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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저놈은 지금 자리에 있을 그릇이 안 돼.
[수도권 서북부의 랜드마크 단지를 꿈꾸던 메가시티 대규모 미분양 발생!
메가시티는 경기 북부 최고급 주택단지를 표방하며 제일 건설에서 야심차게 진행 중인 프로젝트이다. 그러나 이번에 2천 5백 세대를 한꺼번에 분양했다가 채 절반도 못 채우는 참담한 결과를 내놓으면서 프로젝트 진행에 적신호가 들어왔다. 전문가들은 이번 결과를 그동안 뜨겁게 타올랐던 부동산 경기가 꺾이는 신호로 해석할 수도 있다면서······.]
“결국 이렇게 됐군.”
재성은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호텔에서 가져온 한국 신문에 난 메가시티 기사를 보며 짧게 혀를 찼다.
고가 분양에 아직 다 갖춰지지 않은 주변 인프라까지 실패 요소가 너무나도 많았다.
“거기다가 미국에서 터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유탄을 바로 맞았으니 잘될 리가 없지.”
대규모 미분양 사태는 예정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 성격에 둘째 형을 가만 놔두실까 몰라.”
아무리 오너 직계라고 해도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기 힘들었다.
그동안 저만 보면 시비를 걸어대던 얼굴이 엉망으로 구겨질 걸 생각하니 아주 고소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사태 때문에 그룹이 어려움을 겪게 되진 않을까 걱정도 됐다.
“아, 진짜 골칫덩어리 같으니라고.”
아무튼 인생에 도움이 되는 일이 없다니까.
재성은 짜증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힘들긴 하겠지만······ 원래도 잘 이겨냈었으니까. 이번에도 그렇겠지.’
아무래도 가족이 얽힌 일이니만큼 평소처럼 차분함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룹이 타격을 받으면 재성에게도 당연히 영향이 갈 테고.
재성은 어지러운 속내를 정리하며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시내 풍경에 눈을 고정시켰다.
얼마 뒤, 중남해에 위치한 국무원 본관 앞에 재성을 태운 고급세단이 멈추어 섰다.
차문을 열고 내리자 낯익은 사내가 가까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부주석께 모시고 오라는 지시를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내는 바로 화젠민의 최측근 비서실장인 당쉐샹이었다.
작년에 중앙당 서기처 제1서기이자 정치국상무위원회 위원에 임명됐던 화젠민은 불과 몇 달 만에 다시 부주석으로 승격됐다.
명실상부한 중국의 차기 지도자로 올라선 것이었다.
‘역시 미리 베팅을 해두길 잘했어.’
처음 상하이에서 만났을 때 조금만 주저하거나 머뭇거렸다면 귀빈 대접을 받으며 이곳에 오지 못했을 터였다.
재성은 이제 실과 바늘처럼 옆에 없으면 허전한 권혁재 과장을 대동하고 당쉐샹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중국 권력의 최고 정점을 상징하는 건물답게 매우 웅장하며 사람을 찍어 누르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일행은 매끈하게 잘 닦인 복도를 따라 부주석실로 곧장 올라갔다.
당쉐샹이 두꺼운 문 앞에 서서 똑똑 노크하고는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가시죠.”
재성은 권혁재 과장이 들고 있던 비단 보자기를 건네받고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짙은색 카펫이 깔린 넓은 집무실 한쪽.
커다란 창문을 등 뒤로 두고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화젠민이 그를 보곤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겼다.
“왔나. 같이 식사라도 해야 되는데 보다시피 이것저것 살펴볼 일들이 많아서 말이야.”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높은 자리에 오르셨는데 당연히 그러시겠죠. 바쁘신데 괜히 제가 찾아와서 일을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 말은 아주 듣기 좋게 잘하는구만.”
“부주석이라면 중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자리이니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렇다고 해두세.”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화젠민 크게 웃으면서 그와 악수를 나눴다.
먼저 소파에 앉은 화젠민이 손으로 빈자리를 가리키자 재성이 그리로 가서 앉았다.
“부주석이 되신 걸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이게 다 아우 덕이야.”
“제가 뭘 한 것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우가 아니었다면 중남해에 발을 디디는 건 고사하고 아직 상하이에 주저앉아 있었을 거야.”
화젠민의 말에 재성은 겸손하게 대답했다.
“낭중지추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진흙 속에 묻혀 있어도 세상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이니 제가 없었더라도 두각을 나타내셨을 겁니다.”
“정말 그리 생각하나?”
“그렇습니다.”
잠시 재성을 바라보던 화젠민이 이내 표정을 느슨하게 풀었다.
“이러니까 내가 자네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어.”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 재성이 옆에 놔둔 비단 보자기를 탁자 위에 올려놨다.
“이게 뭔가?”
“축하의 의미로 뭘 해드릴까 고민하다가 어렵게 구해온 물건입니다.”
“뭘 이런 걸 가져왔나.”
“제 정성이니 받아주십시오.”
“사람하고는.”
화젠민은 기분 좋은 얼굴로 팔을 뻗어 포장을 풀었다.
목함 뚜껑을 열고 안을 확인한 화젠민은 이내 놀란 듯이 말했다.
“아니, 이건······.”
“청나라 강희제가 사용하던 옥새입니다.”
“허어.”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화젠민은 눈을 크게 뜬 채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단향목 구룡조각 옥새를 두 손으로 집어 들었다.
은은한 향기와 함께 금방이라도 아홉 마리 용들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승천할 것처럼 정교하게 조각된 옥새의 모습에 화젠민은 진심 어린 감탄성을 내뱉었다.
“정말 멋지군. 세세하게 조각된 용들하며 황제의 기품과 위엄이 그대로 풍기는 보물이야.”
“아래에는 ‘경천근민’ 네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강희제가 일생 동안 사용한 여러 옥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물건입니다.”
옥새를 이리저리 살피는 화젠민을 보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하늘을 경외하고 백성 다스리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참 좋은 말이지요. 옥새의 글귀가 앞으로 중국 인민들을 이끌어 가게 될 형님께 잘 어울릴 것 같았습니다.”
“경천근민이라······.”
옥새 아래에 새겨져 있는 글을 확인하고 낮게 읊조린 화젠민은 이내 머리를 크게 끄덕였다.
“오래도록 가슴에 새겨둘 만한 훌륭한 글귀로군.”
옥새를 다시 목함에 집어넣은 화젠민은 아주 흡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런 선물을 가져올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네.”
“마음에 드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깊은 의미를 가진 선물인데 당연히 마음에 들다마다.”
대권을 노리고 있는 화젠민에게 황제를 상징하는 옥새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자넨 볼 때마다 날 기분 좋게 만드는구만.”
화젠민은 소파 팔걸이를 두드리면서 잠시 생각하더니 인터폰을 눌러 비서실장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허리를 숙인 당쉐샹에게 화젠민이 기세 좋게 말했다.
“오늘 오후 스케줄을 전부 취소하게.”
“예?”
“여기 있는 내 의동생하고 간만에 느긋이 저녁식사라도 할까 싶어서 말이야. 방해받는 일이 없도록 전부 취소해.”
당쉐샹은 곤혹스러운 낯을 했다.
“예정된 일정이 많습니다만······.”
그중에는 일방적으로 취소를 하기 힘든 중요한 약속도 있었다.
하지만 화젠민은 인상을 쓰면서 당쉐샹에게 말했다.
“내 말이 안 들렸나. 꼭 두 번 말해줘야 해?”
“죄송합니다.”
당쉐샹은 화젠민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을 깨닫곤 급히 사과했다.
“바로 지시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렇게 당쉐샹이 나가는 것을 보며 재성은 미안한 듯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저 때문에 굳이 약속까지 취소하실 필요는 없는데······.”
“이런 귀한 선물을 받고서 어떻게 가만있겠나.”
재성을 돌아보는 화젠민의 얼굴은 온화한 미소로 가득했다.
방금 전 당쉐샹에게 엄한 말투로 소리친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겸사겸사 자네 핑계를 대서 나도 좀 쉬어야지. 매일 저녁마다 사람들하고 만나서 얘기 나누는 것도 피곤한 일이야.”
“그럼 제가 형님을 즐겁게 해드려야겠군요.”
“흠. 뭐 재밌는 얘깃거리라도 있나?”
그러면서 화젠민은 기대된다는 듯 턱을 쓸었다.
‘준비한 선물이 아주 제대로 먹혔군.’
재성은 화젠민의 전폭적인 신뢰를 기꺼워하며 내심 만족스레 웃었다.
***
한편 재성이 중국에서 앞으로 최고 권력자로 등극할 화젠민과 친분을 돈독히 하고 있을 때.
서울에 있는 제일 그룹 본사 사옥은 암운이 무겁게 드러워져 있었다.
널찍한 본사 임원 회의실은 제일 그룹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바닥에 붉은색 카펫이 깔려 있고 값비싼 그림과 휘호가 벽에 걸려 있었다.
회의실 안에는 박경수 회장을 상석에 두고 윤경욱 기획본부장과 김원식 건설 사장 등 열 명이 넘는 주요 임원들이 양쪽으로 늘어 앉아 있었다.
그중에는 박경수 회장의 두 아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다들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박경수 회장의 눈치만 봤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박경수 회장이 침묵을 깨며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박 상무.”
“······예.”
“메가시티에 청약을 한 사람이 모두 몇 명이라고 했지?”
“그게······.”
긴장으로 몸을 굳힌 박재민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다 차가운 박경수 회장의 시선을 받고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천이백 명이 조금 안 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원목 테이블을 세게 내려치며 박경수 회장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자신하더니 몇 명이라고? 분양 완료는 고사하고 절반도 다 못 채웠단 거냐!”
분노한 박경수 회장의 목소리가 회의실 내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자칫 1조 원이 넘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좌초할지도 모르는 위기였으니 당연했다.
회의실을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박재민에게로 몰렸다.
박재민은 애써 침착을 유지하려 했으나 말없이 가해지는 비난과 책망에 사실 엄청난 압박감을 받았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기에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변명을 늘어놨다.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습니다. 일단 공사를 계속 진행하다가 적절한 시기가 오면 다시 분양을 시도해 볼 겁니다. 그때는 충분히 완판시킬 수 있을······.”
재민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박경수 회장의 성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금 바로 분양을 해야 된다고 밀어 붙였던 건 바로 너잖아!”
정곡을 찔린 박재민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사실이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그는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박경수 회장은 테이블을 세게 후려치고 재민을 향해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손가락질을 했다.
“당장 나가! 넌 여기 있을 자격이 없어, 나가!”
박재민은 전에 없을 정도로 화가 난 박경수 회장을 보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회장님, 아니, 아버지!”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박경수 회장은 더욱 격노해 소리쳤다.
“아버지라니! 여긴 회사야. 넌 필요할 때만 아버지 운운하면서 매달릴 셈이야!”
박경수 회장은 눈을 부라리며 그에게 재차 소리쳤다.
“당장 나가라니까 뭘 하고 있어! 좋아. 안 나가겠다면 억지로라도 나가게 해주마!”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끌고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당황한 직원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주춤거리는 사이, 박재민은 팔을 휘두르며 뻗어오는 손길을 뿌리쳤다.
그리고 이를 꽉 악물더니 홱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
등 뒤로 쏟아지는 시선들이 따가웠으나 애써 무시했다.
안의 소란이 전해진 건지 놀란 눈동자로 쳐다보던 사람들은 이내 모르는 척 저마다 고개를 돌렸다.
박재민이 거친 발걸음으로 복도를 울리며 사라지자 박경수 회장은 주먹 쥔 손을 파르르 떨었다.
“못난 놈 같으니라고.”
그러자 옆에 있던 윤경욱 기획본부장이 조심스럽게 그를 달랬다.
“고정하십시오. 화를 내시면 혈압에 좋지 않습니다.”
“끄으응. 이 꼴을 보고도 내가 열이 안 받게 생겼나.”
그렇게 말하곤 고개를 돌려 곤혹스런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는 김원식 건설 사장을 봤다.
“김 사장.”
“예, 옙.”
“자네한테도 아주 실망이야.”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푹 머리를 숙인 김원식 사장은 차갑게 바라보며 물었다.
“대책은 가지고 왔겠지.”
자세를 바로 한 김원식 사장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대답했다.
“부동산 경기가 저희 예상보다 빨리 얼어붙고 있는 상황이라 지금 추가로 분양에 나서봤자 좋은 결과를 얻긴 힘들 것입니다. 그렇다고 집값을 할인하거나 여러 가지 추가 혜택을 준다면 기존 분양자들이 반발하는 건 물론이고 회사 이미지도 크게 실추될 겁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김원식 사장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박경수 회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공사를 계속 진행시키다가 부동산 경기가 다시 반등하면 그때 2차 분양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판단입니다.”
“박 상무가 한 이야기하고 똑같은 거잖아.”
눈썹을 찌푸린 박경수 회장을 보며 김원식 사장이 얼른 말을 받았다.
“이미 기초를 끝내고 건물이 올라가고 있는 상황에서 공사를 중단시킨다면 파장이 적지 않을 겁니다. 회사 신용도가 추락하는 건 물론이고 공사 중단이 장기회 될 경우 금융 부담이 상당할 것입니다.”
“현재까지 차입한 자금이 얼마나 되나?”
“4천 6백억가량 됩니다.”
작지 않은 액수에 박경수 회장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손톱 끝으로 탁자를 두드리면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거야말로 진퇴양난이군.”
“죄송합니다.”
“자네 말대로 이대로 공사를 멈추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니까. 그대로 진행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윤 본부장.”
“예.”
박경수 회장은 싸늘한 낯빛을 하고서 말했다.
“박 상무 저놈은 지금 자리에 있을 그릇이 안 돼. 인천에 있는 포장 회사로 보내 버려!”
그러자 주변에서 헉, 하며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인천에 있는 포장회사라면 직원 숫자를 다 합쳐도 50명이 채 안 되는 아주 작은 회사였다.
그런 곳으로 발령 낸다는 건 명백한 좌천이었다.
그래도 아들인데 설마 박경수 회장이 이런 강수를 둘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다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판을 좀 크게 벌이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