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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한번 써보십시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상하이 공산당 당서기 집무실.
“그럼 천량위 사건은 이걸로 다 마무리된 건가?”
화젠민의 물음에 긴장된 얼굴로 서 있던 공안 국장이 바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우물물을 흐린다더니······. 그놈 때문에 상하이 공산당 전체가 꼴이 말이 아니게 됐군.”
횡령 액수도 컸지만 이번 사건에 직접 연루돼 직위를 잃거나 처벌된 관리들 숫자가 수백 명에 달했다.
한마디로 그동안 지역의 모든 권력과 이권을 독차지한 채 도시를 쥐락펴락하던 천량위 측근 세력들이 뿌리째 뽑혀 나간 거였다.
덕분에 화젠민을 비롯한 젊은 태자당 인물들이 크게 약진할 수 있었다.
“알았으니까 그만 나가보도록 해.”
“예.”
짧게 대답한 공안국장은 서류철을 챙겨 집무실을 나갔다.
“하······.”
화젠민은 한숨을 내뱉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지난밤에도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 온 불면증 때문에 3시간 밖에 눈을 붙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침대에 든 시간은 11시였는데 새벽까지 몸만 뒤척였을 뿐 아무리 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나마도 얇게 잠이 들어 전혀 개운하지가 않았다.
침실도 바꿔보고, 불면증에 좋다는 차나 음식을 먹어도 아무런 효과가 없으니 이젠 거의 포기상태였다.
“하루만이라도 좋으니까 푹 잠을 잤으면 좋겠군.”
화젠민은 피곤에 가득 찬 얼굴로 뒷목을 주무르며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때 여비서가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와 말했다.
“씨네박스 박재성 부사장이 찾아왔습니다.”
“박재성?”
낯선 이름에 화젠민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이내 이틀 전 한중 경제인 포럼 행사장에서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약속도 잡지 않고 불쑥 찾아올 인물로는 안 보였는데.’
화젠민의 머릿속에 재성은 재능 있는 젊은 사업가로 기억되어 있었다.
외국인이긴 하지만 외모도 제법 번듯하고 좋은 집안에서 잘 자란 티가 나는 게 호감 가는 인물이었다.
“일단 들여보내.”
여비서가 나간 뒤 얼마 안 있어 재성이 미소 띤 얼굴로 인사하며 들어왔다.
“갑자기 찾아와서 실례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마침 잠시 쉬던 참이오.”
화젠민은 여비서를 다시 불러 차를 준비시켰다.
두 사람 앞에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차가 놓여지고 간단한 인사말이 오간 다음 화젠민이 뒤로 몸을 기댄 채 물었다.
“한중 경제인 포럼에 참석했던 한국 기업인들 대부분이 본국으로 돌아간 걸로 알고 있는데 박 부사장은 안 가고 있었던 모양이오?”
“이왕 온 김에 투자 여건도 알아볼 겸 남아 있었습니다.”
“투자라면······?”
“상하이를 시작으로 중국에서 대형 멀티플렉스 영화관 사업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 그렇소?”
지난번처럼 대규모 공장을 짓나 싶어 관심을 보이던 화젠민은 이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흥미가 떨어졌는지 심드렁한 얼굴로 물었다.
“그냥 인사나 하려고 온 건 아닐 테고. 찾아온 용건이 뭐요?”
“우연히 당서기께서 오랫동안 불면증을 앓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화젠민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내 뒷조사라도 한 거요?”
예민한 반응에 재성은 서둘러 손을 내저어 아니라고 말했다.
“설마 그럴 리가요. 정말 어쩌다 보니 귀에 들어왔을 뿐입니다.”
“쓸데없이 남 얘기만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꼭 있지.”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화젠민은 재성을 노려보다 이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스스로도 너무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요즘 들어서 잠을 잘 못 자는 건 사실이오. 이래저래 신경 쓸 일도 있고 하니 당연하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는 화젠민에게 재성도 모른 척 맞장구를 쳐주었다.
“나랏일을 하시는 분이니 그럴 만도 하지요.”
그래서, 하며 재성은 슬쩍 준비해 왔던 걸 꺼냈다.
“어쨌든 이야기를 들은 김에 혹시 작으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선물을 하나 준비해 왔습니다.”
“······?”
화젠민은 재성이 탁자 위에 올려놓은 네모난 상자를 봤다.
크기가 좀 클 뿐, 겉으로 봐선 별 특별할 것이 없어 보였다.
화젠민이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뚜껑을 열자.
뜻밖에도 상자 안에는 옆으로 길쭉하게 생긴 베개가 하나 들어 있었다.
양쪽 끝이 붉은 천으로 덧대어 있으며 복숭아 꽃 모양의 자수가 들어가 있는 비단 베개였다.
곱게 비단보에 싸여 있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던 화젠민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는 재성을 보고 되물었다.
“베개?”
“예. 불면증엔 침구를 바꿔보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라고 하더군요.”
“내가 그런 걸 안 해본 줄 아시오.”
“베개 겉감에 복숭아꽃 자수가 놓여 있지요? 예로부터 복숭아나무는 사특한 것과 액운을 쫒는다고 알려져 있으니 숙면에 도움이 될 겁니다. 거기에 이 수를 놓은 천은 향나무 가루를 섞은 물에 염색한 것이라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향이 난답니다.”
재성은 그럴듯한 말을 지껄이며 속으로 제발 넘어가라 하고 외쳤다.
어차피 겉감은 권혁재 과장을 시켜 급하게 구한 거고 진짜는 안에 넣어둔 히프노스의 베개였다.
그런 재성의 바람이 통했는지 화젠민은 망설이는 표정으로 베개를 집어 들더니 툭툭 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나무 향 비슷한 게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긴가민가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화젠민은 재성을 향해 말했다.
“어쨌든 여기까지 가지고 온 성의가 있으니 고맙게 받겠소.”
됐다!
재성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예. 당장 오늘이라도 꼭 한 번 써보십시오. 분명 효과가 있을 겁니다.”
“······.”
자꾸 써보길 권하는 것이 이상했지만 화젠민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다.
“그러겠소.”
****
당서기 관저.
고급스럽게 꾸며진 서재에서 화젠민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조명에 비친 시계 바늘은 벌써 자정이 넘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일도 꽉 차 있는 일정을 생각하면 이미 잠자리에 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어차피 자지 못할 것을 알기에 뒤척이며 시간을 보내느니 차라리 일이라도 하자 싶어 앉아 있는 거였다.
“당신. 아직도 안 자요?”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문가에 아내가 서 있었다.
실크로 만든 잠옷 가운이 호리호리한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옆으로 넘긴 머리카락 때문에 하얀 목선이 도드러져 보였다.
인민 여배우 출신인 아내 리자츈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한 미모를 뽐냈다.
하지만 아름다운 아내가 옆에 있어도 품에 안고 잠들질 못하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거 마저 끝내고 들어갈게.”
“시간이 몇 신데 아직도 일을 한단 말이에요.”
리쟈춘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화젠민을 바라보았다.
“또 그 불면증 때문에 그러죠.”
“······당신도 잘 알잖아.”
“그래도 일단 누워서 자려는 노력이라도 해봐야죠.”
화젠민은 지친 얼굴로 서류를 손에서 놓았다.
몸과 마음이 다 피곤해서일까.
똑같은 주제로 아내와 몇 번씩 말을 반복하는 것도 귀찮았다.
아내가 잠들 때까지 대충 옆에 누워 있다 다시 나와야겠다고 생각하며 화젠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침실로 들어간 화젠민은 침대 위에 낯선 물건이 있는 것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저게 왜 여기 있어?”
침실 인테리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붉고 노란빛깔의 베개를 가리키며 화젠민이 물었다.
“당신 비서가 가져왔던데요.”
“으응. 선물로 받은 거긴 한데······.”
화젠민은 탐탁지 않은 눈으로 베개를 바라보았다.
재성이 내뱉는 말에 홀려 일단 베개를 받긴 했지만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니 영 미심쩍었던 것이다.
“그럼 원래 쓰던 걸로 바꿔줘요?”
화젠민은 잠시 생각하다 됐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기왕 꺼냈으니 오늘 하루만 써보지, 뭐.”
늦은 밤인데 일부러 번거롭게 일을 시키기도 좀 그랬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화젠민은 무겁게 가라앉은 기분으로 베개에 머리를 눕혔다.
대체 이런 생활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오늘도 잠을 자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
그렇게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땐 이미 아침이었다.
“이게 무슨.”
화젠민은 열린 커튼 너머로 환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는 걸 발견하곤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일어났어요?”
한쪽 귓불에 진주 귀걸이를 끼우면서 아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편한 실내복 차림이었으나 옅은 화장을 한 리쟈춘은 왕년의 여배우답게 고상한 이미지를 풍겼다.
“당신 어젯밤은 아주 잘 자던데요.”
“그, 그래?”
리쟈춘이 밝게 웃으며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매일 잠을 못 자서 울상이더니 대체 무슨 일이야. 혹시 이 베개 덕분인가. 누군지 몰라도 선물해 준 사람한테 고마워해야겠네요.”
정말 그런가 싶어 화젠민은 자신이 베고 잔 베개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그냥 평범한 베개인데.
이게 그렇게 효험이 있단 말이야?
화젠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거렸다.
***
상하이 구시가지.
재성은 권혁재 과장과 함께 사람들로 북적이는 재래시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부사장님! 여긴가 봅니다.”
권혁재 과장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도로 옆에 구멍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구멍가게마다 외국 드라마와 영화 포스터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그리고 가게 안 벽장에는 수백 장이 넘을 것 같은 DVD가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할리우드 영화와 미국 드라마는 물론이고 한국과 대만 그리고 유럽 것까지 종류가 아주 다양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중에 하나를 꺼내 든 재성은 단번에 정품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조잡하게 인쇄된 겉표지에 대충 붙여 놓은 비닐까지 불법 복제된 DVD가 분명했다.
“허어. 부사장님. 이것 좀 보십시오.”
권혁재 과장이 건네주는 DVD를 받아서 살펴본 재성은 미간을 찡그렸다.
한국에서 개봉한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영화가 버젓이 DVD로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아직 DVD로 정식 출시도 하지 않은 작품 아닙니까?”
“그럴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대충 짐작이 된 재성은 머리를 갸웃거리는 권혁재 과장을 보며 말했다.
“아마 극장에서 디지털 캠코더로 몰래 촬영한 걸 거예요.”
“예에?!”
“그렇게 촬영한 영상에다가 중국어 자막을 대충 입혀서 파는 거겠죠.”
대충 이해가 된 권혁재 과장은 머리를 절레 흔들었다.
“짝퉁의 천국이라더니. 영화와 드라마까지 불법 복제품이 판을 치는 동네군요.”
“저작권법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중국 내에서는 유명무실하니까. 더욱 그럴 거예요.”
“그러고 보니까. 아까 들어올 때 분명히 공안이 근처에 있었는데. 전혀 단속할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 역시 도로 한쪽에 순찰차를 세워 놓고 잡담을 나누고 있는 공안들을 봤다.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최신 영화들을 그새 몇 개 더 찾아낸 권혁재 과장이 약간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불법 DVD가 판을 치는데 극장에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 올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권혁재 과장이 우려하는 대로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복제 DVD나 인터넷 불법 다운로드를 통해 영화를 보고 있었다.
“물론 지금 당장은 그렇지만 중국도 이런 상황을 언제까지 그냥 놔두지는 않을 거예요. 거기다가 앞으로 소득이 높아질수록 서서히 문화생활을 즐기기 시작할 중국인들의 숫자를 생각한다면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먼저 진출해서 자리를 잡아야 될 겁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샘플로 DVD 몇 장을 사서 돌아가도록 합시다.”
“예.”
두 사람은 30위안, 한화 4천 원에 불법 DVD 6장을 구입하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거리를 얼마쯤 걸었을 때 안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 벨이 울렸다.
중국말로 잠시 통화를 한 재성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권혁재 과장을 보며 말했다.
“호텔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어딜 들렀다 가야 될 것 같군요.”
“갑자기 어딜······?”
“화젠민 당서기가 보자는군요.”
나하고 호형호제를 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