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수저 생활백서-344화 (344/703)

344. 좋습니다. 제가 사도록 하죠.

대화를 끝내고 로비로 내려온 손무성 회장은 아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마이바흐 승용차에 올라탔다.

부드럽게 출발한 승용차는 호텔 부지를 빠져나와 서초동 사성 타운으로 향했다.

대낮이었지만 서울 시내 도로는 차들로 제대로 속력을 내지 못하고 거북이 걸음이었다.

푹신한 가죽시트에 몸을 기댄 손무성 회장이 묵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00조 원을 베팅해서 경쟁자의 싹을 잘라 버리자니 다시 생각해도 놀랍군."

나란히 앉은 손창영 부사장이 한쪽 손가락으로 금테 안경을 치켜 올리면서 말을 받았다.

"저도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박 회장의 제안대로 하실 겁니까?"

손무성 회장이 고개를 돌려서 쳐다보며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솔직히 100조는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엘피다가 이대로 살아남아 어느 쪽으로는 인수된다면 거슬리는 존재가 될 거라는 말에는 동의합니다."

"특히나 향후 크게 성장할 모바일 D램에서 우리가 주도권을 가져가기 위해서는 애플과 협력하는 엘피다를 확실히 죽여놓을 필요가 있어."

같은 생각이라는 듯 손창영 부사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본 정부와 엘피다에 눈독을 들이는 놈들이 두 손을 들고 포기하게 만들려면 그 정도 액션은 보여줘야 될 거야."

손창영은 이미 아버지가 제성이 제안한 대로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성 그룹 안에서 손무성 회장의 말은 곧 법이었기에 대규모 추가 투자는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손무성 회장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조금 전 박 회장이 돈으로 눌러 버리겠다고 한 상대에는 도시바와 마이크론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야."

"……!"

"여차하면 우리도 제쳐 버리겠다는 선전포고야."

손창영이 자존심이 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실패 없이 승승장구 해오더니 정말 오만하군요."

"오만이 아니라 자신감이다."

사성 그룹에 대한 자부심이 누구보다 강한 손무성 회장이었다.

당연히 불쾌감을 드러낼 줄 알았던 손창영은 놀란 표정을 했다.

"유니콘 그룹…… 아니, 박 회장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능력과 재력을 갖춘 사람이야."

"……."

"여차하면 정말로 뒤처질지도 몰라. 그러니 너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될 거다."

긴장감을 주기 위해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로 재성을 경계 한다는 걸 깨달은 손창영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박재성 회장이 분명 대단하긴 하 다만 그렇다고 호락호락 당해줄 순없지. 우리도 반도체 투자 계획을 대폭 수정해서 5년간 100조 원으로 예산을 늘려야겠어."

안 그래도 하이닉스를 의식해 투자 계획을 수정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또다시 변경이라니.

모르긴 해도 이야기를 들으면 다들 곡소리부터 나올 터였다.

더군다나 이번엔 일부 수정이 아니라 아예 투자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동안 담당 부서는 퇴근도 못 하고 밤을 새우는 게 정해진 셈이었다.

회장의 명령이니 따르긴 하겠지만 엄청나게 커진 투자금을 어떻게 조달해야 될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손창영이 복잡한 마음으로 한창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문득 생각났다는 것처럼 손무성 회장이 말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수재들만 골라서 뽑아놨다는 놈들이 박 회장 한 명보다 못해? 엘피다가 다른 곳에 인수돼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더니."

차 안에서 쯧쯧 혀 차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경제연구소와 구조본에 있는 것들 죄다 글러먹었어. 수억씩 연봉을 주고 데려다 놓으면 뭐 해. 박 회장 한 사람을 당해내지 못하는걸."

손무성 회장은 화를 내면서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는 놈들로 싹 다 물갈이를 해야겠다고 선언했다.

의도친 않았지만 재성 때문에 사성그룹의 중추라 할 수 있는 구조조정본부와 경제 연구소에 한바탕 칼바람이 불게 생겼다.

***

재킷을 챙겨 입은 재성이 밖으로 나오자 부속실에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다들 내일 봅시다."

재성은 팔만 들어 인사를 받고는 권혁재 실장과 함께 복도를 향했다.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가자 차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또 눈이 오려나 보네."

하늘을 올려다보니 회색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유독 차가워 어깨를 움츠리면서 올라타자 권혁재 실장이 대답했다.

"밤부터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습니다."

"그래요?"

아무래도 눈이 오면 교통이 엉망이 될 터였다.

내일은 조금 일찍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하며 재성이 물었다.

"내일 잡혀 있는 일정이 뭐가 있죠?"

"방갑성 산업은행장님과 점심 약속이 있으시고 오후에는 하이닉스 반도체 경영진들과 회의가 잡혀 있습니다."

굵직한 것만 두 개였고 사이사이에 또 자잘한 일정들이 많았다.

어떻게 된 것이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고 돈을 많이 벌수록 쉴 틈이 없는 것 같다.

"평생 일만 하다 죽을 팔자인가."

아무리 제 손으로 사업을 벌인 탓이라지만 이렇게까지 바쁠 일인가 싶었다.

솔직히 처음엔 재벌 막내로 태어났으니 돈을 펑펑 써대며 플렉스하는 금수저 삶일 줄만 알았다.

그런데 막상 까고 보니 플렉스는 무슨, 금수저가 휠 만큼 노가다 삶이 따로 없단 말이지.

이거 사기 아니냐며 재성이 툴툴거리자 권혁재 실장이 의아한 얼굴로 뒤돌아보았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그렇게 차를 타고 얼마쯤 갔을 때 안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울렸다.

"아르노 회장?"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파르네세의 회장이었다.

예전에 잠깐 얽힌 적이 있지만 그것도 꽤 시간이 지난 일이었다.

재성은 이 사람이 어쩐 일이지 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아르노 씨. 오랜만이군요."

능숙한 영어로 재성이 인사를 건네 자 아르노 회장도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굴을 못 본 지 꽤 오래됐구만. 지난번에 한국에 갔었는데 마침 박회장이 미국에 있다고 해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네.]

시간이 흘렀는데도 예전에 올려둔 호감도가 아직 유지되고 있는지 상당히 친밀한 태도였다.

"그러셨습니까. 죄송하네요."

[내 잘못이니 어쩔 수 없지. 미리 연락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일정에 치이다 보니 뒤늦게 생각이 났지 뭔가.]

아르노 회장은 유쾌하게 웃음소리를 내면서 대꾸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전화를 하신 겁니까?"

[꼭 일이 있어야 연락을 해야 되는 건가. 이거 섭섭하구만.]

"하하하. 그럴 리가요."

진심으로 서운해한 건 아닌지 아르노 회장은 여전히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쁠 테니 잡담은 이쯤하고 바로 용건을 이야기하지. 자네 여윳돈 좀 있나?]

"예?"

난데없는 말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실은 아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요트를 한 척 팔려고 하는데 구매자가 있으면 소개를 시켜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네. 그런데 이야기를 듣자마자 딱 박 회장 자네가 떠오르더군.]

그때서야 재성은 말뜻을 알아차렸다.

[진정한 슈퍼 리치라면 롤스로이스와 자가용 제트기, 그리고 여름 휴가를 즐길 요트 한 척은 가지고 있어야 되지 않겠나.]

재성은 핸드폰을 손에 든 그대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마치 인터넷에서 말하는 갑부의 표본 같은 아이템들이 아닌가.

'요트라…… 뭐 한 척쯤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딱히 배를 타는 걸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있으면 유용하게 쓸 법도 했다.

마침 너무 일에만 파묻혀 지내는 것 같아 잠시 현타가 왔었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커다란 개인 요트를 타고 드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모습을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어떤 요트가 매물로 나왔는지 알아야 살지 말지 결정을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그거부터 먼저 이야기를 했어야 되는데 나도 정신이 없군.]

프랑스인 특유의 톤이 높은 목소리로 아르노 회장이 말을 이었다.

[팔려는 요트 이름이 이클립스호라네.]

"……?"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름에 재성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순간 뭔가를 떠올리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제가 알고 있는 그 이클립스호는 아니겠죠?"

[자네가 생각하는 그 요트가 맞네.]

"……!"

그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클립스 호는 길이가 164m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큰 호화 요트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러시아 석유재벌이자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축구팀 구단주인 포민 회장이 가장 아끼는 요트로 유명했다.

그리고 호화 요트답지 않게 선체 주요 부분이 장갑판과 방탄유리로 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군함에나 설치하는 고성능 레이더와 미사일 방어 장치는 물론이고 비상 탈출용 소형 잠수함까지 갖춘 걸로 한때 큰 이슈가 됐었다.

"포민 회장이 요트를 내놓은 겁니까?"

[그 친구가 요트를 얼마나 아끼는데 그럴 리가 없지.]

이클립스 외에도 럭셔리 메가 요트를 두 척이나 더 소유하고 있을 만큼 포민 회장의 요트 사랑은 유명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번에 포민 회장이 두 번째 부인하고 이혼한 건 알고 있겠지?]

"뉴스에서 본 건 같군요."

워낙 유명한 셀럽인 데다가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부호였기에 이혼기사가 크게 났었다.

'두 번째 부인이 러시아 국영 항공사 승무원 출신이라고 했었지.'

성공한 중년 남성이 원래 부인과 헤어지고 젊고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하는 전형적인 트로피 와이프였다.

[1년 동안 소송을 벌이다가 이번에 겨우 재산 분할에 합의했는데 전 부인인 옥사나가 받기로 한 위자료가 무려 50억 파운드나 된다네.]

"대단하군요."

50억 파운드면 한화로 9조 3천억원이 넘는 거액이었다.

[더 골 때리는 게 뭔지 아나?]

"글쎄요."

[재산분할을 하면서 옥사나가 포민회장이 아끼는 요트인 이클립스호를 콕 찍어서 달라고 요구했다네.]

그때서야 모든 걸 이해한 재성은 낮게 탄성을 흘렸다.

"먼저 이혼 요구를 한 포민 회장한테 제대로 엿을 먹인 거군요."

[그렇지. 그거 때문에 재산 분할 합의가 더 길어졌다더구만.]

하긴 자신 같아도 전 부인이 무슨 의도로 그러는지 뻔히 아는데 애지 중지하는 요트를 위자료를 넘겨주긴 싫었을 터였다.

[처음부터 타고 다닐 마음이 없었으니 이틀립스호를 바로 매물로 내놓은 걸세.]

"자업자득이기는 하지만 이거 포민회장이 불쌍한 생각이 드는군요."

[처신을 제대로 못 한 대가지 어쩌겠나.]

"하긴 그것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덩치가 커서 매수자가 쉽게 안 나온다는 걸세.]

"객실만 24개에 헬리콥터 착륙장도 두 개나 있는 메가 요트이니 그럴 만도 하죠."

[거기다가 금융위기 때문에 유럽부자들의 재정 상황이 팍팍해진 것도 한몫하고 있지.]

1만 3,000톤이나 되는 덩치만큼 배를 움직이기 위한 승무원만 75명이나 됐다.

유지비만 하루에 1억 2천만 원이나 들어갈 정도니 어지간한 재력으로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요트였다.

'얼핏 본 기사에 이클립스를 건조하는 데 포민 회장이 들인 돈이 8억 달러가 넘는다고 했었지.'

명성만큼 몸값이 엄청난 녀석이었다.

"매물로 나온 가격이 얼마입니까?"

[5억 달러네. 진수한 지 아직 3년도 안 된 요트인데 3분의 1이나 가격이 떨어진 거지.]

감가상각이 엄청 된 가격이었는데 유럽 금융위기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떨어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물론 특별한 조건이 하나 있네.]

"그게 뭡니까?"

[인수 이후에 포민 회장한테 절대 다시 팔지 않는 걸세.]

"전 부인이 아주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네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여자의 원한이라고 하지 않나.]

핸드폰을 손에 든 채 작게 머리를 끄덕이던 그는 문득 든 의문에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아르노 씨 요트도 아닌데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팔아주려는 겁니까?"

[하하, 눈치챘군. 사실은 포민 그자가 이클립스호를 가지고 으스대던게 눈에 좀 거슬렸거든. 그런데 애지중지하던 요트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면 얼마나 속이 쓰리겠나.]

어린애도 아니고 사뭇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유였다.

어쨌거나 포민 회장을 골탕 먹이기 위한 목적인 걸 알았으니 재성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뒤에 얽힌 사정이야 어찌 됐든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잠시 고민을 한 재성은 오래지 않아 결정을 내렸다.

"좋습니다. 제가 사도록 하죠."

[역시 시원시원하구만.]

"계약 전에 대리인을 보내 요트 상태를 확인해 봐도 되겠지요?"

[당연히 그래야지. 지금 마르세유에 정박해 있으니 언제든지 둘러보게.]

"그럼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죠."

통화를 끝낸 재성은 가죽시트에 몸을 기댄 채 한쪽에 놓인 애플패드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인터넷을 검색해 갑자기 구매하게 된 이클립스호 사진을 찾아 자세히 들여다봤다.

처음엔 별생각 없었는데 어쩐지 보면 볼수록 매력이 넘친다.

특히 요트의 새하얀 선체와 고급스러운 디자인을 보고 있으니 이게 진정한 돈 자랑의 끝판왕이 아닌가 싶었다.

전용기는 비즈니스를 위해 장만한 도구라면 요트는 바다 위를 떠다니는 나만의 휴식 공간이랄까.

"그래. 이 정도쯤은 질러줘야지."

안 그래도 일에만 치여 살다 보니 이게 진짜 금수저 인생이 맞나 싶던 차였다.

"돈 쓰니까 기분이 좋네. 여자들이 왜 쇼핑으로 스트레스를 푼다고 하는지 알겠어."

재성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상쾌한 기분으로 패드를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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