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수저 생활백서-248화 (248/703)

248. 그림을 몇 점 샀으니까 그건 빼도록 해.

ADM에 이어 카길과 프랑스의 루이드레퓌스(LDC)가 연달아 매수에서 매도로 전환하면서 곡물 메이저들의 담합은 완전히 깨져 버렸다.

거기다가 슈스터 가문의 이카루스 펀드까지 손을 들어버리자 곡물 시세는 한순간에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시카고 거래소에서 터진 폭락은 아시아를 거쳐 런던 선물 거래소로 번졌다.

이미 시카고와 아시아를 거쳐오면서 큰 폭의 하락을 기록했기에 다들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매도 주문이 폭증하면서 거의 수직으로 떨어지는 곡물 시세에 트레이더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밀 180달러에 300계약!"

"300 계약에 179달러 50센트!"

"179달러! 젠장. 아무도 받아주는 사람 없어!"

그때 모니터를 보던 트레이더 한 명이 아연실색하며 소리쳤다.

"아아악!"

"왜 그래?"

"뭐야?"

"대량 매도가 터졌어!"

담합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곡물 가격 상승을 예상하고 현물과 선물을 대거 사들였던 투기 세력들이 더 버티지 못하고 물량을 대거 풀어버린 것이었다.

긴 음봉을 그리면서 아래로 쭉쭉 떨어지는 곡물 시세에 여기저기에서 트레이더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젠장! 어서 팔아."

"지금 빠져 나와야 돼!"

"미치겠네. 매수 주문이 완전히 사라졌어!"

공포가 휩싸인 트레이더들은 너도나도 가지고 있던 물량을 마구 집어 던졌다.

일부 반등을 노리고 매수에 나서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해일처럼 거세게 몰아치는 매물 폭탄에 금방 흔적도 없이 휩쓸려 내려가고 말았다.

약간의 저항마저 허무하게 끝나 버리자 공포와 패닉은 더욱 크게 번졌다.

깊은 음봉을 그리면서 속절없이 추락하는 곡물시세를 트레이더들은 절망 가득한 얼굴로 바라봤다.

"이건 악몽이야……."

런던을 쑥대밭으로 만든 폭락세는 다시 대서양을 건너 시카고 거래소를 강타했다.

***

사흘간 이어진 폭락은 미국 상원에서 카길 경영진들을 의회로 소환해 곡물 파동에 대한 청문회를 개최하겠다고 밝히면서 정점을 찍었다.

[갑작스러운 곡물 가격 폭락의 원인은 곡물 메이저들의 대규모 물량 청산!]

[곡물 파동의 배후에 정말로 곡물 메이저들이 있었다!]

[담합의 덫에 걸린 곡물 메이저들!]

[가격 조작 처벌을 피하기 위한 대량 매도가 곡물 가격 폭락 유발!]

[상원 농무소위원회, 다음 주 안으로 카길 경영진 소환 예정!]

"회장님. 데이비드 씨가 오셨습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재성이 보고 있던 신문을 접어서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일어났다.

"어서 와요."

반갑게 맞이하는 재성을 향해 데이비드도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데이비드는 손짓을 따라 자리에 앉다가 신문을 힐끔 쳐다보았다.

"마침 기사를 보고 계셨군요."

"새로운 뉴스라도?"

흐음, 하면서 턱을 쓰다듬은 데이비드가 말했다.

"법무성 독점금지국뿐만 아니라 연방거래위원회도 최근 카길이 진행한 인수합병에 대해 시장에 끼치는 악영향이 없는지 조사한다고 합니다."

"어쩐지 마치 쫓기기라도 하듯 예상한 것보다 빨리 물량을 다 털어버리기에 의아했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네요."

"그것 때문에 하락하던 ADM 주가가 오늘 하루만 10% 넘게 뛰었습니다."

"카길이 흔들리니까 ADM이 반사이익을 보는 거네요."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데이비드가 말했다.

"독과점 조사를 빗겨간 데다가 카길이 이대로 제재를 받게 된다면 만년 2등이던 ADM이 1등으로 치고 올라갈 수 있을 테니까요."

"나타샤 회장이 손해를 감수하고 우리와 손을 잡은 목적이 바로 그거죠."

나타샤 회장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건 카길이 소유한 북미 지역의 곡물 수출 엘리베이터들이었다.

곡물을 건조 및 저장하고 분류와 유통하는 시설을 곡물 엘리베이터라고 불렀다.

바로 이 곡물 엘리베이터를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시장에 끼치는 영향력이 결정됐다.

이런 곡물 엘리베이터 몇 곳을 가져오거나 매각하도록 만든다면 그동안 곡물 시장에서 독주하던 카길의 기세를 꺾어놓을 수 있었다.

"어쩌면 이번 일로 인해 가장 크게 이득을 얻은 건 나타샤 회장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데이비드가 화제를 살짝 바꾸며 말했다.

"참. 그리고 이카루스 펀드에 걸어둔 인버스 계약 말입니다. 오늘 장 중에 잠시지만 밀 가격이 톤당 100달러 아래를 찍고 올라왔습니다."

"나도 확인했어요."

장 초반 쏟아진 매물에 톤당 99달러 20센트까지 떨어졌다가 금방 다시 122달러로 회복됐다.

"아직 만기가 남아 있지만 옵션으로 걸어둔 조건을 충족시켰으니 바로 계약 정산을 하려고 합니다."

인버스 계약을 하면서 톤당 밀 가격이 100달러 아래로 내려가면 기한에 상관없이 그 즉시 계약이 확정되는 옵션을 넣어뒀었다.

재성이 몸을 뒤로 기댄 채 웃었다.

"지금쯤 옵션 조항을 넣은 걸 땅을 치고 후회하겠네요."

"설마 곡물 가격이 이렇게 폭락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랬겠죠."

그게 아니라면 이카루스 펀드가 옵션 삽입에 동의했을 리가 없었다.

"확정된 수익이 얼마나 되죠?"

"대략 62억 달러가 조금 넘습니다."

액수를 들은 재성의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부수입이 상당히 짭짤하네요."

그러자 데이비드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걸 과연 부수입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웬만한 기업의 영업이익에 필적하는 이득을 취하고서도 무슨 용돈벌이를 한 것마냥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재성밖에 없을 터였다.

"자, 그럼 시장의 패닉도 어느 정도 진정되는 분위기고, 슬슬 다시 포지션을 매수로 바꿔야 할 때 같군요."

"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한꺼번에 물량을 쓸어 담으면 가격이 폭등할 테니까 적당히 잘 조절해서 하세요."

"그럼요."

데이비드가 자신 있다는 것처럼 가슴을 주먹으로 살짝 두드렸다.

"제 전문 분야 아닙니까. 맡겨두십시오."

재성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지금쯤 헤이든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인버스에서 마이너스가 난 액수를 보고 입에 거품이라도 물지 않으려나.

재성은 직접 그 광경을 구경하지 못하는 걸 아쉽게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

곡물 가격은 닷새간에 걸쳐 반토막 이상이 나버리는 엄청난 폭락을 기록했다.

그러다 재성 쪽에서 매물을 흡수하고 중국이 다시 곡물 수입을 재개하자 패닉이 진정되면서 빠르게 가격이 회복되어 갔다.

굳은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넘겨보고 있는 헤이든의 분위기를 살피며 매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손해를 최대한 줄이려고 했지만 골드원과 체결한 인버스 옵션 조건이 충족되면서 손실이 커졌습니다."

"이딴 옵션을 왜 집어넣은 거야!"

짜증 가득한 목소리에 매클이 머리를 조아렸다.

"면목이 없습니다."

사실 인버스 계약의 옵션 내용은 전부 헤이든에게 허락받고 체결한 것이기에 매클이 잘못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저기……."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자 헤이든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짜증 나게 만들지 말고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해!"

"골드원에서 수익 지급을 요청해 왔는데 어떻게 해야 될지……."

"제길!"

헤이든의 입에서 바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손실이 너무 컸기에 이카루스 펀드 자금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했다.

"부족한 자금이 얼마나 되지?"

"48억 달러입니다."

"끄으응."

와락 일그러진 얼굴로 헤이든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아마 보는 사람만 없었다면 머리를 쥐어뜯고도 남았을 터였다.

그때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리더니 여비서가 쭈뼛거리며 고개를 내밀었다.

"뭐야?"

가시처럼 날카롭게 내뱉는 말에 여비서가 몸을 움찔거렸다.

행여나 자신한테 불똥이 튈까 봐 한껏 어깨를 움츠린 모습이 불쌍하기까지 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누구?"

"유니콘 그룹 박재성 회장님이신데……."

그러자 단박에 헤이든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앞에 서 있던 매클 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그놈이 여긴 왜?"

"용건은 일단 이사님을 만난 뒤에 직접 말씀드리겠다고 하십니다만."

"제기랄."

불시에 기습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헤이든은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생각하다 이마를 짚은 채 어둡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들여보내."

"알겠습니다."

여비서가 허리를 꾸벅 숙이고 서둘러 방을 나갔다.

이윽고 얼마 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뒤에는 항상 그림자처럼 달고 다니는 권혁재실장이 함께였다.

헤이든이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는데도 재성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이사실을 스윽 둘러보았다.

제 집이라도 되는 양 어슬렁거리면서 들어오는 모양새에 헤이든은 보기만 해도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런 와중, 매클은 미처 자리를 피할 타이밍을 찾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꽤 잘 꾸며놨네."

나름대로 칭찬이라고 던진 말에 헤이든은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여긴 왜 왔지?"

재성은 대답 대신 이사실에 있는 큼직한 소파 털썩 다리를 꼬고 앉았다.

"반갑지 않은 손님인 건 알겠는데 그래도 대접이 너무 박한 거 아니야?"

하, 하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표정을 찌푸린 헤이든은 이를 갈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맞은편 재성을 보고 앉았다.

"미안하지만 티타임이나 하고 있을 정도로 한가하지 못해서 말이야. 지금 기분이 별로니까 용건만 빨리 끝내고 가지."

"정 그렇다면."

재성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나도 오래 있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그렇게 해주지."

완전히 기분이 바닥을 친 헤이든과 달리 재성은 아주 즐거운 마음이었다.

항상 머리 꼭대기 위에서 노는 것처럼 남을 깔보던 헤이든이 저렇게 여유 없는 표정을 짓다니.

이거야말로 어디서도 못 볼 귀한 광경 아닌가.

재성은 속으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인버스 수익금 지급 요청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을 거야."

"그런데?"

헤이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액수가 꽤 큰데 지급하는 데 이상이 없나 해서. 확인차 들렀지."

그 말을 듣는 순간 헤이든은 머릿속에서 이성의 끝이 뚝 떨어지는 걸 느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고작 아시아 한구석에 체박힌 작은 나라에서 온 동양인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머리부터 구정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격한 모욕감이 들었다.

"지금 운 좋게 한 번 이겼다고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드는 모양인데."

헤이든은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세게 쥐었다.

안 그러면 지금 당장이라도 저 면상에 주먹을 날리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할 것 같았다.

"이 정도는 그냥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에 불과해. 건방 떨지 말라고."

이를 악무는 헤이든의 모습을 보면서 재성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아무래도 제법 성질을 건드려 버린 모양이었다.

"돈은 1센트도 빠트리지 않고 다 줄 테니까. 안심하도록 해."

재성은 무섭게 노려보는 헤이든의 눈빛을 흘리 듯 받아넘겼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겨우겨우 성질을 눌러 참고 있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여기서 한 번만 더 툭 치면 폭발하려나?'

재성은 심술궂게 웃으며 헤이든에게 마지막 한방을 날렸다.

"이번 일로 내 상대가 못 된다는 걸 깨달았을 줄 알았는데…… 보아하니 교훈이 부족했던 모양이야."

헤이든은 입술을 짓씹으며 순간적으로 확 치솟은 머리의 열을 겨우 참아내었다.

말 그대로 인내심이 거의 바닥나기 직전이었다.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재성은 걸음을 옮기다가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몸을 돌렸다.

"아! 그리고 너무 손해가 큰 것 같아서 말이야. 갤러리에 걸린 그림 몇 점을 구입했으니까 그건 지급할 돈에서 빼도록 해."

얄밉게 윙크하며 권혁재 실장과 함께 재성이 이사실을 떠났다.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헤이든의 입에서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개자식!! 날 이딴 식으로 우롱해?"

헤이든은 모아왔던 분노를 단번에 터트리며 주먹을 세게 내려쳤다.

테이블 위의 유리 꽃병이 넘어지면서 물이 흘러넘쳤지만 헤이든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얼마나 주먹을 꽉 쥐었는지 손바닥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이사님, 피가……."

"닥쳐!"

헤이든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눈을 부라렸다.

그러고는 꽉 악문 잇새로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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