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수저 생활백서-68화 (68/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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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이 차 타고 다니세요.

시상식 다음 날은 숙취와 함께였다.

“으으.”

술에 떡이 되어 바로 자버린 탓인지 입 냄새가 고약했다.

팬티 차림으로 덜렁 누워 있던 그는 손으로 옆을 더듬어 핸드폰 시계를 보았다.

“미친. 벌써 1시야?”

어떻게 화장실도 안 가고 계속 잤는지 모르겠다.

비척비척 일어나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으니 그제야 겨우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나저나 진짜 내가 1등한 게 맞는 건가.”

하루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실감이 안 났다.

문자함을 보니 벌써 주위에 소문이 쫙 퍼진 건지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가득 들어와 있었다.

개중엔 무조건 한턱 쏘라는 쓸데없는 메시지도 많았다.

복권이라도 당첨되면 사돈의 팔촌까지 달려들어 돈 뜯어내려고 한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그걸 보면서 새삼스레 이게 현실이구나, 하며 깨닫고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선정혁 씨 핸드폰 맞습니까?]

“예. 전데요.”

[아, 전 한일 자동차 딜러인 강윤태입니다. 씨네박스에서 주최한 사내 공모전에 당선되셨죠? 부상으로 받으실 자동차를 가져왔는데 확인해 주셨으면 해서요. 신분증도 가지고 오셔야 합니다.]

“지금요?”

[담당자랑 어제 오후 전화통화 하신 걸로 아는데요. 오늘 바로 인수받으시겠다고 주소까지 불러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러자 머리에 흐릿한 기억이 떠올랐다.

친구들과 한창 술을 마시고 있을 때쯤 그런 전화를 받았던 것 같기도 했다.

문제는 그때 이미 평소 주량을 돌파한 뒤라 지금도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지금 아파트 바로 밑인데 내려오셔서 간단하게 인수증에 사인해 주시고 확인 부탁드립니다.]

“어어. 5분, 아니, 10분만 기다려 주세요.”

선정혁은 급하게 윗도리를 걸치고 바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어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아파트 야외 주차장에 국산 대형 세단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그것도 소위 아버지들의 로망이라고 불리는 모델이었다.

“선정혁 씨?”

흰 와이셔츠를 입은 딜러가 그를 알아보고 먼저 말을 걸었다.

“예예,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하하, 괜찮습니다. 여기 자동차 키 받으시고요. 이건 저희 대리점에서 챙겨 드리는 사은품입니다.”

딜러는 미리 준비해 둔 키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봉투에는 어머니들이 좋아하는 키친타월과 간단한 세차 용품 세트가 사은품으로 담겨 있었다.

대체 은행에서 적금을 들었을 때나 줄 법한 사은품을 왜 자동차 대리점이 주는지 의아했지만 어쨌든 공짜라 고맙게 받았다.

“자, 여기에 사인하시고. 이 밑에도요.”

딜러가 콕콕 집어주는 부분에 사인을 몇 번 반복하고 나니 어느새 절차가 다 끝나 있었다.

“제 명함도 드릴게요. 혹시 타시다가 자동차에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인사하면서 딜러를 보낸 선정혁은 아파트 주차장에 덜렁 놓인 자동차를 보면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손바닥에 놓인 자동차 키의 묵직함이 그를 서서히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선정혁은 자동차 키를 이리저리 돌리며 살펴보다 어제 일을 떠올렸다.

[우리 회사에 들어오는 건 어때요?]

재성이 말했던 대사가 귀에 생생하게 맴돌았다.

“특별 채용이라.”

이제 취업하려고 스펙을 쌓거나 자격증을 따지 않아도 되는 걸까.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힘들게 지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점차 들떠 오르는 기분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잘 되지 않았다.

미친놈처럼 히죽거리는데, 익숙한 차 하나가 클락션 소리를 내며 그의 앞에 멈춰 섰다.

“아니, 누가 주차를 이딴 식으로 했어?”

성질을 내면서 차에서 내린 사람은 바로 선정혁의 아버지였다.

10년도 더 된 낡은 모델에 이런저런 잔고장이 많은데도 여전히 부모님은 그 차를 타고 다녔다.

“당장 관리실에 신고해야지 안 되겠어.”

“아유, 너무 화내지 말고 좀 부드럽게 말해요. 저번처럼 싸우지 말고.”

조수석에서 내린 어머니가 선정혁을 발견하곤 어머, 하면서 눈을 크게 떴다.

“아들! 왜 밖에 나와 있어. 아까 아침엔 계속 자고 있더니 이제 깬 거야?”

“시간이 몇 신데요.”

가볍게 대답한 선정혁은 트렁크에서 물건이 가득 담긴 종이박스를 내리는 아버지를 도왔다.

“또 이모 텃밭에서 먹을 거 얻어 오셨어요?”

박스 안엔 상추, 호박, 가시 오이 같은 채소류가 꽉 들어차 있었다.

“이거 말고 저 안쪽에 있는 게 더 무거워.”

네가 젊으니까 더 무거운 걸 들라고 시키는 아버지를 향해 선정혁이 슬쩍 물음을 던졌다.

“아버지. 저 차 어때요?”

그러자 아버지가 힐끗 주차된 차를 보곤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좋긴 하네.”

그러면서 투덜거리는 말도 물론 덧붙였다.

“저런 차 끌고 다닐 정도면 돈도 많을 텐데 주차를 뭐 저따위로 해놨대? 하여간 돈 있다고 교양까지 있는 건 아니라니까.”

에잉 하고 혀를 차는 아버지 앞에 선정혁이 불쑥 차 키를 들이밀었다.

“아버지 차예요.”

“엥?”

뭔 소리야 하는 표정으로 아버지가 선정혁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웬 개풀 뜯어먹는 소리를 하고 앉아 있어. 저게 왜 내 차냐. 남의 차지.”

장난하지 말고 얼른 짐이나 옮기라고 하는 아버지를 향해 선정혁이 말했다.

“원래는 제 건데 아버지 타시라고요. 어차피 지금 차는 너무 낡아서 바꿔야 했잖아요.”

아버지는 차 키와 선정혁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그제야 농담이 아닌 것을 깨닫고 박스를 도로 내려놓았다.

“네 차라니?”

“저 공모전에 참가했는데 1등 했거든요. 그래서 부상으로 받은 차예요.”

상세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얼굴엔 못 믿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진짜라니까요? 이거 보세요.”

선정혁이 리모컨 버튼을 누르자 차문에서 삑 소리가 나며 잠금장치가 풀렸다.

그걸 보고 깜짝 놀라는 부모님을 향해 선정혁은 당당히 가슴을 폈다.

“그리고 저 취직도 됐어요. 이제 아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

김윤성 사장은 앞에 놓인 서류철을 보고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뭔가?”

“이번 공모전에서 채택된 아이디어들을 실행할 방안을 정리한 겁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네. 이걸 다 당장 실행하겠다는 건가.”

시선을 받은 재성이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좋은 아이디어들이 많은데 가만히 묵혀둘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것 참.”

뒤로 몸을 기댄 김윤성 사장은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부사장 자리에 온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이것저것 쉬지 않고 일을 벌이는 재성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나같이 굵직굵직한 일들이라서 이제는 뭐만 한다고 하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지경이었다.

잠시 말이 없던 김윤성 사장은 이내 재성을 보며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박 부사장.”

“말씀하십시오.”

“실적을 보이고 싶은 마음에 의욕적으로 일을 하는 건 좋네. 뭐든 급하게 먹다 보면 체하는 법이지 않겠나.”

“······.”

“앞서 벌려놓은 일들도 많지 않은가. 이것까지 하다 보면 제대로 집중하지 못해 죽도 밥도 아니게 될까 솔직히 걱정이 되네.”

“흠, 보류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김윤성 사장이 달래듯 좋게 설득했다.

“당장 급한 일도 아니니까. 일단 중국 진출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진행토록 하세.”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김윤성 사장은 얌전히 말을 듣는 듯한 재성을 보고 흐뭇하게 여겼다.

“그래.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게.”

하지만 김윤성 사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재성의 반박이 이어졌다.

“말뜻은 이해했습니다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이대로 이야기가 마무리될 줄 알았던 김윤성 사장이 미간을 좁혔다.

계속 주장을 굽히지 않는 모습이 못마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일들을 많이 진행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물론 잘해보려는 제 개인적인 욕심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만, 이대로 안주할 생각도 없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머지않아 지금 있는 자리마저 못 지키고 도태될 것이라는 위기감에 적극적으로 변화를 꾀하는 겁니다.”

“비약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냉정한 현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김윤성 사장이 여전히 수긍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짓자 재성은 계속 말을 이었다.

“올 한 해만 해도 전국적으로 10개 상영관, 100개가 넘는 스크린이 새로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내년에도 이런 추세는 계속 이어질 예정이고요. 당장 저희만 해도 미국 투자로 인해 잠시 미루어졌지만 곧 두 개 상영관을 더 지을 계획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더욱 내실을 다지자는 것 아닌가.”

“천천히 차분하게 가자는 것이 정말 내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김윤성 사장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제대로 된 계획 없이 막연하게 내뱉은 소리였으니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경쟁 업체들에 맞서려고 똑같이 상영관을 마구 늘리는 건 어려운 일이라는 걸 사장님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딱히 대꾸는 하지 않았으나 김윤성 사장은 곤혹스런 얼굴로 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1, 2위 업체들과 비교해서 회사의 역량 차이가 나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제일 큰 차이는 그룹에서 별다른 비중이 없는 우리와 달리 경쟁 업체들은 주력으로 밀어주고 있다는 거지.’

그러다 보니 투자할 수 있는 자금 액수에서부터 크게 차이가 났다.

“이처럼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저희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바로 어떤 업체에서 운영하는 상영관을 가나 다 똑같은 획일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저희만의 독특한 개성과 매력을 가지는 겁니다.”

“그게 부사장이 가져온 이 기획안들이라는 건가?”

김윤성 사장의 물음에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극장을 단순히 영화만 보고 나오는 장소가 아니라 맛있는 먹거리와 즐길 거리가 있는 하나의 문화 컨텐츠로 만드는 겁니다.”

“흐음.”

팔짱을 낀 채 김윤성 사장은 고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이미 포토 티켓과 스낵코너 메뉴 다양화로 수익을 늘릴 수 있다는 걸 확인했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무한정 상영관 늘리기에 뛰어드는 것보다 투자 비용이 훨씬 적다는 겁니다.”

스낵코너 수익이 확 늘고 포토 티켓의 인기가 많은 걸 보고 김윤성 사장 역시 많이 놀랐었다.

그걸로 인해 재성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아무리 임기를 무사히 다 채우는 것이 목적인 김윤성 사장이었지만 그렇다고 회사 대표로서 책임감과 능력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재성의 이야기가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김윤성 사장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있는 재성을 보며 말했다.

“좋아. 그럼 부사장이 책임을 지고 진행하도록 해.”

허락이 떨어지자 재성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사무실로 돌아온 재성은 바로 유호빈 마케팅 부장을 호출했다.

“사장님 결재가 떨어졌어요. 기획안대로 마케팅 부서를 사업부로 확대 개편하는 작업을 진행하도록 해요.”

“예. 알겠습니다.”

부서가 커지면 마케팅 부장의 권한 역시 함께 늘어난다.

일거리긴 했지만 희소식에 유호민 부장이 반색하며 대답했다.

“굿즈를 비롯한 여러 가지 캐릭터 상품들을 퀄리티 높게 만들어내려면 무엇보다 디자인팀의 역량이 가장 중요할 겁니다. 그러니까 실력 있는 디자이너들을 충분히 확보하는 데 각별히 신경을 쓰세요.”

“네.”

유호빈 부장은 몇 가지 더 필요한 일들을 지시받고 부사장실을 나갔다.

혼자가 된 재성이 한쪽에 쌓여 있는 서류들을 살펴보려고 막 손을 뻗으려고 할 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액정을 확인하자 네오픽스 대표인 허인환이었다.

‘어쩐 일이지?’

그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네.”

[바쁘신데 연락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런데 회사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실은 던전 워 중국 서비스 오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

우리에게 갑질을 하는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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