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수저 생활백서-272화 (272/703)

272.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할 수도 있다는 거야!

뉴욕 중심가인 센트럴 파크 주위에 위치한 고급 아파트들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주민 위원회의 승인이 없으면 입주하지 못하는 걸로 유명했다.

센트럴 파크에 인접한 어퍼 웨스트의 고급 아파트 다코타는 그중에서도 꽤 특별했다.

왜냐하면 팝 여가수인 마돈나가 입주하려다가 퇴짜를 맞기도 했고, 비틀즈 멤버였던 존 레논이 현관에서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죽기도 한 장 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화들은 아파트의 가치를 더욱 올려주는 역할을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대중들은 스토리에 열광하고, 유명인사가 얽혀 있으면 더욱 좋은 법이었다.

헤이든의 자택은 이런 역사가 겹겹이 쌓여 있는 아파트의 가장 높은 층에 위치했다.

어둠이 깊이 내려앉은 시간.

헤이든의 취향대로 우아하면서도 고급스럽게 꾸며진 침실엔 서너 명이 누워도 넉넉할 것 같은 큰 침대가 있었다.

조용한 실내엔 헤이든이 가볍게 내쉬는 숨소리만이 고르게 울려 퍼졌다.

잠깐 몸을 뒤척이는 일도 없이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새벽의 정적을 깨는 핸드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공기를 찢었다.

"제기랄."

헤이든은 시트에 얼굴을 파묻으며 베개로 귀를 덮었다.

하지만 금방 끊어질 줄 알았던 벨소리는 몇 분 동안이나 계속 이어졌다.

누군지 몰라도 매우 집요한 인간임에 틀림없었다.

"아니면 워싱턴에 폭탄이라도 떨어진 거겠지."

욕설을 내뱉으며 헤이든이 침대에서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이 새벽에 전화라니.

적어도 나라가 뒤집어질 정도의 큰 일이 아니라면 가만두지 않을 셈이었다.

헤이든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협탁위의 시계를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내며 시계가 새벽 5시를 표시하고 있었다.

헤이든은 아직도 계속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심복인 매클이었다.

이름을 확인한 헤이든은 어쩐지 불길한 느낌에 얼굴을 찌푸렸다.

매클이라면 시시껄렁한 일로 이 새벽에 전화를 걸 사람이 아니었다.

설마 진짜로 뭐가 터졌나?

"대통령이 또 암살당하기라도 한 건가."

헤이든은 일부러 농담처럼 중얼거리면서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자다 깬 참이라 잔뜩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손을 뻗어 컵에 물을 따르는데 매클이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큰일 났습니다!]

"그러니까 뭐냐고,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해봐."

다짜고짜 큰일이라고 하면 알게 뭔가.

[조금 전에 일본에서 규모 9.0이 넘는 대형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지진?"

헤이든은 9.0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숫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유지한 채 되물었다.

"9.0이라고? 지진이 빈번하게 나는 일본이라지만 이번에는 규모가 크군, 뉴스에서 온통 난리겠어."

[그렇습니다. 지금 도쿄를 비롯한 일본 열도 전역이 큰 피해를 입었답니다.]

헤이든은 얼굴을 구긴 채 혀를 찼다.

"주가에 악영향을 주겠군."

지금 한창 작전 중인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끼어든 셈이었다.

헤이든은 아직 잠이 덜 깨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것을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너무 많이 떨어지면 물량을 추가로 더 매수해, 주당 4만 엔 밑으론 내려가지 않게."

그 말을 듣고 매클은 아직 헤이든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걸 눈치챘다.

제정신이라면 지금 저렇게 태연히 있을 수가 없으니까.

[지금 일본 동북부 지역은 완전히 쑥대밭입니다.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데다가 10m가 넘는 쓰나미가 해안지대를 덮치는 바람에 피해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사상자 숫자는 2만 명을 훌쩍 넘겼고요. CNN과 BBC 등 거의 모든 방송국에서 계속 특보가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매클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헤이든은 4만 엔 밑으로 내려가지 않게 신경 쓰라고 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월요일에 장이 열리면 대폭락이 일어날 겁니다.]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엄청난 하락장이 펼쳐질 것이었다.

입을 벌린 채 매클의 말을 듣고 있던 헤이든은 그제야 경악한 듯 소리쳤다.

"뭐라고?"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침대 옆 협탁에 올려져 있던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잘못하면 맨발에 피가 날 수도 있는데 헤이든은 아무 것도 못 본 것처럼 핸드폰을 붙잡고 외쳤다.

"그게 정말이야?"

[예! 일본 열도 전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됐고 산업 시설도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아직 확인되지 않은 정보입니다만…….]

매클이 심각한 목소리로 속닥였다.

[후쿠시마에 있는 원자력발전소가 쓰나미에 피해를 입어서 위험한 상태라고 합니다.]

"후쿠시마라면…… 설마 도쿄전력에서 운영하는 원자력발전소를 말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헤이든은 핸드폰을 귀에 댄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방금 들은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꿈이라면 끔찍한 악몽일 거야.'

발밑이 무너지는 감각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이사님? 들리십니까.]

그때 매클의 목소리를 듣고서 헤이 든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당장 사무실로 나갈 테니까 기다려. 그리고 핵발전소가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알아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정보를 다 긁어모아!"

헤이든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젠장!"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용암같이 검붉은 것이 마구 끓어올랐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숏 스퀴즈를 성공시켜 아버지의 신뢰를 다시 되찾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지 않은가.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 모든 게 다 무너졌다.

난데없이 대지진이라니?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니고 예측할 수 없는 자연재해 때문이라는 것이 더욱 절망적이었다.

헤이든은 한순간에 천당에서 지옥으로 굴러떨어진 기분을 느끼며 서둘러 옷을 걸쳤다.

***

2011년 3월 11일 오후 3시 20분 도쿄 지요다구 나가타초에 위치한 일본 국회의사당.

대지진이 발생하자 나오토 총리는 즉각 전 각료에 긴급소집령을 내리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리고 NHK를 비롯한 모든 방송국들이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지진재해 방송을 송출하는 등 일본 전체가 그야말로 초비상 상태에 돌입했다.

이런 가운데 각 정당 역시 비상회의를 소집하고 향후 대책을 논의 했다.

자민당 간사장인 도쿠시마 역시 같은 당 의원들과 함께 회의실에 모여있었다.

넓은 회의실 한쪽에는 커다란 텔레비전 두 개가 급히 설치되어 뉴스속보를 보여줬다.

[동북부 해안에 높이 10m의 대형 쓰나미가 덮쳐 도시와 마을이 물에 잠기고 가옥이 파괴되는 등 피해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지진과 쓰나미의 직격탄을 맞은 해안 지역은 피해가 얼마나 되는지 집계가 되지 않을 정도로 피해가 심각한 상황입니다. 한편…….]

시커먼 바닷물이 밀려들어 와 마을과 농경지를 몽땅 다 집어삼키는 뉴스 화면을 보며 도쿠시마 간사장은 낮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바닷물이 센다이 공항까지 밀려들어 와서 공항이 완전 폐쇄됐다고 합니다."

칸다 의원에 이어서 야마다 의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뿐만 아닙니다. 계속되는 여진에 도쿄 지역 열차 운행이 전면 중단돼 직장인들의 퇴근길이 막혔고 도쿄 타워의 송신 철탑도 휘어졌답니다."

"정말 최악의 재난 상황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학자들이 수년내에 대지진이 있을 거라고 경고하긴 했지만 정말로 이렇게 큰 지진이 발생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슬쩍 주위를 둘러본 칸다 의원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이걸로 나오토 총리는 물론이고 민주당 역시 지지율이 바닥을 찍게 될 테니. 저희한테는 정권을 가져올 절호의 기회이지 않겠습니까."

"국민들의 비난이 내각과 민주당에 쏟아질 것이 분명하니 칸다 의원의 말이 맞습니다."

칸다 의원이 더 말을 하려는 걸 도쿠시마 간사장이 제지하며 주의를 줬다.

"쉿. 지금 같은 시기에 괜히 구설수에 올랐다가는 큰 낭패를 보기 십상이니. 입조심들 하게."

회의실 안에는 동료 의원과 당직자 들뿐이었지만 말이라는 건 언제 어떻게 새어나갈지 모르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예민한 시기에는 더욱 입조심을 해야 했다.

"흐흠. 예."

"죄송합니다."

뒤늦게 실수를 알아차린 칸다와 야마다 의원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측근들을 조심시키기는 했지만 도쿠시마 간사장 역시 이번이 정권을 되찾아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여러 악재로 인해 지지율이 바닥이던 내각과 민주당은 이번 대지진으로 사형선고가 내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태가 수습된 이후 내각이 총사퇴하고 새로 선거를 치르게 되면 우리 자민당이 정권을 되찾아오는 건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겠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도쿠시마간사장은 팔짱을 낀 채 향후 새 총리로 누굴 내세우고 각 계파들이 자리를 어떻게 나누어 가질지 생각했다.

엄청난 자연재해에 국민들이 힘들어하고 국가가 큰 어려움에 처했으나 그걸 극복해야겠다는 생각 따위그들의 머릿속엔 티끌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위기를 이겨내는 데 힘을 보태는 것보다 이걸 기회로 정권을 가져오는 것이 더 우선이었다.

자신의 권력을 키울 수만 있다면 뭐든 못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수석 보좌관이 다급히 옆으로 다가왔다.

수석 보좌관은 재빨리 도쿠시마 간사장 옆으로 다가오더니 허리를 숙여 귀에 대고 속삭였다.

"간사장님.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수석 보좌관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뭔지 몰라도 심각한 일인 게 틀림없었다.

"말해보게."

"도쿄전력이 운영하는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눈썹을 찡그린 도쿠시나 간사장이 고개를 들어 수석 보좌관을 봤다.

"쓰나미가 덮치기는 했지만 시설에 별다른 피해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줄 알았는데 도쿄전력에서 거짓말을 한 거였습니다. 외부 전력 선이 지진으로 끊긴 상황에서 바닷물에 비상 발전기가 고장 나 버려 원자로에 전력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있답니다."

"……!"

"냉각장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원자로 내부 온도가 계속 올라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온도가 상승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게……."

잠시 머뭇거린 수석 보좌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자로 내부 용기 안에 있는 냉각수가 열기에 증발해 연료봉이 바깥으로 드러나게 되면…… 노심용융이 일어나 방사능이 대규모로 방출되고 자칫 폭발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눈을 크게 부릅뜬 도쿠시마 간사장이 급히 되물었다.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할 수도 있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이런 미친!"

원자력발전소가 터진다니?

이건 수습 가능한 선을 아득히 뛰어넘는 초대형 사고였다.

더군다나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자폭탄을 맞은 국가였기에 원자력발전소 폭발이 주는 공포가 더욱 컸다.

다른 의원들도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심각한 얼굴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점점 소란이 커져가는 가운데 칸다와 야마다 의원 역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인 채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도쿠시마 간사장을 보며 말했다.

"이거 정말 큰일 아닙니까?"

"후쿠시마에서 원전이 터지면 도쿄도 위험할 텐데요!"

태평하게 회의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무리 두꺼운 벽에 둘러싸여 있어도 방사능은 피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당장 신변에 위험이 닥치자 방금 전만 해도 여유롭게 웃던 사람들의 얼굴에 위기감이 드리웠다.

낮게 신음을 흘리며 고심하던 도쿠시마 간사장은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리고 몸을 일으켰다.

"어딜 가십니까?"

"잠깐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오겠네."

지금이 그럴 때냐고 두 사람이 아연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바람이나 쐬면서 생각을 정리해야 되겠어. 금방 갖다올 테니 둘은 그냥 여기들 있게."

도쿠시마 간사장은 따라오려는 두의원을 손으로 제지하며 잰 걸음으로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빈 복도를 걸어가며 도쿠시마 간사장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수석 보좌관을 제외하면 근처에 아무도 없었다.

다들 충격적인 소식에 정신이 없는지 도쿠시마 간사장이 어딜 가는지 묻지도 않았다.

그는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한참 동안 연결음이 들린 뒤에 우에도 노무라 증권 사장이 전화를 받았다.

[예. 간사장님.]

도쿠시마 간사장이 핸드폰을 손에 든 채 걸음을 옮기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길게 말하지 않겠네. 내가 맡긴 돈을 바로 빼주게."

[지금 말씀이십니까?]

"그래."

[하지만…… 아니,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주식시장이 끝나 당장은 어렵습니다.]

상대가 허둥지둥거리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하지만 도쿠시마 간사장은 짜증을 내면서 속사포같이 쏘아붙였다.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밤에 수석 보좌관을 보낼 테니 전부 다 현금으로 준비해 놓도록 해!"

월요일에 시장이 다시 열리면 도쿄전력 주식이 폭락할 것 같으니까 그 전에 돈을 빼내려는 것이었다.

마구잡이로 밀어붙이는 태도에 우에노 사장은 할 말을 잃었다.

안 그래도 미칠 듯이 바쁜 상황인데 도쿠시마 간사장의 터무니없는 요구까지 들어주려니 머리가 빠개질 것만 같았다.

우에노 사장은 한참 고민하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장이 중단되기 전에 주식을 저희가 매수한 걸로 처리해 놓지요.]

원하던 대답이 나오자 그제야 도쿠시마 간사장이 입매를 느슨하게 풀었다.

"이제야 말귀를 알아듣는군."

***

2011년 3월 12일 지진 발생 이틀

[오늘 오후 3시 36분쯤 사고가 발생한 후쿠시마 제1원전 1호기에서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원자로 온도를 낮추는 작업을 하던 작업자 4명이 부상을 입고 시간당 1.015마이크로시 벨트의 높은 방사능이 외부로 노출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집 안 소파에 앉아 동일본 대지진 관련 속보를 보고 있던 재성은 자신이 알던 역사대로 상황이 흘러가자 조금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죄 없이 희생된 사람들을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애도를 보내기도 잠시.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생각하며 한쪽에 놔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주말인데 어쩐 일이십니까?]

네오픽스 허인환 대표의 목소리에 차분히 입을 뗐다.

"지난번에 내가 일본 게임회사들 가운데 인수할 만한 곳이 있는지 생각해 보라고 그랬죠?"

[아. 예. 기억납니다.]

"지진으로 일본 기업들의 가치가 바닥에 있을 때 알짜배기들을 몇 개 주워 담을까 하는데. 생각해 둔 것이 있으면 말해봐요."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