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독사 사냥 (1)2022.02.08.
‘이건 활용도가 있겠군.’
둘에게서 확보한 고독 이외에도 목함 안에는 한 마리의 고독이 더 들어있었다. 총 세 마리. 모두 세 명을 중독시킬 수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더 의미가 있는 것은, 그 활용도가 제법 넓다는 것에 있었다. 역으로 마교도 중 하나에게 먹여 죽이거나 조종할 수도 있을 테고, 정파의 인물에게 먹인 뒤 마교도 행세를 할 수도 있을 테니까. 일종의 공격용으로도 써먹을 수 있지만, 정보 교란용으로도 쓰임이 충분하다는 의미다. 물론 고독을 기르는 것은 은근히 까다롭지만, 그 또한 천화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소지품창에 넣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소지품창 안에서는 시간이 동결되기에, 언제 꺼내든 방금 전에 집어넣은 것과 같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뱉어낸 것인지 알아차린 성주가 눈물콧물 범벅이 되어 매달렸지만 천화는 슬쩍 그를 피해냈다. 위협을 없앴으니 이제는 정보를 캐낼 차례였다. 일단 성주가 정신을 차리도록 달래었고, 해남파 무인들은 주자엽만 남기도 모두 장원으로 돌려보냈다. 그들에게 씌워진 의미 없는 혐의는 당연히 모두 벗겨진 상태였다.
“그렇단 말이지.”
그렇게 성주를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들은 제법 흥미로운 것들이었다. 애초에 점조직처럼 움직이며 관인과 무림인들을 포섭하기에 꼬리를 밟기는 어려울 듯싶지만, 천화가 대략적인 흐름을 파악하기에는 딱 적당했다.
‘예상대로네.’
일단 마교와 손을 잡은 것은 현왕 쪽이 맞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 고독을 먹이고 협박한 마인을 소개해준 것이 그의 외척 중 한 명이었고, 위문호가 소금 밀매를 하는 것을 파악했지만 중간에서 보고를 받은 것도 그들이었다. 그럼에도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는 것은, 그들이 소금 밀매를 묵인하고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었다. 누가 배후인지가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누구지?’
그리고 또 한 가지. 천화가 어렴풋이 짐작하던 바가 사실로 드러났다. 그들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성주가 눈치껏 알아낸 것이 있었다. 지금 마교의 상황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이다. 꽤나 야심차게 중원 침공을 준비 중이었지만, 최근에 이르러 누군가와 싸우고 있으며 꽤나 고전 중인 것으로 보인다는 중요한 정보였다. 허나 천화조차도 막상 떠오르는 인물이나 단체가 없었다. 정파 계열의 누군가라면 당연히 난리가 났을 텐데 잠잠하고, 그렇다고 사파라고 하기에는 혼자서 마교를 감당하거나 곤란하게 할 만한 곳이 없었다. 그렇다면 녹림이나 장강수로채? 그들이라면 지형적 이점을 이용해 마교를 괴롭히는 것도 일부 가능하겠지만, 마교 입장에서도 애초부터 그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 없다. 나름대로 대비를 했을 텐데 이 같은 곤란을 겪을 리가 없는 것이다. 대체 누구일까. 자신이 놓친 것은 무엇일까. 골똘히 생각해보지만 선뜻 떠오르는 무언가가 없었다.
‘정보를 캐봐야겠군.’
약 일각여를 고민하던 천화는 곧 근심을 털어버렸다. 답이 없는 일에 매달려 끙끙대는 것은 취향에 맞지 않았으니까. 일단 개방과 하오문을 통해 정보를 모아보기로 하고 드러난 것들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마공서 이외에 고독을 이용한다는 것도 알았고, 장로급까지 움직였다는 건 슬슬 본격적이라는 소리인데…….’
무신지로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마교가 마수를 뻗어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천화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만큼 자신 역시 빠르게 성장해가고 있었으니까. 이전과 같은 무위만 갖출 수 있더라도 정사대전을 막아내는 것은 그리 큰 어려움이 아닐 터였다. 손이 좀 모자라기는 하겠지만, 고인물들을 대신해줄 조력자들도 일부 확보한 상태였으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때문에 생각보다 마교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도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럼 조금 더 거들어볼까?’
오히려 좀 더 마교의 행보를 가속화시킬 계획까지 꾸미고 있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모든 이야기를 듣고, 확인 차원에서 깨어난 마인을 심문한 천화가 해답을 내렸다. 어차피 마인이야 고독을 먹여봤자 굴복하지 않을 터였기에 말을 던지고 반응을 통해 정보의 진위여부를 유추하는 정도로 사용하고 목을 베었다. 그 때문에 주변에 남은 것은 설영과 주자엽, 남해도의 성주뿐이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천화의 결정은 깔끔했다. 해남파는 이미 위문호와 초운학 등을 죽이며 마교와 척을 지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만, 성주에게는 계속해서 그들의 편인 듯 연기를 하게 만든 것이다. 당연히 고독을 제거한 것도 숨겨야 했다. 고독이 제거된 것을 안다면 즉시 목숨을 취하려 들 테니까.
“쉽지 않을 겁니다. 놈들도 의심을 할 테니까요.”
그리하여 좀 더 정보를 얻어내고, 그것을 다시 해남파와 천화에게 알려 도움을 주라는 것이다. 그 또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당장 고독에 고통을 받다가 죽는 것보다는 낫다. 한 번의 기회는 더 얻은 셈이니까. 마교가 해남파를 노릴 수도 있지만, 곧 남만야수궁에서도 사람을 보내올 테고 만금상단에서도 상단을 꾸준히 보내 왕래가 잦아질 테니 허튼 짓거리를 하기는 힘들 터였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살려주셔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주는 그 이중 첩자 노릇을 흔쾌히 수락했다. 마교야 두렵지만 그렇다고 진왕의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니, 현왕에게 견제를 받거나 내쳐지지도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관계 정리는 일단락되었고, 천화와 설영은 가벼운 마음으로 남해도를 떠났다. 남해도가 완전히 정리되고 안정화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주자엽이라면 잘해낼 터였다.
@ 남해도를 떠난 천화와 설영의 다음 행선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사천당문. 감히 자신을 상대로 수작을 부린 데다 위문호를 지원해 자신에게 독까지 먹인 놈들을 가만 둘 수 없으니까.
‘당문이 휘청거리면 마교도 힘을 얻겠지.’
……라는 것은 표면적인 이유였고, 사실은 마교를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만들고자 하는 이유도 있었다. 당금 무림에서 ‘독’하면 떠올리는 것이 바로 사천당문이었으니까. 이전에 벌어진 정사대전에서도 마교에 소속된 만독문의 치명적인 독들을 파악하고 해독하며 무림맹의 큰 축을 담당했던 것이 사천당문이었다. 그 말은, 반대로 사천당문의 힘이 약해질수록 모처에서 힘을 기르고 있을 마교의 독이 더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게다가 오랜 세월 숨죽이며 사천당문이라 할지라도 금방 해독해낼 수 없는 특수한 독들을 개발해냈을 테니, 사천당문이 흔들린다면 더 적극적인 공세를 펼칠 수 있겠지.
‘겸사겸사 필요한 일이니까.’
물론 정사대전이 벌어질 때까지 그냥 두었다가는 당가놈들이 무슨 헛짓거리를 하거나 자신에게 수작을 부릴지 알 수 없기에, 미리 기강을 잡아놓으려는 의도도 분명히 있었다.
“고불은 잘 지내고 있겠지?”
그런 복합적인 목적을 가지고 출발한 천화와 설영이 사천 땅에 닿기 위해서는 일단 광서와 귀주성을 거칠 필요가 있었다. 그중 광서성은 이미 귀주에서 탈출해 남만으로 향하면서 한 번 거쳐보았던 땅이었다. 소수민족들이 곳곳에 퍼져있었으나, 그들을 학살하고 마교에 덮어씌우려는 당문의 수작에 분노한 고불이 남아 전사들을 규합하고 있던 곳이다. 이후 간간이 서신을 주고받았고, 천화가 만금상단을 통해 지원하기도 했다. 때문에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느 정도까지 세력이 커졌는지, 무공은 얼마나 늘었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낭인왕이 되실 몸이니 어련히 잘 크고야 있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고불이니 큰 걱정은 없지만, 중간 점검쯤은 필요하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던 천화는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방향은 같으니 잠시 들러보는 것도 괜찮겠지만, 고불이니까. 게다가 하오문과 만금상단을 통해 그의 소식은 대충 알았기에, 찾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응. 그렇겠지. 설령 마교가 나선다 할지라도 쉽게 당할 녀석은 아니니까.”
고불은 이제 명실상부 소수민족들의 왕이 되었다. 이미 대부분의 소수민족들을 규합하며 세력도 꽤나 커진 터였기에 그 위치를 숨길 수 없는 상태가 되었지만, 소수민족들의 힘은 결코 얕볼 만한 것이 아니다. 어지간한 대문파 이상의 힘과 규모를 갖게 되었기에 개방과 하오문 등 정보집단뿐 아니라 다른 정과 사의 대문파들 역시 그들에게 관심을 가졌고, 줄을 대려하는 중이었다.
‘바보 같은 일이지. 그냥 부딪히면 될 것을.’
참으로 바보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천화와 설영처럼 그들의 문화를 조금만 연구하면 아주 쉽게 전사의 칭호를 받고 친구가 될 수 있을 텐데.
‘흑점도 한번 찾아봐야겠군.’
때문에 걱정은 없었지만 곧 녀석과 정한 만기일이 돌아올 터였다. 칠성신단을 담보로 빌려주었던 돈을 갚기로 한 날은 이미 지났지만, 그쪽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는지 좀 더 미루자는 연락을 받았던 것이다. 원래의 날부터 반년 뒤. 이제 서너 달쯤 후에 다시 만나기로 했지만, 칠성신단은 진작 먹어치워버렸으니 대신할 뭐라도 쥐어줘야겠지. 사문의 보물인 만큼 무엇을 주어도 만족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렇기에 밑작업으로 슬쩍 이런저런 지원을 해주었던 것이다.
‘어쨌든 귀중한 전력이니까.’
더구나 무신지로에서는 비무행에서 여러 무인들에게 칠성신단을 나누어주는 역할이었지만, 전체 줄거리 상으로는 자신이 칠성신단을 먹은 것으로 인정됐던 그다. 낭인왕이 되었던 그때의 무위를 갖추려면, 어쨌든 칠성신단이나 그에 준하는 영약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수련이야 어디서든 할 수 있지만 내공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이번 일이 끝나면 한번 흑점을 찾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흑우를 더욱 재촉했다. 광서성을 지나 귀주성으로 들어섰다.
“여기도 꽤 오랜만이네.”
처음 천화와 설영이 만났던 곳. 남만에서 빠져나오며 한 번 거치기는 했지만 그때도 바쁘게 움직이느라 스치듯 지나간 게 전부였다. 그렇기 때문인지 설영이 어딘지 그리운 표정을 지었다. 혈마의 후예라는 이유로 쫓겨다니다가 천화를 만나고 몇 번이나 위험에 빠졌던 곳이었지만, 이제 혈마검이라는 굴레이자 족쇄를 벗어던졌기 때문인지 홀가분해진 모습이었다. 여유롭게 추억을 하며 지나칠 수 있었다.
“흑우, 천천히 가자.”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귀주성의 초입까지는. 그러나 귀주성의 성도인 귀양에 도착했을 때, 느긋하던 천화의 눈빛이 달라졌다. 주변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들이 감지되는 것이다.
- 천화, 이거 혹시?
경지가 오른 까닭인지 설영도 거의 동시에 그들을 알아차렸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태연한 척 은밀히 전음을 보내 천화에게 확인했다. 귀주성이 원래 지배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가 없는, 그래서 더 치열하게 움직이는 곳이라지만, 지금 그들을 둘러싸고 움직이는 이들의 기운은 심상치 않은 것이다. 그래봤자 일류와 절정급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지금 그들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가를 생각하면 방심 할 수 없었다. 음식에 독을 타든, 함정을 파놓든, 암기를 날리든 그도 아니면 대놓고 산공독을 뿌려댄 뒤 덤벼들든 무엇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놈들이니까. 더불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 누가 시비를 걸지 못할 테고.
“쀼우?”
겉으로는 화기애애한데 묘한 기세 싸움이 시작되자 은룡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짓을 하든 이제 소용없을 테지만.’
그 귀여운 모습에 천화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사천당문의 소가주인 당문악이 가지고 있던 모든 독을 정화시켜버린 바가 있는 은룡이다. 이 녀석이 있는 이상, 최소 장로나 가주급은 되어야만 자신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겠지. 어쩌면 그들이 다루는 특수한 독들조차도 영향을 줄 수 없을 테고.
이번 참교육의 일등 공신이 될지도 모를 은룡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천화가 객잔에 방을 잡았다.
‘쫙 깔아놨구만.’
기묘하리만치 아무도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 그것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졌다. 보통 사람이 들어오면 아무 이유가 없더라도 몇 명쯤은 돌아보는 것이 정상이니까. 즉, 여기 미리 앉아 대기하고 있는 이들은 모두 사천당가와 관련 있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물론 귀주성에서 그들에게 앙심을 품은 사람이 이들만은 아니겠지만, 그때도 천화의 상대가 되지 못했는데 지금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까. 사실상 전원이 사천당가의 소속이라고 보는 것이 옳았지만, 천화는 덤덤하게 음식을 주문하고 방을 잡았다. 언제 수작을 부려올지 알 수 없지만 언제라도 상관없다. 얻어맞는 시간만 빨라질 뿐이니까. 마침 참교육용으로 남해도에서 구해온 무기도 하나 있으니 간만에 땀 좀 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