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0. 부란(Buran).
러시아어로 부란(Buran)은 눈보라를 의미했다.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 올리고 첫 우주인인 유리 가가린을 탄생시키며 우주개발 경쟁에서 앞서 나가던 러시아였지만 아폴로 11호가 먼저 달에 착륙하면서 미국에 추월당하게 됐다.
거기다가 우주왕복선까지 완성시키며 미국이 성큼 거리를 벌리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옛 소련이 야심차게 내놓은 것이 바로 우주왕복선 부란이었다.
1988년 무인 우주 일주에 성공하고 이어서 1992년에 유인 비행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불과 1년을 남겨두고 냉전에 패한 소련이 붕괴되면서 프로젝트가 백지화되어 버린 비운의 우주왕복선이었다.
예전 모습 그대로 부활한 부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재성을 보며 조효준 사장이 말했다.
“미국이 만든 우주왕복선과 마치 쌍둥이처럼 흡사하지 않습니까?”
“정말 그러네요. 알고 보지 않는다면 미국 왕복선이라고 해도 깜빡 속을 정도예요.”
“그래서 처음 부란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미국 왕복선을 카피한 짝퉁이라는 비난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조효준 사장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이걸 보면 저 같아도 그런 생각을 할 것 같더군요.”
겉모습을 보면 Ctrl C + Ctrl V를 해서 붙여 넣기를 한 것처럼 정말 똑같았기에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실제로 정보 해제가 된 CIA 자료에 KGB가 우주왕복선의 기본 설계와 사용된 소재, 그리고 비행 시스템 등 수많은 기밀 자료를 몰래 빼내 소련으로 훔쳐갔다고 나온다더군요. 그걸 보면 부란이 미국 우주왕복선의 쌍둥이 동생일 가능성이 클 겁니다. 뭐. 러시아에서는 항공역학에 최적화된 설계를 하다 보니까 비슷하게 나왔다고 변명을 했지만 말입니다.”
“치열한 첩보전이 벌어졌던 냉전 시기니까. 우주왕복선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겠죠.”
“맞습니다. 하지만 겉은 똑같아도 내부를 하나씩 뜯어 보면 미국 우주왕복선과 차이점이 큰 걸 알 수 있습니다.”
“동체에 대형 엔진이 장착되지 않은 걸 말하는 거예요?”
역시나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모습에 조효준 사장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대형 액체 연료 로켓 엔진을 동체에 장착해 외부 고체 로켓 부스터와 함께 추진력을 얻어 우주로 날아가는 미국 우주왕복선하고 달리 부란은 대형 로켓 엔진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대형 부스터 로켓인 에네르기아가 부란을 대기권까지 쏘아 올리는 방식이죠?”
“역시 잘 알고 계시는군요. 한 번에 100톤의 물체를 쏘아 올릴 수 있는 괴물 같은 로켓이 바로 에네르기아인데 말 그대로 여기에 업혀서 우주까지 날아가는 겁니다.”
조효준 사장이 두 손으로 부란이 에네르기아 로켓에 얹힌 모습을 만들어 보였다.
“물론 부란 자체 무게만 105톤이나 되고 여기에 다시 30톤의 화물을 가득 실으면 135톤까지 늘어나서 에네르기아 로켓의 운송 능력을 훌쩍 넘어가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추가로 추력 보강용 로켓을 장착해서 쏘죠.”
“예. 바로 저희가 천궁의 아버지뻘인 제니트(Zenit) 로켓의 1단 추진체를 개조한 보강용 로켓 4개를 함께 장착에서 힘을 보태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런 걸 보면 제니트 로켓과 거기에 사용된 RD-170엔진은 정말 잘 만들어진 물건인 것 같네요.”
재성의 말에 조효준 사장이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잘 아는 분야다 보니 점점 흥이 나는 듯 이야기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15만 4,700kgf의 추력을 뿜어내는 RD-0120 엔진 4개와 RD-170 엔진을 탑재한 4개의 추력 보강용 로켓을 묶어서 만들어낸 초대형 발사체. 그게 바로 에네르기아입니다.”
조효준 사장은 어린애같이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비록 80년대에 만들어진 물건이지만 당시 구소련의 최첨단 우주과학 기술이 집약되어 있는 명품이죠. 에네르기아 로켓과 부란 우주왕복선을 나사 하나까지 분해해서 분석해 보면서 많은 기술과 노하우를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조효준 사장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빙그레 웃으며 재성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회장님의 지시를 받고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 가서 부란과 에네르기아 로켓 실물을 봤을 때 엄청 놀랐던 게 생각나는군요. 전혀 상상도 못하던 일이라 진짜 뒤로 자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내가 필요한 건 뭐든 구해다 준다고 했잖아요.”
“하하, 그래도 설마 실물을 볼 수 있을 줄은 몰랐지요.”
조효준 사장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부란 우주왕복선은 첫 우주비행까지 성공해 놓고 소련의 붕괴로 인해 프로젝트가 폐기되어 버렸다.
그로 인해 이미 완성됐거나 제작 중이던 부란 우주왕복선들이 그대로 버려진 채 방치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국가가 망한 혼란스러운 상황에 이런 걸 챙길 여유 따위는 당연히 없었겠지.’
더군다나 부란 프로젝트가 진행되던 세계 최대 로켓 발사장인 바이코누르 우주기지가, 러시아가 아닌 독립한 카자흐스탄 오지에 위치해 있어 더욱 관리가 어려웠다.
‘혼란을 겨우 수습한 러시아가 2050년까지 바이코누르 우주 기지를 임대해서 쓰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것들이 잊히거나 방치되고 있지.’
부란 우주왕복선 역시 그중에 하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운이 좋았죠. 나도 설마 완성 직전의 부란 우주왕복선 2대와 에네르기아 로켓이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의 버려진 격납고에 방치되어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그것도 거의 온전한 상태로.”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보관 상태도 굉장히 양호했지요. 직접 가서 보고도 믿겨지지 않더군요.”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의 버려진 대형 격납고에서 처음 방치된 부란 우주왕복선과 에네르기아 로켓을 발견해 냈을 때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한 표정이었다.
사실 회귀 전 버려진 소비에트 우주왕복선이라는 이름으로 유튜브에 구소련 붕괴와 함께 폐기된 걸로 알려진 부란 우주왕복선이 마치 지구 종말의 현장처럼 폐허가 된 격납고에 방치된 채 버려진 영상이 올라오면서 큰 화제가 됐었다.
‘그 덕분에 스타테크놀로지 개발진들이 유인 우주선 개발을 위한 기술 확보가 쉽지 않다고 어려움을 토로했을 때 바로 부란을 떠올릴 수 있었지.’
그런데 당연히 벌써 발견됐을 줄 알았던 부란 우주왕복선의 존재를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이것도 내가 회귀하면서 발생한 일종의 나비효과일지도 모르지.’
재성과 스타테크놀로지 입장에서는 더욱 잘된 일이었다.
그 즉시 크라스니 대통령을 찾아가 협상을 벌여 1억 달러에 방치된 부란 우주왕복선 2대와 에네르기아 로켓 1대를 넘겨받았다.
‘1억 달러가 중립국인 리히텐슈타인에 있는 크라스니 대통령의 차명 계좌로 들어간 건 둘만의 비밀이지.’
그렇게 은밀히 한국으로 가져온 부란 우주왕복선과 에네르기아 로켓은 지난 1년간 스타테크놀로지 개발자들이 나사 하나까지 철저하게 뜯어보고 연구했다.
천궁의 원형인 제니트 로켓부터 시작해 이르쿠츠크주에서 찾은 대규모 금광까지 정말 아낌없이 주는 마더 러시아가 아닐 수 없었다.
‘참 노르드스트림 가스관 운영권도 있군.’
가스관 운영권은 매년 수천만 달러의 현금을 벌어다 주는 알토란 같은 존재였다.
재성은 입가에 가만히 미소를 짓고서 조효준 사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격납고에서 찾아낸 부란 우주왕복선은 각각 코드번호 OK-MT와 OK-1,02입니다. 이 중에 OK-MT는 시뮬레이션 훈련 및 테스트 용도로 만들어진 기체입니다.”
조효준 사장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자신감 있게 말했다.
“물론 시뮬레이션 기체라도 동체와 내부 설비가 똑같이 만들어져 있어서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매끈한 부란의 동체를 바라보며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조효준 사장이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OK-1,02는 실제 우주로 쏘아 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기체로 공정률이 98% 가까이 진행돼 사실상 완성된 상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격납고에서 함께 찾아낸 에네르기아 로켓은 4개의 추력 보강용 보조 로켓까지 전부 조립된 완성품이었고요.”
쉴 새 없이 말하던 조효준 사장이 열의로 들뜬 눈을 하고서 물었다.
“더 놀라운 게 뭔지 아십니까?”
“뭐죠?”
조효준 사장은 비장의 카드라도 내밀 듯 한껏 가슴을 부풀렸다.
“운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주왕복선 기체 내부와 방치되어 있던 격납고 안에서 기체 설계도는 물론이고 정비, 운영 매뉴얼 등 트럭 수십 대 분량의 기술 자료가 무더기로 나왔습니다.”
소련이 붕괴되고 한창 혼란스러웠던 시절.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 있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황급히 귀국하는 과정에서 원래라면 파기했어야 할 중요한 자료들을 처리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둔 것이다.
재성이 씨익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러시아 과학자들이 아주 멋진 선물을 남겨두고 갔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덕분에 유인 우주왕복선 개발에 아주 큰 도움이 됐습니다.”
“천룡 개발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죠?”
“예. 중간에 큰 문제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계획대로 2019년에 첫 시험 발사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천룡은 더 무거운 화물을 우주로 날려 보내기 위해서 에네르기아 로켓을 참조해서 개발 중인 추력 4천 톤짜리 대형 로켓이었다.
“이제 연구가 다 끝난 걸로 아는데 부란은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그러자 조효준 사장이 살짝 머뭇거렸다.
“아직 결정된 건 없고 고민 중입니다.”
아무래도 쓸모를 다했다고 해서 그대로 폐기처분하긴 싫은 눈치였다.
하긴 재성이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부란 우주왕복선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마소 냉전 시기 우주개발 경쟁의 위대한 유산이 초라한 모습으로 있는 게 싫었는지 조효준 사장은 바로 기술자들과 함께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연구를 위해 완전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된 기체는 이제 막 생산을 끝낸 신형처럼 아주 깨끗하게 도색까지 다 된 모습이었다.
이게 전부 스타테크놀로지 기술자들의 손끝에서 이뤄진 변화였다.
뽑아낼 수 있는 건 다 얻어낸 후였으니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데도 정성을 들여 완전 복원 수준으로 기체를 조립해 놓은 것이다.
단순히 이것만 놓고 봐도 스타테크놀로지 연구원과 기술자들처럼 우주를 동경하는 이들에게 부란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재성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검지를 들어 올렸다.
“당분간 에네르기아 로켓과 함께 잘 보관해 두고 있다가 나중에 별도의 전시 공간을 만들어주는 건 어때요? 일반인들도 볼 수 있도록 외부에 공개하면 꽤 뜻깊은 전시가 될 것 같은데요. 나름대로 기념도 되고.”
재성의 아이디어에 조효준 사장이 활짝 웃으며 반색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조효준 사장은 손바닥을 짝 마주치고서 그렇게 하자며 바로 찬성했다.
“우주개발 역사의 한 부분을 장식한 우주왕복선이 이대로 어둠 속에 묻히는 것 같아 아쉬웠는데 그러면 되겠군요. 나중에 우주 공학을 연구하는 학생들에게도 좋은 교본이 될 겁니다.”
어린애처럼 기뻐하는 조효준 사장의 모습에 재성은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확실히 재성이 생각하기에도 그냥 폐기처분하기엔 아까운 물건이었다.
재성은 부란 우주왕복선을 잠시 더 살펴본 뒤 격납고를 나와 조효준 사장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전용 헬리콥터에 올라탔다.
이다음 행선지는 나로 우주센터였다.
오늘 두 번째 우주정거장 메인 모듈인 직녀 발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 * *
[3, 2, 1, 발사!]
카운트가 끝나는 것과 함께 발사대에 세워진 천궁 로켓이 시뻘건 화염을 내뿜으면서 어두운 밤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중력을 역행하며 빠르게 날아오른 천궁 1단 추진 로켓은 발사 2분 40초 뒤 직녀를 실은 본체와 분리됐다.
보호덮개가 정상적으로 분리되며 직녀 모듈이 목표 고도에 안착하자 재성을 비롯한 관제실 요원들의 관심은 분리된 1단 추진체에 집중됐다.
[역추진 로켓 점화!]
동체에 설치된 CCTV 화면에 꺼져 있던 엔진 노즐에서 다시 붉은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와아~!”
“그래. 좋았어!”
하강 속도를 줄이며 천천히 떨어져 내린 1단 추진체는 이내 4개의 착륙 장치를 아래로 내렸다.
그러고는 발사대에서 거리를 두고 만들어진 착륙장에 깃털처럼 사뿐히 수직으로 착륙했다.
3개월 전에 한 번 쓰고 회수한 천궁 로켓 1단 추진체를 다시 재사용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스페이스X에서 만든 팰컨9가 아니라 자체 개발한 로켓으로 재활용 발사에 성공하자 관제실에 떠나갈 듯한 함성이 울렸다.
마음을 졸이면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저마다 얼굴을 마주하고서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고 환호하거나 기뻐했다.
“좋았어.”
재성 역시 짜릿한 환희를 느끼며 한쪽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기쁨으로 한껏 벌어진 입에서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하, 해냈다고!”
이걸로 스페이스X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경쟁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