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수저 생활백서-338화 (338/703)

338. 나 믿고 5년만 묵혀놔요.

날씨가 쌀쌀한 가운데 검은색 렉서 스 대형세단 한 대가 총리 관저 입구에 멈추어 섰다.

뒷좌석 차문이 열리며 민주당 주류계파 수장인 오자와 간사장이 내렸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총리실 비서관이 얼른 다가와 꾸벅 머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간사장님."

턱을 까딱여 인사를 받으며 말했다.

"총리는 집무실에 계신가?"

"예."

"무슨 일로 날 부른 거지?"

오자와 간사장의 물음에 비서관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이번에 텍사스주에서 대규모 셰일오일이 발견됐다는 기사를 보고 크게 화를 내셨는데. 아무래도 그 일로 보자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텍사스 셰일오일이면…… 유니콘에너지 문제군."

오자와 간사장은 짧게 혀를 차고는 총리 관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속실을 지나 총리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안내를 맡은 비서관이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안에서 노다 총리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심 짐작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들어가시죠."

비서관이 원목으로 만들어진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서며 허리를 숙였다.

"크흠."

오자와 간사장은 헛기침을 한 번하고는 신중한 발걸음으로 안에 발을 내딛었다.

그러자 굳은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던 노다 총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갑자기 오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오자와 간사장이 훨씬 더 나이가 많은 데다 민주당 주류 계파 수장이었기에 아무리 노다 총리라고 해도 쉽게 반말을 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아닙니다."

오자와 간사장 역시 정중한 존댓말로 노다 총리의 말을 받으며 인사했다.

가볍게 악수를 나눈 뒤 두 사람 다 소파에 앉았다.

총리인 노다가 상석에 자리하고 오자와 간사장은 왼편에서 여 비서관이 차를 내려놓고 나가는 걸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먼저 노다 총리가 입을 열었다.

"텍사스에서 대규모로 매장된 셰일오일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을 테지요."

"예. 안 그래도 오늘 하루 종일 그 일로 시끄럽더군요."

오자와 간사장이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일본 언론들도 이렇게 크게 기사를 다루지는 않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대규모 셰일오일 매장량이 확인된 광구가 바로 얼마 전까지 일본이 소유했던 곳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나오토 전 총리의 성급한 결정 때문에 일이 아주 골치 아프게 됐습니다."

"올해 있을 총선거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태 때문에 가뜩이나 지지율이 바닥인데 이번 일까지 불거지면 선거에서 득 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소비세 인상 문제도 있지요."

마치 남의 일처럼 이야기하는 모습에 노다 총리는 미간을 찡그렸다.

소비세는 한국의 부가가치세에 해당하는 것으로, 노다 총리는 현행 5%를 10%까지 인상하려 했다.

국민들의 생활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문제인 만큼 여당인 민주당 내에서도 찬반이 팽팽하게 맞섰는데 오자와 간사장은 반대하는 쪽에 있었다.

오자와 간사장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솔직히 가십거리에 불가한 셰일오일 문제보다 소비세 인상이 선거에 더 악영향을 줄 것 같습니다만."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투가 거슬렸으나 노다 총리는 화를 꾹 눌러 참았다.

"정부 부채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900조 엔 정도인 걸로 압니다."

"올해 안으로 부채가 더 늘어서 1,000조 엔을 넘길 겁니다. 무려 GDP의 239%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액수죠."

"재정 적자야 만성적인 일이었고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한 피해 복구와 후쿠시마 원전 사태 대응을 위해 대규모 적자가 발생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노다 역시 다른 총리와 내각이 그래왔던 것처럼 뜨거운 화두인 재정적자 문제는 그냥 수면 아래에 묻어두고 싶었다.

하지만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 사태로 인해 경제가 크게 흔들리고 국제신용평가사들이 국가신용등급을 줄줄이 강등시키자 더 이상 손을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라고 투표에 득 될 것이 없는 소비세 인상을 하고 싶겠습니까."

"불리한 걸 알고 계시니 최소한 선거가 지난 이후로 미루면 되지 않습니까."

"국제통화기구(IMF)와 신용평가사들의 압박에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간사장도 모르지는 않을 겁니다."

"그거야 어떻게 협상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길게 말해봤자 언쟁만 커질 뿐이었기에 노다 총리는 다시 원래 용건으로 화제를 돌렸다.

"소비세 문제는 다음에 다시 논의 하죠. 그것보다 지금 당장은 텍사스셰일오일이 정치적 쟁점으로 부상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힘을 빌려주셨으면 합니다만."

"뭘 어떻게 해달라는 건지 도저히 짐작이 안 가는군요."

오자와 간사장은 약간 거드름을 피우며 대꾸했다.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허허."

쉽게 편을 들어줄 것 같진 않은 태도에 노다 총리는 속으로 혀를 찼다.

'빌어먹을 노친네 같으니.'

하지만 속마음이 어쨌건 지금은 오자와 간사장의 도움이 필요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간사장께서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세상이 다 아는데."

노다 총리는 그러지 마시고, 하면서 오자와 간사장을 추켜세웠다.

"주요 일간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건 오자와 간사장님뿐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텍사스 셰일오일에 대한 기사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런 부탁을 하는 이유는 오자와 간사장이 혼인을 통해 일본 최대 언론사인 요미우리 신문 사주 집안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었다.

"글쎄요. 총리대신님의 부탁이니 한번 말은 해보겠습니다만."

노다 총리는 울컥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속을 다독였다.

"아무쪼록 부탁드립니다."

잠시 뒤 이야기를 끝내고 나온 오자와 간사장은 비서관의 배웅을 받으며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올라 탔다.

승용차가 부드럽게 출발하자 오자와 간사장은 앞쪽 룸미러로 멀어지는 총리관저를 힐끔 쳐다보곤 혼잣말을 내뱉었다.

"쯧쯧. 총리씩이나 돼서 언론 하나 제대로 주무르지 못해 내게 도움을 청하다니. 노다도 이제 다 끝났군."

산소호흡기를 단 채 겨우 연명하고 있는 노다 총리와 내각의 수명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오자와 간사장은 직감했다.

"침몰할 난파선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탈출하는 것이 답이겠지."

결심을 굳힌 오자와 간사장은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어. 날세. 오늘 저녁에 계파 의원들을 아카사카에 있는 요정 시마자키로 소집하도록 하게."

간단히 통화를 끝낸 오자와 간사장은 푹신한 가죽시트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며칠 뒤.

오자와 간사장은 계파 의원 20명을 비롯해 당 유력인사 다수와 함께 전격적으로 탈당을 단행했다.

대외적으로는 노다 총리가 추진 중인 소비세 인상에 반대하는 거였지만 실상은 선거를 앞두고 지지율이 바닥인 여당을 탈출하는 거였다.

원래대로라면 12월 선거 직전에 벌어질 일이었으나 몇 달이나 빨리 일본 여당의 분열이 일어나고 말았다.

오자와 계파의 탈당으로 과반수가 무너져 버리자 노다 총리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중의원을 해산시켰다.

그로 인해 선거 역시 4월로 앞당겨져 실시되었다.

이 모든 게 재성이 개입하면서 만들어낸 엄청난 나비효과였다.

***

[일본 중의원 전격 해산! 4월 총선거 실시.]

[노다 내각 반년도 채우지 못하고 붕괴!]

[결국 3일 천하로 끝난 노다 내각. 자민당 다시 재집권하나.]

애플패드로 인터넷 기사를 살피던 재성은 씁 입맛을 다셨다.

"중의원 해산이라. 이거 예상했던 것보다 나비효과가 더 큰데."

내각에 큰 타격을 줄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정권 조기 붕괴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야당인 자민당의 승리가 거의 확실시 되는 데…… 유력 차기 총리가 사토 산타로였지."

무려 4번이나 총리직을 맡으며 메이지 유신 이래 가장 오랜 기간 집권한 총리라는 기록을 남기게 되는 사토 산타로는 한국 사람들한테도 절대 잊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처음에는 한국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이내 본색을 드러내 강성우익의 기조를 이어갔다.

'오죽했으면 망언 제조기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심각했지.'

재성은 자신으로 인해 일본 우익의 적자(子)라고 할 수 있는 사토 산타로가 원래보다 더 빨리 무대 위로 올라온 것이 어떤 파장을 불러오게 될지 걱정스러웠다.

그렇게 심각하게 고심하고 있을 때 목적지에 도착한 승용차가 속도를 줄이며 멈춰 섰다.

밖으로 내리자 유니콘 데이터 성남지사라는 간판을 달아놓은 아파트형 공장이 눈에 들어왔다.

작년에 부장으로 승진한 오영민이 부하 직원인 안병주 과장과 함께 얼른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오랜만이에요."

한 달에 한 번은 꼭 시간을 내서 방문하는 곳이었기에 재성은 가볍게 인사를 받고는 익숙하게 공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전에 새로 들여놓은 장비들은 성능이 좀 어때요?"

"확실히 그 전보다 연산 속도가 빨라져 채굴 효율이 더 높아졌습니다."

"다행이네요."

문을 열고 공장 안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온 건 실내를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채굴기였다.

천장까지 높이 쌓아 올린 채굴기들은 서로 연결된 채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며 비트코인을 채굴하고 있었다.

바깥이 눈이 쌓여 있을 만큼 추운 날씨였지만 공장 내부는 채굴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덥다고 느껴질 정도로 기온이 높았다.

"최근에 비트코인 가격이 많이 오르자 채굴에 나서는 사람들이 늘어나 난도가 높아져 애로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 채굴기를 사용하면서 효율이 다시 예전만큼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비트코인 시세가 얼마죠?"

재성의 물음에 오영민 부장이 바로 대답했다.

"약간씩 등락이 있지만 비트코인 하나당 13달러 정도에 가격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13달러면 한화로 만 4천 9백원정도 되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개당 1달러도 안 하던 것이 13배나 올랐으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잔뜩 흥분해서 말하는 걸 보고 재성이 내심 피식 웃었다.

내년에는 비트코인 하나의 가격이 1,200달러를 넘기고 십 년 뒤에는 7만 달러까지 폭등하기 때문이었다.

'비트코인 하나에 1억이 넘을 거라는 전망까지 나오는 걸 알면 입에 거품을 물겠군.'

그동안 비트코인은 도토리 같은 사이버 머니나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의 놀이 비슷한 걸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게 돈이 된다고 하니 놀라고 흥분될 만도 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게임 아이템 사고파는 데도 비트코인이 사용되더라고요."

옆에 있던 안병주 과장이 말을 보탰다.

"안 과장도 해봤습니까?"

"어어, 아니요."

안병주 과장은 지레 찔끔하여 손을 내저었다.

다 큰 어른이 게임 아이템 같은 거에 돈을 쓴다고 말하면 안 좋게 보일까 봐 일부러 변명했다.

"그냥 저도 여기저기서 들은 겁니다."

"뭐 어때요. 게임도 취미인데 즐겨야지."

게다가 재성은 게임으로 큰돈을 벌어들이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권장하고 싶을 정도였다.

"대신 가지고 있는 비트코인이 있다면 절대 쓰지 말고 적어도 5년만 묵혀놔요. 지금 그렇게 헐값에 써버리면 아마 평생 후회할 겁니다."

"……?"

잘 이해가 안 됐지만 안병주 과장은 회장이 하는 말이니 그렇겠지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말해준 대로 따르면 몇 년 뒤에 인생이 달라지겠지만 어쨌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재성은 거기서 이야기를 끝냈다.

그리고 새롭게 주변 아파트형 공장두 곳까지 인수해 늘린 채굴장까지다 둘러보고는 돌아갔다.

그날 저녁, 퇴근해서 집에 돌아온 안병주 과장은 오랜만에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켰다.

마침 내일이 주말인지라 아내는 일찍 잠에 들었고 지금이 유일하게 해방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오늘은 재료 파밍이나 해야지."

안병주 과장의 캐릭터는 연금술로 체력 포션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상급일수록 경매장에서 비싼 값에 팔리기 때문에 열심히 포션을 만들어서 골드를 벌 셈이었다.

마을을 나선 안병주 과장이 한창 필드에서 포션 재료를 줍고 있는데 갑자기 화면이 깜깜해지더니 캐릭터가 픽 죽어버렸다.

"야 이 시발! 뒤에서 퍽치기를 하냐!"

안병주 과장은 자기 시체 위에서 약 올리듯 점프하는 유저를 보고 이를 갈았다.

땅만 보고 다니느라 주변을 살피지 못했더니 고렙 유저가 뒤에서 기습공격을 한 것이었다.

게다가 부활도 하지 못하게 시체를 지키고 있는 걸 보니 저거 PK만 일삼는 악질이 분명했다.

"와, 미치겠네. 돈까지 다 털렸잖아."

일단 PK를 당하면 인벤토리에 있는 재료들이랑 돈이 랜덤으로 바닥에 떨어졌다.

기껏 채운 돈주머니가 반 토막이 난 걸 보자 열이 확 치솟았다.

"내가 저 새끼 죽이고 만다."

레벨 차이가 나긴 하지만 그까짓거 무기빨로 때우면 되지!!

그렇게 외치며 안병주 과장은 아이 템을 사려고 거래 사이트 창을 열었다.

공격력 증가에 치명타 옵션까지 붙은 무기 아이템을 발견한 안병주 과장은 현금 60만 원이란 가격에 잠깐 주춤거렸다.

"어?"

-비트코인도 받아요. 50개로 거래가능

가격 밑에 판매자가 써놓은 글을 보고서 안병주 과장은 좋다고 주먹을 치켜올렸다.

마침 개인적으로 채굴한 비트코인 100개가 있으니 공짜로 무기를 얻을 수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땡잡았네!"

이게 웬 떡이냐 싶어서 바로 사려 는데 문득 낮에 재성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정확하게 5년만 더 묵혀놓으라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지만 안병주 과장은 에이, 하고 머리를 흔들었다.

"설마 여기서 가격이 더 오르겠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손가락이 말을 안 들었다.

그런 말을 들어놓으니 괜히 찝찝하지 않은가.

한참을 머뭇거리던 안병주 과장은 에이 모르겠다 하면서 비트코인 대신 현금 결제를 눌렀다.

"내일부터 담배 좀 덜 피우고 자판기 커피를 마시면 되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회장님이 당부한 사안인데 그냥 넘길 순 없지.

그러면서 안병주 과장은 비트코인에 대한 생각을 치워 버렸다.

"그보다 일단 PK한 놈부터 죽이러가야지."

"뭘 한다고?"

"히익!"

안병주 과장은 살기등등한 눈으로 노려보는 와이프를 보고선 식은땀을 흘렸다.

"하여간 또 게임하지! 자기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그런 걸 해!"

"아야, 아파! 미, 미안해 자기야."

"내일 엄마 집에 텃밭 꾸미는 거 도와주기로 했잖아. 컴퓨터 끄고 일찍자!"

"아, 알았어."

안병주 과장은 속으로 눈물을 삼키면서 컴퓨터를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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