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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막내는 미국에서 뭘하고 있는 거야?
서울 마포 제일 그룹 본사.
건물 최상층에 위치한 회장실 안은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가운데 자리에 앉은 박경수 회장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왼편에 위치한 윤경욱 기획본부장에게 시선을 줬다.
“필요한 자금이 얼마라고 했나?”
“3천 2백억 원입니다.”
“적은 액수는 아니군.”
미간을 찡그린 박경수 회장을 보며 윤경욱 본부장이 말을 덧붙였다.
“메가시티 공사비와 UAE 루와이스 정제소 증설 프로젝트를 마무리 짓는 데 자금 소요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김 사장을 변호해 주라고 자넬 부른 것이 아니야.”
“죄송합니다.”
따끔하게 경고를 한 박경수 회장은 몸을 뒤로 기대면서 물었다.
“회사채 발행은 가능할 것 같나?”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해 시중에 유동성이 마른 상태라 목표한 금액을 다 채우려면 평소보다 두 배 이상 높은 금리를 지불해야 될 걸로 보입니다.”
생각한 것보다 높은 이자였다.
“두 배나 줘야 된다고?”
“네. 그나마 저희는 신용도가 높아서 가능하지만 아래 등급에 있는 회사들은 회사채 발행 자체가 어려운 지경입니다.”
“상황이 그 정도로 심각하단 소리군.”
“전체적으로 어렵지만 그중에서도 건설 쪽이 가장 타격이 큽니다.”
“으음.”
박경수 회장의 입에서 낮은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건설은 그렇다 치고 그룹 전체 재무 상황은? 괜찮은 거겠지.”
“당장 큰 문제는 없습니다만······.”
말끝을 흐린 윤경욱 본부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위기가 단기간에 끝나지 않고 길게 이어진다면 유동성 확보가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에 대비해서 지금부터라도 지출을 최대한 억제해 재무 건전성을 확보해 둘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그룹 본체도 안심할 수 없다?”
“물론 이건 최악의 경우를 말씀드린 겁니다.”
윤경욱 본부장의 말에도 박경수 회장의 표정은 풀어질 기미가 없었다.
“기업을 운영하려면 항상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둬야 하는 법이지. 시중에 돈이 마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미 IMF 때 충분히 겪었지 않나.”
대한민국 경제의 암흑기였던 IMF를 거론하자 윤경욱 본부장뿐만 아니라 나란히 앉아 있던 정태규 실장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떠올랐다.
“지금부터 그룹 전체를 비상 경영 체제로 바꿔야겠어. 자네들은 재무 상황을 다시 한번 철저히 확인해 봐.”
“알겠습니다.”
“그리고 건설 사장을 맡길 만한 인물이 누가 있는지 알아보게. 후보를 추려서 나한테 갖고 와.”
그러자 정태규 비서실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김원식 사장을 교체하실 생각이십니까?”
김원식 사장은 오랫동안 박경수 회장을 섬겨온, 가신 같은 사람이었다.
둘 다 젊었을 때부터 함께해 왔기에 지금 박경수 회장의 말은 폭탄 발언이나 다름없었다.
“명색이 사장이라는 놈이 상무 하나 컨트롤 하지 못하고 끌려 다니는데 어떻게 가만 놔두겠나. 회사를 이 꼴로 만든 데에는 김 사장의 탓도 있어.”
아무리 박재민이라고 해도 김원식 사장을 함부로 대하진 못했을 터였다.
때로는 따끔하게 혼내기도 하면서 이끌어주길 원했는데, 결과가 정반대로 나왔으니 박경수 회장이 느낀 실망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잘라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회사채를 발행하는데 사장까지 교체하면 시장의 반응이 안 좋아질 수도 있었기에 다음 정기 인사 때까지 참는 거였다.
단단히 화가 난 모습에 두 사람은 크게 반대하지 못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박경수 회장은 주먹 쥔 손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막내는 미국에 출장간 지 벌써 한 달이 훌쩍 넘었는데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아예 거기서 살 생각인가.”
“여러 가지 처리할 일이 많아서 일정이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박경수 회장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혹시 거기서 또 놀고 있는 건 아니겠지.”
고삐가 느슨해진 틈을 타 옛날 버릇이 도지는 건 아닌가 걱정되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박경수 회장은 막내에 대한 모든 기대를 버릴 생각이었다.
“설마요. 막내 도련님께서 요즘 많이 달라진 것 아시지 않습니까.”
정태규 비서실장은 안심시키려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그렇지.”
아무래도 요즘 걱정이 많다 보니 별 쓸데없는 생각까지 다 드는 모양이었다.
박경수 회장은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머리를 끄덕였다.
***
한편 재성은 초대받은 결혼식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마이애미로 와 있었다.
경선 유세가 열린 마이애미비치 컨벤션 센터에서 그는 오랜만에 라출라 상원의원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수행원들한테 둘러싸인 채 후문 주차장으로 나온 라출라 의원은 재성을 발견하곤 먼저 반갑게 말을 건넸다.
“오, 미스터 박! 오랜만이오.”
“경선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이런,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사방에서 축하 인사를 해주는군.”
악수를 나눈 라출라 의원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이게 다 미스터 박 덕분이요. ‘우리는 할 수 있다’라는 구호와 함께 경제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한 것이 아주 제대로 먹히고 있소.”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하하하. 대선 후보가 되고 나아가 본선에서 승리한다면 미스터 박의 공이 가장 클 거요.”
한차례 인사가 오간 후 라출라가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아내를 소개했다.
“여긴 내 아내요. 아밀리아, 이쪽은 내가 계속 이야기했던 미스터 박이야.”
“반가워요.”
아밀리아가 붓으로 그린 듯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남편에게서 이야기는 익히 들었답니다.”
재성은 우호적인 웃음 아래 그를 면밀하게 살피는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았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상냥한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빈틈없이 계산기를 두드리는 모습이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 서로 꼭 닮아 있었다.
“파티장까지 가려면 시간이 걸리니 이제 슬슬 움직입시다.”
라출라의 말에 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부터 기다리고 있던 고급 SUV에 라출라 상원의원 부부, 그리고 재성이 함께 올라타자 이윽고 엔진 소리를 울리며 차가 출발했다.
푹신한 가죽시트에 몸을 편하게 기대앉은 라출라는 맞은편에 있는 재성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결혼한 신부의 아버지인 버닝 넬슨 의원은 민주당 안에서도 상당히 영향력이 강한 인물이네.”
“알고 있습니다. 3선에 대대로 정치인 집안인 데다가 재력까지 갖춘 유력가이더군요.”
달랑 초대장만 들고 온 것이 아니라 나름 준비를 한 모습에 라출라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상원에서도 힘이 센 예산 위원회 의장을 맡고 있으니 친분을 만들어두면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될 거네.”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개는 시켜주겠지만 넬슨 의원을 비롯해서 파티에 참석하는 유력 인사들하고 친해지는 건 박 대표 몫이오.”
그 이상은 참견하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재성 역시 파티 내내 라출라 상원의원이 옆에 있어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기에 당연하다는 얼굴로 말을 받았다.
“의원님께 누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라출라는 이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봤다.
“이렇게 만났으니 하는 말인데 자네한테 한 가지 조언을 구할 것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자네 덕분에 제니퍼 의원을 밀어내고 대선 후보로 올라설 수 있었지.”
“전 작은 조언을 드렸을 뿐 그걸 실제로 해낸 건 의원님의 능력이십니다.”
겸손한 모습에 라출라 상원의원은 입가에 얇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경선에서 이겼다고 해도 본선에 나가떨어진다면 아무런 쓸모도 없는 일이지 않겠나.”
대선 후보가 된 것만으로도 인지도를 크게 올리며 거물급 정치인으로 발돋움하게 됐지만 라출라 상원의원의 야망은 이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공화당도 대선 후보가 거의 결정됐다는 이야기는 들었을 거네.”
“존 랄프 상원의원 말씀이십니까.”
“그래.”
라출라는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론 조사에서 내가 앞서고 있기는 하지만 이번 경선에서 이미 경험했다시피 지지율이라는 건 얼마든지 뒤바꿜 수 있는 것이지.”
“맞는 말씀입니다.”
“랄프 상원의원을 꺾고 대선에서 이길 수 있는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한데 좋은 생각이 없겠나?”
우세를 보이고 있지만 언제 존 랄프 상원의원한테 역전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엿보였다.
‘지금까지 흑인 대통령은 고사하고 대선 후보조차도 나오지 않았으니 초조해할 만도 하지.’
대충 상황을 알아차린 재성은 차분히 물었다.
“캠프 참모들은 뭐라고 합니까?”
라출라가 답답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상대쪽은 백인 엘리트 기성 정치인이라는 점을 부각시켜 흑인을 비롯한 소수인종 계층의 지지를 더욱 확고히 하자는데 내가 판단하기에 그건 정답이 아니야.”
그러자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아밀리아가 자연스럽게 끼어들며 남편의 생각에 동조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여전히 미국 내에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계층이 바로 백인 중산층인데 편 가르기를 한다면 오히려 공화당한테 유리한 일이 될 거예요.”
제니퍼 상원의원과 함께 가장 활동적이고 영향력이 컸던 영부인으로 손꼽히는 인물답게 정치적 감각이 아주 뛰어났다.
“두 분의 말씀처럼 대선후보가 된 것에 그치지 않고 대통령이 되는 게 목적이라면 그건 최악의 방법이 될 겁니다.”
“내 말이 그거야.”
“본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공화당의 지지기반이나 마찬가지인 우파와 백인 중산층을 지지자로 끌어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겁니다.”
“그게 쉽지 않으니 문제 아니겠나.”
“어렵게 풀려고 하지 말고 간단하게 생각한다면 일이 수월하게 해결될 수도 있을 겁니다.”
“······?”
라출라 상원의원 부부는 흥미롭다는 듯 눈에 의구심을 담고 그를 쳐다보았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기본 전략은 상대의 장점은 깎아내리고 단점을 최대한 부각시키는 것이죠.”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에 두 사람은 살짝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존 랄프 상원의원한테 가장 타격을 안겨줄 수 있는 약점이 무엇이겠습니까?”
“흐음.”
라출라는 잠시 골똘히 생각해 보고는 대답했다.
“지금의 경제 위기를 야기시킨 행정부와 같은 편에 서 있다는 것 아니겠나.”
“물론 같은 여당인 공화당 소속이니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평소 랄프 상원의원이 제임스 대통령을 자주 비난했었기 때문에 잘못하면 역효과가 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맞아요. 까딱했다가는 여당 지지자들을 결집시킬 수도 있는 데다가 흑색선전은 깨끗한 당신 이미지에 악영향을 끼칠 거예요.”
“여사님의 말씀대로 현 정부의 실패를 랄프 상원의원과 직접 엮어서 공격하는 건 그리 좋은 패가 아닙니다.”
그러자 라출라는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표정으로 재성을 쳐다보았다.
“그럼 딱히 공격할 거리가 없지 않나.”
“서로 날 선 비난을 퍼부으면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건 공화당이 원하는 일일 겁니다. 이미 지지율에서 10% 가까운 격차를 보이며 앞서 나가고 있는데 굳이 이미지를 깎아 내려가며 싸움을 벌일 필요는 없지요.”
그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라출라 상원의원 부부를 바라보며 자신 있게 말을 이었다.
“의원님께서는 지금 가진 지지율만 잘 지켜도 본선 승리는 어렵지 않게 이루어낼 수 있을 겁니다. 반면 열세인 랄프 상원의원 측은 어떻게든 상황을 뒤집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겠지요.”
경선 초반 바로 자신이 그랬었기에 라출라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전쟁 영웅에 합리적인 보수주의자인 랄프 상원의원의 약점을 찾기는 그리 쉽지 않을 겁니다. 그에 비해 죄송한 말이지만 의원님은 트집거리가 한두 개가 아니죠. 지금은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라는 신드롬에 가려져 있지만 진흙탕 싸움이 벌어지게 되면 큰 약점이 될 것입니다.”
“으음······.”
라출라 상원의원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바로 앞에서 껄끄러운 이야기를 꺼내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본선 상대인 랄프 상원의원은 흑색선전과 악의적인 공격을 경멸하는 분이시죠. 장교 출신답게 정의롭고 신사적인 성격. 전 바로 그것이 랄프 상원의원의 약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라출라는 바로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눈을 반짝였다.
“신사적인 것이 랄프 의원의 약점이라······.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군.”
“그리고 결정적인 약점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게 뭐요?”
라출라뿐만 아니라 어느새 이야기에 빠져든 아밀리아 역시 귀를 기울이며 관심을 보였다.
“바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합리적 보수주의자라는 점입니다.”
“방금 전에는 그게 장점이라고 하지 않았소?”
미간을 좁힌 라출라를 보며 그는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맞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양쪽에서 좋은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랄프 의원 입장에서는 운이 없게도 이번 대선의 상대가 바로 의원님이라는 것입니다. 젊고 진취적인 진보 정치인인 의원님 앞에서 중도적 성향을 가진 랄프 상원의원의 이미지는 흐려질 수밖에 없지요. 오히려 같은 진영 안에 있는 강경파의 불만을 사서 지지층이 분열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런 부분을 잘 파고든다면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두게 되실 겁니다.”
눈이 번쩍 뜨인 라출라는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며 감탄성을 내뱉었다.
“내부 분열이라. 그렇군!”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아내를 봤다.
“아밀리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저도 좋은 것 같아요.”
그녀는 재성을 향해 새삼스레 다시 평가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지금 상황에서는 최고의 전략이겠어요. 이런 생각을 해내다니 대단해요.”
“감사합니다.”
재성은 딱히 자신을 낮추기보다 담담하게 찬사를 받아들이는 편을 택했다.
줄곧 걱정하고 있던 문제가 해결되어서인지 라출라는 후련해진 표정으로 자동차 시트에 몸을 푹 파묻었다.
“이렇게 명쾌한 대답을 얻을 줄이야. 역시 자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길 잘한 것 같아.”
“당신이 그렇게 칭찬하더니 다 이유가 있었네요.”
라출라 상원의원 부부의 눈동자에서 짙은 신뢰감이 묻어났다.
그는 어느새 두 사람 모두 마음이 활짝 열린 것을 깨닫곤 웃으며 시선을 마주쳤다.
슈스터 헤이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