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9. UMZ.
부지 넓이만 70㏊, 가로 3.5㎞ 세로 8㎞에 이르는 UMZ 공장은 웅장함 그 자체였다.
로켓 개발부터 제작이 여기 한곳에서 모두 이루어지는 것이 납득되는 규모였다.
각 공장 건물을 연결하는 도로는 커다란 버스 여섯 대가 한꺼번에 지나가도 넉넉할 정도로 아주 넓고 양옆으로 기다란 측백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도로를 따라 공장 안으로 한참을 더 들어간 차량 행렬은 4층으로 지어진 본관 건물 앞에 멈추어 섰다.
차 문이 열리고 재성이 권혁재 실장과 함께 내리자 한 중년인이 웃는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저희 UMZ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남자는 커다란 덩치에 매부리코를 가졌으며 50대 정도로 보였다.
“전 사장을 맡고 있는 시모냔입니다.”
옆에 있던 통역이 영어로 말을 전달하는 것을 들으면서 재성은 시모냔의 손을 맞잡았다.
“반갑습니다. 박재성입니다.”
“박 회장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단하신 분을 저희 공장에 모시게 되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시모냔은 극진한 태도로 재성을 환대했다.
“저야말로 세계 최고의 로켓을 만드는 공장을 방문하게 되어 기쁩니다.”
그러자 시모냔을 비롯해 마중을 나와 있던 UMZ 측 인사들의 얼굴에 자부심 가득한 표정이 떠올랐다.
물론 그들 스스로도 예전의 영광을 뒤로하고 점차 쇠락해 가는 형편인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외부인의 입에서 회사를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은 게 당연했다.
아니나 다를까 시모냔은 한결 더 친절해진 모습으로 재성을 안내했다.
“그럼 위로 올라가서 이야기를 나누시죠.”
“아, 그 전에 잠깐.”
재성은 손을 들어 시모냔을 멈춰 세웠다.
“죄송하지만 먼저 공장을 한번 둘러봐도 될까요?”
갑작스러운 요청에 시모냔은 잠깐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잠시 뒤 일행은 부지 내부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차량을 타고 로켓 제작 공장으로 향했다.
축구장 열 개를 합쳐놓은 듯한 어마어마한 크기로 주변에 있는 공장 건물들 사이에서도 단연 제일 큰 규모였다.
역시나 이쪽에도 측백나무들이 공장을 둘러싸듯 서 있었는데 가지들이 제멋대로 웃자라 있긴 했지만 잎이 무성하니 보기는 좋았다.
차에서 내린 재성이 나무 앞에 서서 공장 건물을 쳐다보자 시모냔이 손끝으로 가리키며 옆에서 이야기했다.
“저희 공장 내에서도 제일 큰 건물입니다.”
“정말 대단하네요.”
“96년까지만 해도 이곳은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던 곳입니다. 오실 때 보셨겠지만 공장마다 심어진 측백나무들은 내부 경계를 위해 심어둔 일종의 장벽이죠.”
재성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어쩐지 관상용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시모냔을 따라 공장 내부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느껴진 건 특유의 쇠 냄새였다.
그리고 노란색 페인트로 칠해진 거대한 갠트리 크레인(Gantry Crane)을 비롯한 각종 중장비들이 공장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예전 UMZ의 전성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자세히 살펴보자 건물처럼 여기 놓인 설비들 역시 상당히 노후화되어 있었다.
고가의 장비들이라 페인트가 벗겨진다든가 방치되는 일 없이 관리는 꾸준히 하는 듯했지만 대부분 연식이 무척 오래됐다.
‘구소련 시절 설비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계속 사용하고 있는 건가.’
독립 이후 여러 가지 이유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현실을 여기서도 느낄 수 있었다.
시모냔은 공장 한복판에 미완성 상태로 커다란 몸체를 드러낸 채 놓여 있는 로켓을 가리켰다.
“지금 보시는 것이 제니트-3SL 로켓입니다.”
“씨 런치에서 운반체로 사용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시모냔이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2000년부터 현재까지 21번이 넘는 발사를 했지만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을 정도로 아주 우수한 로켓입니다.”
“그만큼 기술력과 안전성이 좋다는 뜻이겠죠.”
“맞습니다. 브라질과 호주, 인도, 아랍에미레이트 등 여러 국가와도 수출 계약을 맺고 성공적으로 납품하기도 했습니다.”
시모냔은 슬쩍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은근한 투로 말했다.
“UMZ의 인공위성 운반선과 로켓 제작 기술은 미국과 러시아에도 뒤지지 않는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최근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중국의 우주 로켓도 저희 회사에서 기술을 전수해 준 것이죠.”
뒤이은 말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톤이 되었다.
“원하신다면 로켓 완성체뿐만 아니라 필요한 기술 이전도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보통이라면 중요한 핵심 기술은 최대한 꽁꽁 싸매고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시모냔은 스스로 말을 꺼내면서까지 판매를 하려고 애를 썼다.
그 정도로 UMZ의 사정이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재성은 내색하지 않고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며 발걸음을 옮겨 공장을 마저 둘러보았다.
그렇게 시찰을 마친 뒤 소파와 응접세트가 갖춰진 방으로 안내받았으나 재성은 시모냔과 형식적인 대화만 나눈 뒤 다음을 기약하며 공장을 빠져나왔다.
이미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힌 이상 굳이 긴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전용기에 올라탄 재성은 곧장 키예프를 향해 날아갔다.
* * *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대통령 관저.
다닐로브 대통령은 핵심 측근들과 함께 집무실 소파에 앉은 채 전황 브리핑을 받고 있었다.
“……이상입니다.”
동부 돈바스 지역이 크게 확대해 놓은 지도 옆에 선 안드레이 총참모장의 이야기가 끝나자 다닐로브 대통령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뗐다.
“그러니까 반군이 러시아로부터 무기와 물자를 대규모로 보급받고 있다는 거요?”
대장 계급장을 단 안드레이 총참모장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각종 소화기는 물론이고 전차와 야포까지 수십 문이 넘어간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휴전 이후 소규모 국지전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전선이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동부 지역에 전운이 감돈다고 하자 다들 근심이 가득 찬 얼굴로 한숨과 침음성을 내뱉었다.
급히 징병제를 부활시키며 군을 재정비하고 있었지만 아직 준비 상태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돈바스 지역을 장악한 동부 반군은 러시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더욱 세력을 크게 키워 나가고 있었다.
다닐로브 대통령이 한쪽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는 말했다.
“이건 누가 봐도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는 거군.”
“맞습니다. 전선으로 병력과 보급품이 속속 증강되고 있고 반란군의 움직임이 빈번한 걸로 볼 때 곧 적이 공세에 나설 것이 틀림없습니다.”
“반란군이 공격해 온다면 어딜 노릴 것 같소?”
다닐로브 대통령의 물음에 시선이 전부 안드레이 총참모장한테 쏠렸다.
그러자 안드레이 총참모장이 손가락으로 옆에 걸린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여러 정보를 취합한 결과 반란군의 첫 번째 공격 목표는 이곳 도네츠크 국제공항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으음”
“그리고 동시에 여기 아군 전선의 돌출부인 드발체프 지역을 양쪽에서 협공해 올 걸로 예상됩니다.”
거론된 두 곳 모두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특히 드발체프 지역은 도네츠크와 루한시크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와 철로가 교차하는 교통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반군 전선 안쪽으로 돌출해 들어가 있어 정부군이 공세를 취할 때 적 방어선을 찢고 깊숙이 파고드는 칼끝이 될 수 있었다.
반군 역시 그걸 알기에 자신들의 목줄을 노리는 돌출부를 제일 먼저 제거하려는 거였다.
“총참모장.”
“말씀하십시오.”
다닐로브 대통령이 사뭇 진지한 시선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반군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겠나?”
그러자 안드레이 총참모장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이내 침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최선을 다해 적과 싸우겠지만…… 솔직히 전선을 지키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반란군을 격퇴해 내겠다는 대답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당황한 얼굴로 크게 술렁였다.
“그게 무슨 나약한 말이오!”
“지금 우리 군대가 반란군에 질 거라는 소리요.”
“군부 수장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소!”
각료들의 질타가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개중에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안드레이 총참모장은 죄인처럼 서서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만들 하게.”
결국 보다 못한 다닐로브 대통령이 나선 뒤에야 분위기가 조금 진정되었다.
다닐로브 대통령 역시 굳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안드레이 총참모장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실망한 건 마찬가지였으나 내심 반군과 싸움이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안드레이 총참모장.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뭔가?”
그러자 안드레이 총참모장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어 현재 정부군의 상태를 설명했다.
“싸우고자 하는 병사들의 전의는 그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 하지만 뒤를 받쳐줄 무기와 보급품이 너무 부족합니다.”
“가능한 모든 물자를 징발해서 군을 지원하고 있는데 그래도 모자라다는 거요?”
내무장관이 격분한 얼굴로 반발했다.
안드레이 총참모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현재 동부전선에 배치된 병력이 10만 명입니다. 그 많은 병사들을 먹이고 입히는 데만 매일 수백 톤의 물자가 소모되는 상황입니다.”
아무리 보급품을 지원해도 하루만 지나면 또 그만큼 사라지니 도저히 버틸 길이 없었다.
“그나마 지금은 전투가 소강상태라 이 정도지만, 만약 반란군이 대규모 공세를 취한다면 물자 소모가 지금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겁니다.”
타당한 지적에 내무장관은 인상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그, 그건 그렇다 칩시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기로 반군 규모가 6만 명 남짓밖에 안 된다고 하던데 훨씬 더 많은 병력을 가지고 소탕은커녕 방어도 어렵다는 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이 말에 대꾸한 것은 안드레이 총참모장이 아니라 모이소크 국방장관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반군보다 우리 쪽 병력이 더 많긴 합니다. 하지만 10만 명이라고 해도 대부분 징병제를 부활시켜 급히 모은 병사들이지 않습니까.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라 전투에 바로 투입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총만 쥐여주고 전장에 내보낸다면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더기로 죽어나갈 겁니다.”
“그건 반란군 쪽도 마찬가지 아니오? 오히려 훈련이 안 되어 있는 건 그쪽이 더 심할 텐데.”
“안타깝게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모이소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반란군 병사 가운데 상당수가 러시아군이 넘어와서 옷만 갈아입은 것이니까요. 훈련 상태는 오히려 우리보다 훨씬 낫다고 봐야죠.”
크림반도를 병합할 때 러시아군 정예 병사들을 의도적으로 퇴역시킨 용병들을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대거 넘겨 보낸 적이 있었다.
이들은 실제로 러시아군이 크림반도 내 공항이나 군부대 등 거점 시설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명 바그너 그룹이라고 불렸는데 소속된 용병 숫자가 무려 1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보병뿐만 아니라 무장헬기에 전투기까지 운용해서 사실상 크라스니 대통령의 사병 조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동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에도 바로 이 바그너 그룹 용병들이 대거 참여한 증거가 곳곳에서 나오는 실정이었다.
“빌어먹을 러시아 놈들.”
“하여튼 여기저기 안 끼는 데가 없다니까!”
각료들의 입에서 거친 말들이 터져 나왔다.
대부분 러시아를 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번엔 다닐로브 대통령도 딱히 말리지 않았다.
“이번 공세뿐만 아니라 반란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병력과 무기, 보급품이 필요합니다.”
모이소크 국방장관이 다닐로브 대통령을 향해 강력히 요청했다.
그 세 가지 요소가 갖춰지지 않으면 정규군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때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재무장관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무리한 요구를 하는군요. 독재자였던 야누코비치의 전횡과 부패 때문에 정부 재정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해 지금 들어가는 전쟁 비용을 대는 것도 벅찬 상황입니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요? 전쟁에 나가는 병사들에게 맨몸으로 총알을 받아내라는 소리라도 할 셈인가?”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르긴 뭐가 달라. 보급도 없이 병사들에게 싸우라는 말이나 똑같지 않소!”
“그렇다고 없는 돈을 어디서 만들어낸단 말입니까! 하늘에서 뚝 떨어지라고 기도라도 할까요? 아니면 전쟁을 핑계로 국민들에게 고혈이라도 짜낼 셈입니까!”
“이……!”
점차 격해지는 언성에 다닐로브 대통령이 인상을 찡그렸다.
“조용히 하게! 어린애도 아니고 이게 무슨 추태야!”
다닐로브 대통령이 앉아 있는 소파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자 그제야 말다툼이 멈췄다.
“죄송합니다.”
“너무 흥분했군요.”
모이소크 국방장관과 재무장관도 실수를 깨닫곤 사과했다.
“힘든 상황에 다들 지치고 짜증 나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끼리 다툼을 벌이면 국민들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소파에 둘러앉아 있던 각료들은 머리를 숙인 채 다닐로브 대통령의 말을 들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일치단결해서 위기를 넘겨야 하네.”
그러면서 다닐로브 대통령은 재무장관을 불렀다.
“재정에 여유가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국가의 존망이 위험한 비상시국 아닌가. 예산을 최대한 끌어모아서 군을 지원해 주게.”
“얼마나 마련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재무장관은 자신 없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해 보겠습니다.”
“부탁하네.”
그 다음은 모이소크 국방장관의 차례였다.
“반란군이 세력을 확장시키는 것만은 막아야 해. 군은 어떻게 해서든 현재 전선을 지켜내는 걸 최우선 목표로 삼도록 하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닐로브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모여 있는 각료들을 둘러보았다.
“동부 반군을 막지 못한다면 우크라이나에 더 이상의 미래는 없네. 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야.”
그러자 각료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기침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다닐로브 대통령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다시 러시아의 밑으로 들어가 2등 시민으로 사는 굴욕의 역사를 겪을 텐가!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어야 해.”
다닐로브 대통령은 주먹을 쥐어 보이며 각료들을 향해 다짐했다.
“치욕을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주게.”
“……예.”
“알겠습니다.”
좀처럼 해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각료들은 힘없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