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 정말 가슴이 웅장해지는 액수네요.
2011년 새로운 한 해가 밝았다.
씨네박스 기획팀 직원들은 새해에 대한 설렘도 잠시, 각자 업무를 보며 바쁘게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옥상으로 올라온 박세인은 흡연자들을 위해 놔둔 은색 재떨이 옆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역시 담배는 밥 먹고 피우는 것이 제일 맛있단 말이야."
투명 아크릴로 양옆에 벽을 세우고 지붕도 만들어져 있었으나 매섭게 불어오는 겨울바람을 다 막아주지는 못했다.
"으흐, 춥다."
몸속으로 파고드는 추위에 코트 깃을 여미면서도 담배 한 대의 유혹을 이길 수는 없었다.
"역시 올라와 있었네."
고개를 들자 입사 동기인 고준식이 있었다.
"너도 피우러 왔냐?"
"그게 아니면 이 추운데 여길 왜 올라왔겠어."
"그건 그렇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낸 고준식은 이내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없잖아."
빈 담뱃갑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옆에 있던 박세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나 한 대만 주라."
"니꺼 펴."
"빈 갑이라 버리는 거 봤잖아."
얼른, 하면서 고준식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맡겼던 자기 것을 내놓으라고 하는 듯 뻔뻔한 모습에 박세인은 피식 웃으며 한 개비를 꺼내 건넸다.
"담배 한 개비는 찐 우정인 거 알지?"
"아 그럼."
얼른 담배를 입에 문 고준식이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길게 한 모금 빨았다가 흰 연기를 토해내자 그제야 기분이 좀 나아졌다.
"크으. 이 맛이지."
"그나저나 웬일이야? 다른 건 몰라도 담배는 절대 안 떨어지게 하던 골초가."
"아이고, 그것도 옛말이다."
고준식은 양팔을 쭉 펴면서 말했다.
"한 달에 받는 용돈이 고작 30만 원이다. 나 참, 대학생 때도 그것보단 더 썼는데."
"유부남이니까 어쩔 수 없지. 여기저기 돈 나갈 데가 많으니 미리 저축해 놔야 하잖아."
그러자 고준식이 샐쭉한 표정으로 박세인을 힐끔 노려보았다.
"누가 그걸 몰라? 아무튼 나 같은 직장인이 30만 원으로 생활하려면 담배도 개수를 헤아려 가면서 피워야 한다 이 말이야."
"결혼하면 다 그렇지. 나도 와이프한테 용돈 타 쓰는 처지야."
"그래?"
"나는 너처럼 골초까진 아니니까 그럭저럭 버틸 만하긴 해. 그래도 뭐, 부족하긴 마찬가지지만."
고준식은 답답하다는 얼굴로 후, 연기를 내뱉었다.
"돈 버는 사람은 난데 정작 제일 가난하다는 게 말이 되냐. 선배들 말 들어보니까 예전에는 따로 수당통장이라는 걸 만들어서 비상금을 꿍치기도 했다던데. 요즘은 그런 것도 안 되니까 꼼짝없이 용돈이나 받는 신세고…… 어휴, 어쩌다 이렇게 됐냐."
"그러게. 나도 결혼하고부터는 점심 때 일부러 제일 싼 메뉴로 사먹잖아."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동질감을 느꼈다.
같은 유부남끼리만 알 수 있는 감정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있어. 와이프 말처럼 앞으로 애도 낳고 집도 사려면 아껴 살아야지."
고준식도 그건 충분히 아는 바였다.
집에서 매일 듣는 소리라 머리로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어쩐지 가슴이 허했다.
"참. 이번 주에 성과급 나온다며?"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일부러 박세인이 밝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어. 나도 그렇게 들었어."
"우리는 250%나 된다더라."
한껏 기대 중인 박세인과 달리 고준식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그래봤자 뭐 하냐. 우린 돈 구경도 한번 못 해보고 다 통장에 꽂히 는데."
"아 또 어두운 소리한다."
"미안미안, 그래도 어차피 월급이든 보너스는 우리한테는 통장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잖아? 너도 너무 기대하지 말고 그냥 성과급이 나오면 그런가 보다 해. 그게 정신 건강에 좋아."
"우울한 놈 같으니라고."
덕분에 기대감이 팍 꺾인 박세인은 쳇, 하고 혀를 차고서 말없이 담배만 피웠다.
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에 맞춰 사무실로 내려왔다.
책상 앞에 앉아 한창 업무를 보고 있자니 여직원이 옆으로 와서 봉투 두 개를 내밀었다.
"과장님. 성과급 명세서 나왔어요."
"어, 땡큐."
모니터에 머리를 박고 있던 박세인 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다 봉투가 두 개나 되는 걸보곤 눈이 동그래졌다.
"근데 왜 두 개야?"
"이번 성과급은 반은 통장으로 들어가고 반은 현금으로 준대요."
여직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다 급여 통장에 넣어주지. 번거롭게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요."
그러면서 여직원이 확인 서류를 들이밀었다.
"수령 사인 좀 부탁드려요."
"어어, 알았어."
박세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로 사인을 휘갈기곤 봉투를 슥 집었다.
손이 닿자마자 느껴지는 두툼한 감촉에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절반을 현금으로 줬다고?!'
일일이 확인 사인을 받아야 해서 귀찮아하는 여직원과 달리 박세인의 눈에는 생기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여직원이 등을 돌리고 떠난 뒤. 박세인은 얼른 등을 굽혀 주변을 슥살핀 뒤 살짝 봉투를 열어보았다.
오만 원권 지폐가 가득 들어가 있는 것을 보자마자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
"흡……!"
오, 지저스,
손바닥으로 입을 막아 겨우 눌러 참은 박세인은 고개를 쑥 내밀어 사무실을 살폈다.
사무실 곳곳에서 커헉, 읍, 억 하는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들 비슷한 상황인 듯했다.
'와 씨, 이게 무슨 일이야!'
그때 책상 위에 설치된 전화기가 울렸다.
수화기를 집어 들자 아까 옥상에서 봤던 고준식이 다짜고짜 물음부터 던졌다.
[성과금 받았지? 안에 돈 확인했어?]
"그래. 야…… 내가 진짜…… 말이 안 나온다."
그야말로 감격의 눈물이라도 흘릴 지경이었다.
[너 그거 와이프한데 바로 갖다줄 거야?]
"미쳤어?"
그러자 고준식이 킬킬 웃으면서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 야, 이거 절대 말하면 안 돼. 와이프들끼리 친한 거 알지?]
동기들끼리 가끔 부부동반 모임을 가졌었기에 와이프들도 안면이 있는 처지였다.
특히 고준식과 박세인은 꽤 친한 사이라 와이프들 역시 통화로 안부를 물어보곤 했다.
때문에 자칫 한쪽에서 현금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귀에 들어간다면 그날로 돈을 전부 다 압수당할 것이 뻔했다.
[오늘 현금으로 받은 거 절대 비밀이다. 무덤까지 가져가는 거야. 아님 우리 둘 다 끝장이야.]
"당연하지. 내 걱정 말고 너나 조심해."
박세인은 비장한 얼굴로 당부하곤 전화를 끊었다.
생각지도 못한 현금에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절로 콧노래가 나올 정도였다.
이날 하루 아내가 모르는 비상금을 합법적으로 챙기게 된 유니콘 그룹 유부남 직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
샤워를 하고 나온 재성은 불을 켜지 않은 거실에서 커다란 통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야경을 감상했다.
얼음을 넣은 위스키를 홀짝이며 화려한 한강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하루의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게 바로 돈의 맛이지."
그러니까 다들 돈이 생기면 경치 좋은 집부터 사려고 하는 거다.
재성은 모처럼 호사스러운 기분으로 느긋하게 야경을 감상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서 있으니 핸드폰으로 데이비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재성은 거실 불을 켜고는 소파로 가서 다리를 쭉 뻗고 앉으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마틴루터킹 데이라서 오늘은 쉬는 날 아니었어요?"
데이비드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뒤에 애플 CEO인 스티브렌이 병가를 냈다는 사실이 발표될 거라고 합니다.]
"……!"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정확한 날짜는 몰랐으나 이때쯤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렌이 병세가 악화되어 다시는 회사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반면 데이비드는 이번 일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단순히 애플 창업자를 넘어서 글로벌 IT 업계를 이끌어가는 혁신의 아이콘 같은 인물이니 그럴 수밖에.'
스티브 렌의 부재는 애플에 엄청난 악재였다.
동시에 애플 지분 13%를 보유한 대주주인 골드원 입장에서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었다.
[휴장인 오늘이 지나고 내일 시장이 열리면 애플 주식이 폭락할 게 불을 보듯 뻔합니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인 데다가 건강 악화설까지 돌고 있었으니 불안감이 더 크겠죠."
지난번에 미리 정보를 듣고 지분을 일부 정리하려다가 재성의 반대에 그러지 못했던 데이비드는 여전히 태연한 태도에 속이 타들어갔다.
[지금이라도 지분을 일부 축소해서 위험 관리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어요."
[상황을 조금 더 지켜봐야 되겠지만 이번에는 스티브 렌이 복귀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데이비드의 말대로 병세가 악화된 스티브 렌은 결국 CEO직을 사임, 올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다.
'하지만 내가 계획하는 걸 이루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놔둘 순 없지.'
퀘스트를 열심히 달성해 아이템을 모은 것도 이날을 위해서였다.
재성은 핸드폰을 고쳐 쥐고는 차분히 말했다.
"스티브 렌의 상징성이 큰 건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애플의 모든 건 아니에요."
[…….]
"시장 지배력이 공고하고 성장 잠재력 또한 충분한 만큼 잠시 흔들릴지는 몰라도 여기서 무너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브래드 COO가 스티브 렌의 공백을 메울 수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스티브 렌이 수차례 극찬했을 정도로 관리의 귀재이니 충분히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는 뛰어난 관리자일 뿐 스티브 렌처럼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가 카리스마와 예지력을 가지고 혁신적인 제품을 내놔 사람들을 놀라게 할 인물은 아니지 않습니까?]
"애플을 목숨처럼 생각하는 스티브렌이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아무런 조치도 취해놓지 않았을 것 같아요?"
[……!]
"아마 몇 달, 아니, 몇 년에 걸쳐서 선보이게 될 제품은 이미 개발에 들어갔고 그 이후 회사가 나아가야 될 장기 플랜을 다 짜뒀을 거예요."
[설마 그렇게까지…….]
"애플에서 쫓겨났을 때 상실감에 우울증까지 걸렸던 스티브 렌이에요. 아마 자신이 잘못되더라도 애플은 끝까지 세계를 선도하는 기업으로 남아 있기를 원할 겁니다."
[모든 플랜을 다 세워두고 그걸 성실히 이행할 관리자…… 아니, 후계자로 브래드를 내정했을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맞아요."
실제로 십 년 뒤에 전 세계를 뒤 흔들 애플카 역시 스티브 렌이 장기 플랜으로 계획해 둔 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주가가 떨어지면 추가로 매수할 기회니까. 지분을 더 확보하도록 해요."
지분을 일부 정리해서 리스크 관리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매입하라는 말에 데이비드는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내세운 근거가 어느 정도는 납득됐기에 반대하지 않고 지시를 따랐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달 안으로 스티브 렌과 만날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봐요."
[얼마 전부터 몇몇 측근을 제외하곤 외부인과 접촉을 완전히 끊은 상태라 어려울 겁니다.]
"꼭 만나야 되니까 어떻게든 방법을 만들어봐요. 필요하다면 대주주지위를 이용해도 좋아요."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기에 데이비드도 뭔가 중요한 일이라는 걸 직감했다.
[최대한 자리를 만들어보겠습니다.]
머리를 작게 끄덕인 재성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참. 니케이에 공매도를 때릴 자금은 준비가 다 끝났겠죠?"
[네.]
"전부 얼마나 돼요?"
[추가로 보내주신 자금까지 합치면 337억 달러가 조금 넘습니다.]
"후우. 엄청나네요."
한화로 40조가 조금 안 되는 금액.
그래도 정말 가슴이 웅장해지는 액수였다.
이걸 일본 증시에다가 융단폭격처럼 쏟아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337억 달러가 한꺼번에 쏟아진다면 일본 증시는 핵폭탄을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이게 될 겁니다.]
"후후후. 우리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거 아니겠어요."
재성은 핸드폰을 손에 든 채 낮게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