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벌써 만남이 기대되는걸.
유니콘 그룹 본사 앞 현관에 검은색 벤츠 고급 세단이 미끄러지듯 들어와서 멈추어 섰다.
비서실로 자리를 옮기면서 대리로 승진한 선정혁이 조수석에서 얼른 내려 뒷좌석 차문을 열어주었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롱코트에 회색 머플러로 목을 감싼 재성은 수행원들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에 들어서자 단정한 유니폼을 입고 안내데 스크에 서 있던 여직원 둘이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받아준 재성은 바닥에 대리석이 깔린 로비를 가로지르며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경비원이 미리 잡아놓은 전용 엘리베이터는 얌전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층수를 알리는 빨간 표시가 위를 향해 빠르게 솟구쳤다.
"우리 회장님 너무 멋지지 않아."
"그러게 완전 왕자님이지!"
안내데스크에 있던 여직원들이 목소리를 낮춰속삭였다.
재성이 올 때까지는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위층으로 사라지자 그제야 잡담을 할 여유가 생겼다.
"나이도 젊고, 재벌에 성격까지 좋잖아. 완전히 퍼펙트 맨이지."
"지난번에 날 보고 웃어주실 때는 정말 반할 뻔했다니까."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야, 완전 계탔네!"
꺄아, 하면서 두 사람은 여고생처럼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우리 회장님은 결혼 안 하시나? 저 정도면 여자들이 완전 줄을 설 텐데."
"끼리끼리 논다고 재벌가 여자랑 하시겠지."
"어휴, 부럽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나도 회장님이랑 데이트 해봤으면."
머릿속에 고급 레스토랑, 멋진 야경, 그리고 다이아몬드 반지 같은 이미지들이 주르륵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모르지. 오늘처럼 매일 눈도장 찍다가 신데렐라가 될 수도 있잖아."
"과연 그럴까. 우리 같은 여자들은 회장님 눈에 그냥 배경으로 지나가는 나무 1 정도밖에 안 될걸."
그렇게 여자들이 한참 동안 꿈에 젖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재성은 그런 줄도 모르고 회장실에 앉아 귀를 후볐다.
"아, 간지러."
누가 내 이야기를 하나,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럽지.
편한 자세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던 재성은 노크 소리에 몸을 바로 세웠다.
"실례합니다."
책상 앞으로 가까이 다가온 권혁재 실장이 서류철을 내밀며 말했다.
"산업은행에서 보내온 매물 부동산 자산 가치 평가 보고서입니다."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기에 재성은 바로 보고서를 받아서 펼쳐봤다.
부채를 줄이는 것이 급하긴 한지 한꺼번에 30개나 되는 부동산 매물을 방갑성 은행장이 보내왔다.
목록에는 로얄프라임이나 오로라 CC처럼 세계 건설 소유의 자산뿐만 아니라 산업은행이 워크아웃 중인 다른 기업들의 부동산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매물이 꽤 많네요."
"아무래도 최근 워크아웃을 신청한 기업들 대부분이 건설사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정부에서 부실 건설사들을 구조조정할 거라고 발표했죠?"
"예. 시공 능력 300위 안에 드는 건설사들을 전부 평가해서 C등급은 워크아웃을 하고 최하위인 D등급은 전부 퇴출시킬 거라고 합니다."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어 다들 부채가 눈덩이처럼 늘어나 있는데 과연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단순히 회사 하나를 문 닫게 하고 인원 몇 명을 줄이는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퇴출당하는 회사 직원과 가족들은 생계가 달린 문제였기에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걸 보면 오삼구 회장은 참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권혁재 실장이 대답했다.
"워크아웃을 받게 되기는 했지만 무리하게 욕심을 부려서 회사를 완전히 망쳐놓고도 그룹이 공중분해 되는 건 피했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그렇네요."
"거기다가 나중에 채권단이 회사 지분을 매각하면 오삼구 회장이 우선 매입할 수 있는 권리까지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쉽지는 않겠으나 이러면 나중에 그룹을 다시 되돌려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재성은 입안이 썼다.
알고 말한 건 아닐 테지만 실제로 몇 년 뒤에 오삼구 회장이 워크아웃을 졸업한 금마 그룹 경영권을 다시 되찾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어렵게 되살려낸 금마그룹을 다시 한번 망가뜨리게 된다.
그때는 그룹이 완전히 공중분해 되어 뿔뿔이 흩어진다.
'훗날 불행의 씨앗이 지금 심어진 거지.'
표정이 무거워지자 권혁재 실장이 슬쩍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제가 괜히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그러자 재성이 한쪽 팔을 가볍게 내저었다.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괜찮다고 넘긴 재성은 다시 보고서에 시선을 주며 화제를 바꿨다.
"목록 제일 위에 있는 세계 로얄프라임은 세계 건설 임직원 숙소네요?"
"네. 지하 3층, 지상 13층 규모로 458개의 룸이 있는 비즈니스 호텔형 원룸식 주거 시설입니다.
주로 지방에 거주하는 직원들이 본사 근무나 서울 출장을 왔을 때 묵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회사 기숙사치고는 규모가 상당히 크네요."
"영등포구청 역세권인 데다가 대지면적이 3317.20㎡, 약 1003평이나 되어 개발 가치가 높다는 평가입니다."
"사용 용도가 기숙사로 한정되어 있지만 이건 나중에 차차 해결하면 되는 거니까 크게 문제가 안 되겠네요."
"그렇습니다."
매각액이 4백억이었으나 나중에 서울 시내 땅값이 오르는 걸 생각하면 거저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목록에 있는 다른 부동산들도 매력적인 것들이 많았다.
천천히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본 재성은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면서 잠시 고심했다.
이내 결정을 내렸는지 만년필을 꺼내 세계 로얄프레임을 포함해 20개를 체크했다.
그러고는 보고서를 덮어 권혁재 실장한테 돌려주며 말했다.
"양 상무한테 체크한 부동산들을 가지고 산업은행과 협상을 하라고 해요."
"알겠습니다."
보고서를 건네받은 권혁재 실장이 막 나가려는데 재성이 문득 생각난 것처럼 그를 붙잡았다.
"아, 그리고 신혼여행지 말인데. 프랑스 어때요?"
그러자 권혁재 실장이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그를 만류했다.
"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됩니다. 제가 여태껏 받은 것도 너무 많은데 신혼여행까지 회장님이 해주시면 너무 죄송해서."
확실히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는 상사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었다.
이런 일이 난생처음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권혁재 실장을 보면서 재성은 혀를 찼다.
"거 했던 얘기 또 하게 할 겁니까?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런다잖아요."
사람이 성실하고 착한 건 좋은데 이럴 때 보면 또 너무 물러서 탈이었다.
평상시에는 여기저기 넉살 좋게 막 나대더니 이젠 직급이 올라서 그런가, 조심스러워진 태도에 나름 서운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하나 씨는 예전에 함께 일하면서 여러가지로 도움을 많이 받은 터라 이번에 갚아주려고 하는 겁니다. 따지자면 나보다는 하나 씨한테 고맙다고 해야죠."
더 이상 구구절절 말하게 하면 화낼 것 같은 기세에 권혁재 실장도 사양하지 못했다.
"그럼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쵸. 진작 그러면 얼마나 좋아."
재성은 돈 쓰는 게 이렇게 힘들 일이냐며 대놓고 투덜거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하나 씨한테 괜찮은지 물어봐요."
"당연히 좋아할 겁니다."
"권 실장이 아니라 하나 씨한테 주는 선물이라니까요?"
꼭 물어보라는 재성의 말에 권혁재 실장은 예, 하고 대답하며 방을 나갔다.
아무것도 모르고 멀어지는 뒤통수에 재성은 자리에 앉아 싱긋 미소 지었다.
그냥 프랑스에 보내주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선물을 준비해 놨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하던 재성은 책상 위에 놔둔 핸드폰이 울리는 것을 보고 상념에서 깨어났다.
액정 위에 떠올라 있는 이름은 데이비드였다.
재성은 곧장 통화 버튼을 누르며 의자를 뒤로 돌려 바깥 창문으로 시선을 향했다.
"무슨 일이에요?"
[몇 가지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말해봐요."
재성은 몸을 뒤로 기대며 이야기를 들었다.
[우선 이제 때가 된 것 같아서 빅 3에 넣어뒀던 투자금을 빼려고 합니다.]
"리콜 사태도 이제 수습 분위기니까 좋은 판단 이에요."
[아직 완전히 확정된 건 아니지만 포지션을 다 정리하면 수익이 대략 37억 달러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액수를 듣자 입꼬리가 절로 위로 말려 올라갔다.
한화로 4조 원이 훌쩍 넘어가는 거액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저가에 주식을 매입한 것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옵션거래까지 공격적으로 벌인 덕분에 이런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역시 실력이 어디 안 갔네요."
[다 보스께서 믿어주신 덕분이죠. 다음 주쯤이면 정산이 끝날 것 같은데 수익금은 어떻게 처리 할까요?]
잠깐 생각한 재성이 곧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돈 쓸 일이 있었는데 마침 잘됐어요. 26억 달러는 유니콘 홀딩스 계좌로 보내고 10억 달러는 골드원에서 운용하도록 해요."
[그럼 1억 달러가 남는데 그건 어떻게 할까요?]
"이번 베팅을 훌륭하게 끝냈으니까 직원들한테 보너스로 나눠주도록 해요."
그러자 데이비드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크리스마스 보너스를 받은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거액의 성과금이 지급되는 걸 알면 직원들이 다들 크게 기뻐하겠군요.]
"데이비드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저야 항상 보스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지요. 안 그래도 눈여겨봐 둔 요트가 있는데 이번에 살 수 있게 되겠군요.]
"기왕 사는 거 괜찮은 걸로 고르지 그래요. 요트를 사고도 넉넉할 만큼 넣어줄 테니까."
[그럴까요? 그러면 보스만 믿고 큰 놈으로 지르도록 하겠습니다.]
데이비드는 기분 좋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다시 말을 이었다.
[그룹폰이 올해 7월 나스닥 상장을 목표로 기업공개(IPO)를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소식에 재성은 눈에서 이채를 띠었다.
"샌토럼이 우리 요구를 받아들인 모양이네요."
[예. 4분기에 하자고 계속 고집을 부렸었는데 어렵게 설득시켰습니다. 대신 IPO 때 저희 쪽 지분을 조금 더 내놓기로 했습니다.]
지분이 줄어들겠지만 어차피 상장 이후 천천히 그룹폰에서 손을 뗄 생각이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최대한 현금화를 할 생각이었으니까 그건 상관없어요."
[주관사와 협의가 끝나봐야 알겠지만 대략 주당 18~20달러에 7천만 주, 10% 정도를 나스닥에 내놓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14억 달러가량이 들어오겠네요."
[공모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중에 9억달러 정도가 저희 몫입니다.]
원래는 더 많은 주식을 시장에 내놓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랬다가 주가가 공모 가격 이하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기에 전체 주식의 10%로 낮췄다.
"그렇게 되면 공모로만 지금까지 넣은 투자금을 전부 회수할 수 있겠네요."
[그러고도 남아 있는 지분 가치가 최소 50억 달러가 넘으니 기대대로 공모가 성공한다면 엄청난 대박이 터지는 겁니다.]
예상하고 투자한 것이었으나 실제로 돈이 손에 들어오게 되자 그 역시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도요타 리콜 사태도 그렇고 그룹폰까지. 보스의 안목에 매번 감탄합니다.]
"행운이 따라준 덕분이죠. 상장되기 전까지 안심할 수 없으니까 데이비드가 계속 지켜보며 신경을 쓰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IT 기업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지속적인 적자로 인해 거품이라는 지적도 받고 있었기에 마지막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애플 CEO인 스티브 렌이 보스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해 왔습니다.]
뜻밖의 말에 재성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스티브 렌이 날 만나고 싶어 한다고요?"
[그렇습니다. 다음 달에 일본으로 휴가를 가는데 그때 보스를 봤으면 한다고 하더군요.]
"용건이 뭐라고 해요?"
스티브 렌 정도 되는 거물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을 찾아올 리가 없었다.
[대주주를 만나 회사 운영 방향을 직접 설명하기 위해서라는데…… 사교성이 없고 독선적인 스티브 렌의 성격으로 볼 때 그건 핑계일 겁니다. 아마도 진짜 목적은 저희가 애플 주식을 꾸준히 매입하는 의도가 뭔지 알아보려는 것 같습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에 그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현재까지 확보한 애플 지분이 얼마나 되죠?"
[얼마 전에 다시 추가 매수를 해서 이제 13%남짓 됩니다.]
"그 정도라면 렌이 예민해질 만도 하네요."
이미 한 번 다른 주주들에 의해 자신이 창업한 애플에서 쫓겨난 아픈 기억이 있는 스티브 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야금야금 지분을 늘려가는 골드원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을 터였다.
[별로 안 내키시면 제가 적당히 거절하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IT 업계의 거물인 스티브 렌과 친분을 만들어두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재성이 말했다.
"아니에요. 방문 날짜를 알려주면 시간을 비워 두겠다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얼마 동안 더 이야기를 나눈 뒤 통화를 끝낸 재성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스티브 렌이라…… 벌써 만남이 기대되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