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수저 생활백서-112화 (112/703)

112. 더 큰 충격이 건설을 강타할 겁니다.

조금씩 정체가 되면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고급 승용차 안.

재성은 푹신한 뒷좌석 가죽시트에 몸을 기댄 채 미국에 있는 데이비드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한국 통운 주식을 매집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차분한 목소리로 재성이 말을 이었다.

“급한 건 아니니까. 시간을 두고 대주주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금씩 매입하도록 해요.”

[물량은 얼마까지 모아야 되는 겁니까?]

“우선 10%를 목표로 하고 최대한 많이 매집하도록 해요”

[혹시 인수를 염두해 두고 계신 겁니까?]

단순히 시세차익을 노리기에는 너무 많은 지분이었기에 그런 생각을 할 만도 했다.

“지금은 아니에요. 하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움직여 줬으면 해요.”

[흐음. 알겠습니다.]

데이비드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다시 말했다.

[그러면 별도의 페이퍼컴퍼니를 서너 개 만들어서 작업을 진행해야 될 것 같군요.]

“데이비드 씨가 전문가니까. 그건 알아서 하도록 해요.”

5% 룰을 피하고 이쪽에서 지분을 매집한다는 걸 감추는 데 페이퍼컴퍼니만큼 좋은 방법도 없었다.

“작업에 필요한 자금은 곧 보내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럼 미리 기본 준비를 해두고 있겠습니다.]

“그래줘요.”

귀에 댄 핸드폰을 고쳐쥐면서 재성은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이제 미국 대선도 2주 정도밖에 안 남았는데 분위기는 어때요?”

[여전히 라출라 의원이 압도적인 기세로 선두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존 랄프 상원의원이 막판 뒤집기에 희망을 걸고 열심히 뛰고 있지만 역전을 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충격이 워낙 컸으니 지지율 격차를 좁히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계속 관심을 가지고 주시하도록 해요.”

[그러겠습니다.]

그렇게 한참 통화를 하고 나니 어느새 저택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때마침 누나인 재경도 방금 도착한 듯 기사가 열어준 차 문으로 몸을 드러냈다.

“딱 맞춰 왔네.”

그러자 재경이 그를 슥 쳐다보더니 말했다.

“내가 약속 시간에 늦는 거 봤어?”

그보다, 하면서 재경은 커다란 저택 대문을 향해 턱을 까딱였다.

“아버지를 설득할 자신은 있는 거겠지?”

“물론이야. 누나만 실수 안 하면 돼.”

“누가 할 소릴.”

재경은 어이없다는 것처럼 허 하고 실소를 내뱉었다.

“난 언제나 완벽 그 자체야.”

재경은 머릿결을 휘날리며 앞장서서 당당하게 저택 문을 넘었다.

“두 분이 같이 오셨군요. 참 보기 좋습니다.”

“오랜만에 봐요. 권 집사.”

재경은 하나도 바뀐게 없는 집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버지는 집에 계시죠?”

“네. 서재에 계십니다.”

두 사람은 곧장 서재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서재엔 박경수 회장이 집에서 입는 편한 옷차림으로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별일도 다 있군.”

박경수 회장은 검토 중이던 서류들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둘이 함께 어쩐 일이냐?”

“회사 일로 드릴 이야기가 있어요.”

박경수 회장은 재경과 옆에 나란히 선 재성을 쳐다보더니 빈 소파 자리를 가리켰다.

두 사람이 앉는 것을 본 후, 박경수 회장은 소파에 몸을 기댄 자세로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했다.

“그래. 무슨 일인데?”

재경은 핸드백에서 큼직한 파일을 꺼냈다.

그리고 거기서 A4 크기의 용지를 꺼냈는데 재경이 준비해 온 계획서였다.

“이게 뭔데?”

“대형 아울렛 사업 계획서예요.”

“아울렛 사업이라고?”

“네.”

누나인 데다가 아무래도 아울렛 사업은 백화점이 주가 될 수밖에 없었기에 재경이 계속 설명했다.

“경기도 하남에 멀티플렉스 극장과 테마파크 그리고 아쿠아 랜드등 각종 오락 시설을 갖춘 5만 평 규모의 대형 아울렛을 지으려고 해요.”

박경수 회장이 굵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뗐다.

“사성에서 만든다는 그랜드 아울렛을 의식한 거냐?”

“아니에요.”

“그럼 뭐지?”

맞은편에 앉은 재성과 잠시 시선을 맞춘 재경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점점 다양해지는 소비자들의 구매 패턴에 발맞추고 사업 영역을 다각화시키기 위한 거예요.”

“사업 다각화라. 듣기에는 그럴듯하구나.”

심드렁한 반응에 재성이 슬그머니 끼어들며 말을 덧붙였다.

“면세점과 백화점에 이어서 대형 아울렛까지 갖춘다면 완벽한 수직 계열화를 이룰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세 곳이 유기적으로 돌아가면서 판매와 재고관리는 물론이고 고객 정보까지 공유할 수 있으니 아주 큰 시너지 효과를 볼 수 있겠죠.”

“재성이 말이 맞아요.”

그러자 박경수 회장이 안 그래도 궁금했다는 듯 재성을 보며 말했다.

“백화점에서 진행하는 사업인데 재성이 넌 왜 함께 온 거지?”

“이번 사업은 저희가 함께 추진해 나갈 겁니다.”

“둘이 함께 한다고?”

“네.”

“그래요.”

재경과 재성이 동시에 입을 모아 대답했다.

박경수 회장은 별 신기한 걸 다 보겠다는 것처럼 눈을 깜박거렸다.

둘이 크게 사이가 나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친하지도 않았는데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을까 싶었다.

“아울렛에 극장을 입점시킬 거라고 했지. 그거 때문에 재성이도 같이 끼어든 게야?”

“단순히 극장 말고도 테마파크를 포함한 오락시설 부분은 제 전담이 될 겁니다.”

“흠.”

박경수 회장은 앞에 놔둔 사업 계획서를 집어 들어서 꼼꼼하게 읽어 내려갔다.

애써 준비한 프로젝트지만 박경수 회장이 반대한다면 그걸로 끝이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박경수 회장의 손이 한 장씩 계획서를 넘기는 걸 긴장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약 30장 분량의 사업 계획서를 다 읽은 박경수 회장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에게 말했다.

“꽤 잘 만들었군.”

사업에 있어서는 자식이라고 봐주는 법이 없는 박경수 회장이다.

칭찬에 가까운 말이 나오자 재경의 얼굴에 안도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말에 두 사람은 긴장의 끈을 풀지 않고 재차 등줄기를 바로 세웠다.

“예상하는 사업비가 3천 5백억이라고?”

재경이 바로 대답했다.

“네. 넉넉하게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사업부지 땅값만 해도 만만치가 않을 테니 그 정도는 필요하겠지.”

서울만큼은 아니었으나 하남 역시 개발이 진행되면서 땅값이 상당히 비쌌다.

“다행히 하남시에서 사업을 한다면 공유지로 남아 있는 토지를 시세보다 싸게 넘겨주기로 이야기가 됐어요.”

“주민 편의 시설이 들어오는 데다가 세금도 거둘 수 있으니 하남시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없지.”

박경수 회장은 그런데, 하면서 재경을 향해 슬쩍 눈썹을 들어보였다.

“사성 백화점도 금융위기로 인해 파주에 지으려던 대형 아울렛 공사를 잠정 중단한 걸 모르진 않겠지.”

“물론이에요.”

“그런데도 사업을 진행하겠다는 거냐?”

재경은 자신이 대답하는 대신 재성을 향해 눈길을 주었다.

여기선 재성이 나서서 아버지를 설득하기로 미리 짜놓았던 부분이었다.

“사성하고 달리 오히려 지금이 아울렛 사업을 시작하기에 적기라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그렇지?”

“우선 부동산 경기 하락으로 사업부지를 보다 저렴하게 매입할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대신 금융비용이 늘어나고 리스크 역시 아주 커지겠지.”

박경수 회장의 날카로운 지적에도 재성은 당황한 기색 없이 차분하게 말을 받았다.

“금융위기의 충격이 크지만 침체의 골이 그리 깊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 첫 삽을 뜬다고 해도 완공까지 최소 2년은 걸립니다. 대형 아울렛이 만들어져 개장할 쯤에는 다시 경기가 어느 정도 살아나 있을 거라 봅니다.”

“요즘 금융권 대출이 꽁꽁 다 얼어붙었는데 4천억에 가까운 사업비는 어떻게 조달할 생각이냐?”

“씨네박스가 2천억을 대고 나머지는 백화점에서 부담하기로 했습니다.”

“현금 장사를 하는 백화점은 그렇다 치고 씨네박스에 그만한 돈이 있나? 내가 듣기로 상영관도 대폭 늘리는 중이라면서.”

“대형 아울렛에 들어가는 돈은 추가로 자본금을 증자해서 조달할 계획입니다.”

“증자라면 그 게임회사에서 자금을 끌어오려고?”

“그렇습니다.”

“음······.”

네오픽스가 중국에서 올리는 매출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박경수 회장은 더 이상 자금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형 아울렛 사업을 진행하게 되면 최근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설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흐음. 그건 그렇지.”

대화를 나누면서 박경수 회장은 이번 사업의 주도권이 재성에게 있다는 걸 눈치챘다.

아울렛 전체를 경영하는 건 재경이 하겠지만 굳이 이런 시기에 공사를 시작하겠다는 거나 사업비를 절반 이상 씨네박스에서 부담하는 걸 보면 누구 머리에서 아이디어가 나온 건지 뻔했다.

‘제 누나는 또 언제 꼬신 건지, 원.’

재경이 살살 구슬린다고 혹할 성격이 아닌데도 용케 손을 잡았다 싶었다.

박경수 회장은 내심 혀를 내두르면서 다른 한편으론 사업가다운 냉철한 눈으로 사업 계획서를 다시 한번 훑어봤다.

확실히 재경의 솜씨가 들어간 듯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계획서였다.

자료 준비도 충실하고, 첨부된 데이터나 도표 역시 보기 좋게 잘 배치되어 있다.

무엇보다 재성이 하는 일이었으니 이번에는 또 어떤 식으로 자신을 놀랠지 은근히 기대되기도 했다.

혼자 있어도 어느 쪽으로 튈지 모르는 놈인데 똑 부러지는 성격인 제 누나랑 같이 사업을 벌인 결과는 또 어떨지.

박경수 회장은 턱을 매만지며 한참을 고심하다 이내 결정을 내렸다.

“좋겠지. 어디 한번 해보거라.”

그러자 재경과 재성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꼭 만족하실 거예요.”

박경수 회장은 두 사람의 인사를 받으며 엄한 얼굴로 엄포를 놓았다.

“대신 실패하면 그 책임도 져야 할 거다.”

그는 쓴 것을 입에 삼킨 듯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마침 좋은 본보기가 일전에 있었으니 너희들은 제발 다르길 바라마.”

누굴 지칭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재경은 둘째 오빠가 아버지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음을 새삼 느꼈다.

아마 박경수 회장의 화가 풀려 다시 본사로 돌아오게 되더라도 분명 예전 같진 않을 것이다.

“실패할 일은 없을 겁니다.”

“뭘 믿고 그리 자신하는지 원.”

박경수 회장은 재성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싫지 않았다.

“볼일이 끝났으면 그만 나가보거라.”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재성은 문득 테이블 위에 흩어져 있는 서류에 눈을 던졌다가 멈칫했다.

모두 건설에 관련된 것이었다.

아래를 향하고 있는 그래프나 마이너스가 찍힌 숫자들이 건설 업계의 안 좋은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듯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제대로 직격탄을 맞은 모양새였다.

지금까지는 작은 형 때문에 그냥 모르는 척했지만 어쩐지 지친 얼굴로 앉아 있는 아버지를 보니 쉽게 발이 안 떨어졌다.

“왜 그러냐?”

두 사람을 내보내고 잠시 쉴 생각이던 박경수 회장은 왠지 머뭇거리고 있는 재성을 보고 물었다.

“집에 안 갈 거야? 아 참, 넌 아직 여기 살지.”

막 서재 문을 열어젖힌 재경 역시 그를 보고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망설이던 재성은 다시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며 앉았다.

“뭐. 더 할 이야기라도 있는 거냐?”

박경수 회장의 물음에 그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입을 뗐다.

“건설 때문에 요즘도 많이 힘드시죠?”

요 몇 달간 박경수 회장의 가장 큰 근심거리였기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아니라고 말은 못하겠구나.”

“주제넘지만 제일 건설에 관해 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뭔지 말해봐라.”

“조만간 더 큰 충격이 건설을 강타할 겁니다. 위기가 그룹 전체로 번지는 걸 막으려면 서둘러 여기에 대비를 해야 됩니다.”

“······!”

< 직접 일을 맡아서 해결하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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