련 모습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여러 버전을 만들어 TV와 인터넷을 통해 내보내는 겁니다. 그러면 제일 그룹과 대표 팀이 계속 함께하고 있다는 인상을 대중들에게 노출시킬 수 있죠. 더불어서 지금 쏟아지는 관심을 이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흠.”
권혁재 대리의 말을 들으니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었다.
몇 년 후 화제가 될 외국 스포츠 브랜드 광고였다.
연예인이 아니라 스포츠 스타나 일반인들을 기용해서 만든 것인데 훨씬 자연스럽고 스포티한 이미지가 강조되어 호평을 받았다.
“아이디어가 좋군요.”
권혁재 대리가 제안한 의견은 꽤 쓸 만했다.
지금 여자 핸드볼 대표 팀에 대중적 호감도가 붙기 시작했으니 잘하면 제일 그룹과 엮어 함께 상승 효과를 노려볼 만했다.
“아주 괜찮아요.”
진심이 담긴 칭찬에 권혁재 대리는 쑥스러운 듯했다.
점점 쓸 만한 인재로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재성은 꽤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책상 위에 엎어두었던 핸드폰이 울렸다.
재경에게서 온 전화인 것을 확인하고 재성은 잠깐 기다리라는 손짓을 했다.
“어.”
[지금 통화 가능하지?]
재경은 다짜고짜 그렇게 묻더니 바로 본론을 꺼냈다.
[여자 핸드볼 대표 팀 말이야. 그거 네 작품이라면서?]
“그냥 그룹 마케팅 차원에서 비인기 종목에 조금 후원을 해주고 있는 것뿐이야.”
[다 아는데 구라 칠래?]
재경이 거침없는 말투로 말했다.
[내숭은 아빠 앞에서나 떨어. 나한테 사기 칠 생각하지 말고.]
언제나 생각하지만 화려하고 고급스런 외모에 비해 말하는 건 거의 남자나 다름없었다.
하긴 저렇게 기가 세니까 아랫사람들을 꽉 잡고 휘두르는 게 가능할 터였다.
“그래서 용건이 뭔데?”
[대표 팀 마케팅으로 전자가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다던데 우리 백화점도 꿀 좀 빨자.]
“여자 핸드볼 대표 팀에 후원이라도 하려고?”
[못 할 거 없지.]
“그런 거라면 그쪽 협회에 전화해야지. 왜 나한테 그래.”
그러자 재경이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그룹에서 여자 핸드볼 대표 팀하고 관련된 건 네가 다 핸들링하는 거 알고 있거든. 그리고 협회 쪽도 꽉 잡고 있다면서?]
메인 스폰서가 제일 그룹인 데다가 오너 3세인 것이 알려지면서 협회 사람들이 재성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이준영 협회장과 임원들이 구속된 게 제일 그룹에 밉보였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더욱 눈치를 봤다.
당연히 그 중심에는 재성이 있었다.
“입 빠른 사람들이 그냥 하는 이야기야.”
[됐고. 다음 주부터 우리 백화점 쪽에도 여자 핸드볼 대표 팀을 내걸고 마케팅을 할 거야. 네가 협회 쪽하고 정리를 좀 해줘.]
“너무 막무가내 아냐?”
[그래서 못 해주겠다고?]
거절당할 거라고는 1g도 생각하지 않는 목소리였다.
자신만만하게 밀어붙이는 태도에 재성은 조금 약 올려볼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어차피 같은 그룹 계열사였기에 돕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공짜로는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지?”
[당연하지.]
그때 권혁재 대리가 가져온 보고서가 눈에 띈 재성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시원하게 한 장 어때?”
[1억?]
“그래도 명색이 국내 최고의 백화점인데 쪼잔하게 1억이 뭐야.”
[그럼 얼마나 내놓으라는 거야.]
재성은 손가락 끝으로 서류철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말했다.
“대표 팀 초상권까지 포함해서 10억만 내놔.”
[그렇게나 많이 달라고?]
“웬만한 A급 광고 모델 몸값도 수억씩 하잖아. 지금부터 아시안게임이 끝날 때까지 최소 두 달은 우려먹고 금메달을 따면 또 그걸로 마케팅을 할 수 있는데 이 정도면 싸게 먹히는 거지.”
[······.]
“거기다가 비인기 종목을 후원하는 거니까. 사회 공헌을 하는 걸로 잘 포장할 수도 있잖아.”
[여자 핸드볼 대표 팀이 금메달을 따낼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
“물론이야.”
망설임 없는 대답에 잠시 말이 없다가 이내 재경이 입을 열었다.
[좋아. 그렇게 해.]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건 두고 봐야 아는 거고.]
제 할 말만 하고 끝낸 재경이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재성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 흔들고는 조용히 통화가 끝나길 기다리던 권혁재 대리에게 말했다.
“전지훈련비는 해결된 것 같군요.”
대충 감을 잡은 권혁재 대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메가시티 프로젝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