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4.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절정을 이루던 낙엽이 하나둘 떨어지고 어느새 차가운 바람과 함께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뉴욕 프라자 호텔의 최상층 펜트하우스는 오늘 오랜만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원래 오너인 재성만을 위한 공간이라 손님을 받지 않고 굳게 문이 닫혀 있던 장소였지만 지금은 주인이 돌아온 것을 환영하듯 활기가 넘쳤다.
재성은 헐렁한 셔츠를 입고 소파에 앉아 한쪽 벽에 설치된 대형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마침 화면에선 애런 아서의 선거 캠페인 광고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배경은 텍사스의 넓은 초원.
카우보이모자를 쓴 한 백인 사내가 낡은 픽업트럭에서 막 내리는 중이었다.
징이 달린 신발 끝이 바닥에 닿자 화면이 전환되더니 이내 디트로이트의 쇠락한 공장 지대, 더러워진 청바지를 입고 안전모를 쓴 백인 노동자들의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커다란 성조기 앞에 선 애런 아서였다.
그는 특유의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며 시청자를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레이트 아메리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를 만든 사람이 누구입니까? 위대한 역사를 쌓아 올린 이들이 더 이상 잊혀선 안 됩니다! 우리 미국인의 손으로 다시 한번 미국을 위대하게 만듭시다!”
목에 힘을 주며 강하게 외치는 애런 아서의 얼굴 위로 MAGA라는 글자가 쿵 하며 박혔다.
그리고 다른 광고로 이어지자 재성은 리모컨을 집어 텔레비전을 껐다.
“MAGA라. 애런 아서의 선거 구호죠?”
“그렇습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의 약자라고 합니다.”
“차츰 미국 사회의 중심에서 차츰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는 백인 중장년층을 타깃으로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겠다는 속셈이네요.”
흐음, 하고 소리를 내며 재성은 몸을 뒤로 기댔다.
“역시 지지자들이 자신의 어떤 모습을 좋아하는지 공략 포인트를 잘 아네요.”
“하지만 조금 전 광고도 그렇고 너무 백인 쪽에 초점을 맞춘 것 같지 않습니까? 마치 유색 인종은 아예 존재도 하지 않는 것처럼요.”
권혁재 실장은 걱정된다는 것처럼 미간을 찡그렸다.
“너무 노골적인 태도라 다른 계층의 반발이 클 텐데요. 제가 보기에는 득보다 실이 큰 것 같습니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에서 애런 아서의 이런 태도는 충분히 문제가 될 만한 일이었다.
실제로 편향적이고 거침없이 막말을 내뱉는 애런 아서의 행동은 여러 사람에게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민주당은 물론이고 같은 편인 공화당 내에서도 왜 저런 사람이 후보냐고 의문을 표하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내 생각은 달라요. 애런 아서가 겉보기엔 막 나가는 사람처럼 보여도 사실은 꽤 머리가 잘 돌아가는 쪽이거든.”
“그럼 이런 행동들이 전부 계산된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재성은 머리를 끄덕이며 반대로 권혁재 실장에게 물음을 던졌다.
“만약 권 실장이 흑인이나 히스패닉계라고 생각해 봐요. 투표권을 가지고 있어서 대통령 선거에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면, 애런 아서한테 표를 주겠어요?”
“아니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권혁재 실장이 바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데 왜 뽑겠습니까. 절대 표를 안 주죠.”
“바로 그거예요.”
재성은 정답이라며 미소 지었다.
“원래 애런 아서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만한 캐릭터가 아니에요. 다른 후보들과 달리 폭넓은 계층에서 지지를 이끌어내기 힘드니 아예 노선을 확 틀어버린 거죠. 자신만의 확고하고 단단한 지지층만 있으면 승산이 있다고 본 거예요.”
“자기 편만 확실히 챙기겠다는 건가요?”
“그렇죠. 다수의 후보자들 가운데 단 한 명을 뽑아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경선에서 열성적인 고정 지지층을 가지고 있다는 건 매우 유리한 일이거든요.”
기존의 익숙한 정치판에만 머물러 있던 다른 후보들은 절대 생각해 내지 못할 파격적인 전략이다.
게다가 쇼 비즈니스를 잘 활용하는 애런 아서의 성격에도 딱 들어맞았다.
“그렇게 해서 설령 경선에 이긴다 해도, 막상 본선에서 민주당 후보에게 패하면 전부 부질없는 일 아닌가요.”
여전히 수긍하지 못하는 얼굴인 권혁재 실장을 향해 재성이 말했다.
“아니. 본선으로 가게 되면 애런 아서의 노림수는 더욱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거예요.”
“네?”
아직도 이해 못 한 권혁재 실장을 향해 재성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애런 아서가 애초에 타깃으로 삼고 공을 들이는 계층이 어디일 것 같아요?”
“그야 텍사스 카우보이와 러스트 벨트의 백인 블루칼라들이겠죠. 조금 전에 캠페인 광고에서도 노골적으로 등장시켰지 않습니까.”
처음 출마 선언을 하면서 멕시코 불법 이민자와 줄어든 일자리, 그리고 이슬람 테러리즘 문제를 언급하며 막말을 쏟아낸 것만 봐도 어딜 타깃으로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쇠락한 러스트벨트뿐만 아니라 히스패닉계의 급격한 유입을 걱정과 분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다수의 백인 중산층들도 애런 아서의 타깃에 들어갈 거예요. 최근 여론 조사를 보았을 때 플로리다에서 애런 아서의 지지율이 크게 오른 것이 그 증거죠.”
플로리다는 텍사스, 캘리포니아와 함께 급격히 불어나는 불법 이민자 숫자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곳이었다.
재성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부분이 있는데. 알겠어요?”
“글쎄요…….”
“러스트벨트의 백인 블루칼라와 플로리다 모두 공화당이 아닌 민주당의 오래된 텃밭이라는 점.”
“아!”
권혁재 실장이 그제야 깨달았다는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이들이 공화당 후보인 애런 아서에게 열광하며 큰 지지를 보내고 있죠.”
참 재밌다며 재성은 낮게 웃었다.
“점점 주류에서 밀려나며 경제난까지 겪고 있는 백인 서민 계층의 상실감과 분노가 얼마나 클지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에요.”
“애런 아서의 막말이 이들한테 짜릿한 쾌감을 주고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단순히 막 나가는 태도뿐이라면 인기가 오래 가진 않겠죠. 동시에 민주당 정권 시절 체결한 북미자유협정과 라출라 대통령이 적극 밀어붙이고 있는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 때문에 기업들이 죄다 외국으로 빠져나갔다며 비난을 쏟아내고 있잖아요.”
재성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애런 아서가 흔들고 있는 달콤한 미끼가 바로 그거예요. 외국으로 빠져나간 회사들을 다시 미국으로 불러들여서 일자리를 만들어주겠다는 거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백인 서민층이 이런 애런 아서의 말에 당연히 열광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가장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그러니 공화당 지지층 일부가 이탈하더라도 애런 아서에겐 아무런 타격이 없죠. 오히려 민주당이 확고하게 자신들의 지지층이라 믿고 있는 러스트벨트 노동자들과 플로리다 같은 곳의 백인 서민층이 애런 아서에게 표를 던지게 될 텐데, 결과가 어떻게 되겠어요?”
시선을 받은 권혁재 실장이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대답했다.
“애런 아서가 백악관의 새 주인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이제 왜 내가 애런 아서에게 베팅을 걸었는지 알겠죠.”
재성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난 승산 없는 싸움은 하지 않아요.”
일반 대중은 겉으로 드러난 사실밖에 보지 못하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수면 아래에 숨겨져 있는 법이다.
“회장님은 처음부터 다 알고 계셨군요.”
“당연하죠.”
사실 권혁재 실장은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재성이 판돈을 잘못 건 것이 아닌가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저렇게 문제가 많은 사람인데 왜 같은 편에 서기로 했는지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재성의 말을 다 듣고 나니 물밑에서 얼마나 많은 계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는지 새삼 감탄하게 되었다.
눈이 다시 뜨인 기분이라며 권혁재 실장이 감탄하자 재성은 별것 아니라고 웃어넘겼다.
“그런데 회장님. 애런 아서가 아무 생각도 없이 떠들어대는 게 아닌 건 알겠습니다만 상대인 제니퍼 전 국무장관도 만만치 않은 여걸이지 않습니까. 약점이 많은 애런 아서가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요?”
권혁재 실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회장님 말씀을 들으니 불안함은 가셨지만 아무래도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기 어려울 것 같군요.”
“뭐, 제니퍼 전 국무장관이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죠.”
“그럼 위험한 거 아닙니까?”
“괜찮아요. 어차피 최후의 승자는 애런 아서가 될 거니까.”
재성은 눈을 가늘게 뜨며 단언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불가능한 것도 되게 만들겠다는 확고한 자신감이 전신에서 흘러넘쳤다.
보는 사람이 압도당할 정도로 강한 자신감을 풍기는 재성을 권혁재 실장은 어깨를 움츠리고서 바라보았다.
재성은 한순간에 기세를 누그러뜨리고서 농담처럼 말했다.
“할리우드 영화배우 출신인 레이건도 미국 대통령이 됐잖아요. 그런데 부동산 재벌이라고 왜 못하겠어요?”
한번 있었던 일이 두 번은 못 일어나겠냐면서 재성이 낮게 웃었다.
* * *
며칠 뒤.
백악관을 방문한 재성은 비서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이제는 익숙해진 복도를 지나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오피스(Oval Office)로 향했다.
직원이 열어준 문을 지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창문을 뒤에 두고 앉은 라출라 대통령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앉은 자리는 결단의 책상이라 불리는 것으로 영화에서도 종종 등장할 정도로 유명했다.
보통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미국 대통령의 위엄을 보여줄 때 책상 앞에 앉은 배우가 근엄한 표정으로 지시를 내리는 것이다.
“오랜만이군.”
발소리를 들은 라출라 대통령이 자리에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라출라 대통령은 평소처럼 몸에 딱 맞춘 고급 정장에다 짙은 빨간색 넥타이로 포인트를 준 세련된 차림새였다.
“바쁘실 텐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네라면 언제든 환영이지.”
라출라 대통령은 남쪽 잔디밭이 보이는 창문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어 보였다.
“자, 앉게나.”
라출라 대통령이 응접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재성은 자연스럽게 상석 오른쪽, 라출라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자네는 술을 잘 안 마셨지.”
“예.”
대답하면서 재성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선반 위에 있는 위스키와 럼주에 닿았다.
매일같이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는 데다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이다 보니 백악관에 있는 고위직 사무실에는 어딜 가나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적당히 술로 뇌 한쪽을 마비시키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업무 강도가 세다는 뜻이기도 했다.
신입일 때는 술 한 방울도 못 마시던 사람도 1년만 지나면 자연스럽게 위스키 한 병을 비우게 된다는 속설이 생길 정도다.
“그럼 차를 마시겠나? 말만 하면 뭐든지 준비되어 있다네.”
“지난번에 마셨던 생강차가 괜찮더군요.”
“아, 그거 말이지. 나도 제일 좋아하는 차일세.”
라출라 대통령은 자기도 그걸로 마시겠다며 탁자 위에 설치된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부르셨습니까.”
“생강차 두 잔만 가져다주게.”
“알겠습니다.”
잠시 뒤, 여비서가 두 사람 앞에 오렌지 색깔의 음료가 들어 있는 유리컵 두 잔을 내려놓고 나갔다.
흔히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따뜻한 생강차가 아니라 어니스트 티라는 유기농 음료 회사에서 만든 건강 음료였다.
“건강에 좋다는 것치고는 꽤 맛있어서 말이지, 집무실은 물론이고 대통령 전용기와 헬기에도 항상 구비해 놓고 있다네.”
“그렇군요.”
재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라출라 대통령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라출라 대통령은 모르고 있겠지만 그가 생강차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재성도 이미 알고 있었다.
라출라 대통령 정도 되는 중요 인물이라면 사소한 기호까지도 다 파악해 놓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래서 재성도 일부러 그걸 알고 생강차를 마시겠다고 한 거였다.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왔나?”
음료를 한 모금 마신 라출라 대통령이 재성을 쳐다보며 물었다.
“지난번에 간단히 전화로 말씀을 드리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오해가 없도록 직접 만나서 양해를 구해야 될 것 같아서요.”
“흠…….”
뒤로 몸을 기댄 라출라 대통령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애런 아서 일 때문이로군.”
“그렇습니다.”
라출라 대통령은 어느새 웃음이 싹 가신 얼굴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솔직히 말해 이번 일로 박 회장한테 조금 실망했네.”
“예. 그러셨을 테죠.”
“애런 아서는 절대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인물일세.”
라출라 대통령은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재성에게 말했다.
“만약 제니퍼 후보와 껄끄러운 것이 있으면 내가 중재를 서주지.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말을 갈아타는 게 어떤가.”
라출라 대통령으로선 최대한 호의를 보인 셈이었다.
하지만 재성은 차분한 목소리로 라출라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자 라출라 대통령의 얼굴이 단박에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