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독사 사냥 (2)2022.02.10.
‘이 새끼들 봐라?’
천화의 예상과 달리, 식사와 술에는 약간의 독도 들어있지 않았다. 밤을 보내는 동안에도 마찬가지. 보통은 문틈으로 슬그머니 하독을 하거나, 이미 침구 등에 독을 바른 방으로 인도하기 마련인데 아무런 시도도 없는 것이다. 설마 잘못 본 것일까? 그럴 리가. 지배력을 행사하는 대문파가 없는 대신, 수많은 무인들이 드나드는 귀주성이라지만 저만한 실력자들이 그냥 모일 리가 없다. 그런 이들을 자신이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리도 없고. 그들이 천화의 무위를 어느 정도라고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편적인 소식만 듣더라도 최소 절정 이상이라는 것은 알 수 있을 테니까. 덕분에 설영은 신경을 쓰느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피곤한 모습이었고, 천화는 자신의 감각을 믿고 나름 편하게 잠이 들었지만 일어나 아침을 먹으면서도 찝찝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생각인 거지? 일부러 이러는 건가?’
분명 뭔가 있는데 의도를 알 수 없으니 영 거슬렸다. 심리적인 압박감을 주어 정신을 갉아먹으려는 속셈인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감시를 위해 자신들의 곁을 맴도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마음에 들지는 않는군.’
하지만 상대의 의도대로 움직인다면 천화가 아니다. 아침을 거하게 먹은 천화는 즉시 객잔을 떠났다. 흑우에 올라탄 채 여전히 의도를 드러내지 않는 이들을 힐끔 쳐다본 뒤, 씨익 미소를 지었다.
“흑우야, 달려.”
투다다다다다다다다다- 신법을 전문으로 익힌 절정 고수라 해도 그만한 속도를 낼 수 있을까? 이 속도에 따라붙으려면 최소 최절정급의 고수는 되어야 할 터였다. 그리고 사천당문이라 하더라도 그만한 고수는 많지 않았다.
“엥? 이것들 봐라?”
그렇게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다음 마을에 도착한 천화가 눈에 이채를 띄었다. 이곳에도 마찬가지로 사천당문의 소속으로 보이는 인물들이 상당수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예상 동선에 따라 대기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마땅했다.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건가?’
이번에도 역시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을 볼 때, 자신이 과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딱히 사천당문이 기다릴 만한 존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시기에는 뭐가 없던 것 같은데?’
사소한 것 하나를 꼬투리잡아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괴롭히는 사천당문의 행태를 생각할 때, 자잘한 시시비비야 늘상 있는 것이지만 이만한 인원을 투입할 만한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지간한 자들이야 슬쩍 독을 먹이거나 뿌려대기만 해도 보통 해결이 되니까. 덕분에 의아해지기는 했지만,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 놈들이 노리는 이가 자신들이 아니라는 보장 또한 없으니까.
‘확인해보면 알겠지.’
살짝 의뭉스러웠지만 천화는 이번에도 태연하게 행동했다. 거리낌 없이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신 뒤 다시 길을 떠나 어스름이 깔릴 즈음에 다음 마을에 도착했다.
“잠깐만 다녀올게.”
설영과 흑우, 은룡을 놔두고 야음을 틈타 몰래 객잔을 빠져나왔다. 그를 알아차리고 따라붙는 인원들이 있었지만 그래봤자 경지의 차이가 현격하다. 은잠무영보까지 펼쳐내자 기척이 지워졌고, 반각도 되지 않아 추격자들은 목표를 잃어버렸다.
“별거 아니었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하오문의 지부였다. 천화가 이곳으로 올 것을 예상했는지 주변에 감시의 눈들이 깔렸지만, 그들을 속이는 것쯤은 천화에게 일도 아니다. 악마칠음을 응용하여 자신이 있는 곳이 아닌, 다른 방향에서 소리가 나도록 주의를 끌고 은밀히 잠입해 정보를 얻어낸 것이다.
“……그렇게 보시기에는 좀 어렵지 않겠습니까? 성취가 제법 있던 모양입니다만.”
사천땅이 사천당문의 앞마당이라지만 하오문은 제법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한마디에 하오문의 지부가 폐쇄될 수도 있지만, 지부야 새로 만들면 그만이고 드러난 지부 이외에도 하오문도들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 중에도 많았으니까. 그들이 가져온 정보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의문을 해소해주었다. 사천독룡 당문악. 지난 비무대회에서 은룡에 의해 독이 무력화되며 처참하게 패배한 후 폐관에 들어갔다 알려진 녀석이 폐관을 끝내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아마도 쫙 깔린 저들은 당문악이 도착하기까지 자신들을 감시하고, 붙잡아두기 위한 역할이겠지.
“그래봤자죠, 뭐.”
“독인이 되었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이제야 좀 홀가분하다는 표정을 짓는 천화와 달리, 하오문의 지부장은 걱정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독인. 몸속에 흐르는 혈액조차 치명적인 맹독으로 바뀐다는, 독을 다루는 이들의 최종 형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당문악이 완성했다면, 아니 발이라도 디뎠다면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닐 터였기에 천화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인룡단주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그나마 괜찮았겠지. 그렇다면 당문악이라 할지라도, 사천당문이라 할지라도 쉽게 행동하지 못할 테니까. 인룡단은 정파 연합의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였고 당문악 역시 자의든 타의든 그곳에 속해있었다. 그러니 천화를 무턱대고 공격하는 순간, 정파 연합이라는 틀이 깨어질 수 있기에 경거망동하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천화가 스스로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간 지금이라면? 당문악이 무슨 짓을 하든 덮을 수 있을 터였다. 특히나 사천땅에 들어온 상태라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겠지. 여차하면 귀주성에서 천화를 제압한 뒤, 사천성으로 끌고 들어가 처리를 할지도 몰랐다.
“그럼 안 자르고 쥐어패면 되겠네.”
작정하고 덤비는 거면 어디 한 군데 슥삭 잘라줄까 생각했는데, 독인이 되었다면 자르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 이미 백독불침의 몸이 된 것은 물론이요, 천화만변무상심법도 경지에 올라 어지간한 독들은 몸속에 들어오더라도 밀어낼 수 있게 되었지만, 독인의 혈액은 주위를 초토화시킬 수 있을 만한 것이니까. 자신이 아니라 민간의 희생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하아……. 알아서 하십시오.”
너무도 명쾌한 천화의 해법에 지부장을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미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오문주의 애제자인 추가연이 특별히 신경을 쓰는 인물이니 최대한 피할 수 있도록 도우려 했지만, 본인이 저렇게 나온다면야 어쩔 도리가 없다. 가만히 주시하고 있다가 뒷수습이라도 해보는 수밖에.
“애들 준비시켜. 최악은 막아야 한다. 만약 저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고개를 가로젓던 지부장은 따로 마련된 비밀 통로를 통해 천화를 내보내주고 나름대로 대비를 시작했다. 만약 그가 죽게 된다면, 혹은 폐인이 된다면 추가연의 반응도 반응이지만 도왕과 세외가 움직일 테니까. 차라리 다른 중원의 문파들과 연이 있는 것이라면 조용히 덮어질 수 있겠지만 도왕은, 세외는 설령 이미 목숨을 잃었다고 친구를 외면하는 이들이 아니니까. 또한, 사천당가는 그런 앞뒤를 재며 움직이는 자들이 아니니까. 최악의 경우, 마교와 일전을 벌이기 전에 중원이 세외와 일전을 벌이게 될지 몰랐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촉각을 곤두세우도록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아무리 천화와 설영이 강하다 해도 후기지수일 뿐이라고, 아직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쩔 셈이야?”
“기다리지 뭐.”
다시 객잔으로 돌아온 천화는 설영의 물음에 태연하게 대꾸했다. 자신을 만나러 오고 있다면, 기다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니까. 다만 민간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사람이 많지 않은 작은 마을에서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가볍게 제압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저들이 주력으로 사용하는 것이 독과 암기인 만큼, 상황에 따라서는 불필요한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괜찮겠어?”
“안 괜찮을 것도 없지 않나? 덕분에 귀찮은 수고도 덜 수 있을 테고.”
어차피 사천당문으로 향하던 중이었으니, 그들이 먼저 와준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소가주인 당문악을 제압해낸다면, 이후 사천당문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당가로 향하는 동안 귀찮은 일들이 꽤나 생겨날 것이라 예상했는데, 인질을 잡고 간다면 그 수고를 덜 수 있을 것이다.
“어디, 독사 사냥을 시작해 볼까?”
때문에 오히려 잘됐다는 반응을 보이며 천화가 작전을 설명했다. 딱히 작전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간단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
“정말 저기 있다고? 비밀 통로 같은 게 있는 건 아닌가?”
벌써 수백 년째 오대세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천당문의 적자이자 한때 오룡이화라 불리던 무림 최고의 후기지수 중 한 명이 가문의 식솔들을 데리고 어딘가에 도착했다. 뒤로는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제법 넓고 깊은 강을 두고 있는 작은 오두막에 그가 노리는 대상이 있다는 사실이 뭔가 석연치 않은 듯, 이마를 구기며 수하를 돌아보았다.
“예. 파악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혹시 몰라 산 뒤편에까지 아이들을 풀어두었으니, 도망친다면 즉시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좋게 말하면 배산임수의, 풍수지리학적으로 살기 좋은 집의 위치였지만 자신들이 쫓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닐 텐데도 저처럼 스스로 독 안에 든 쥐가 되는 위치를 찾은 것이 영 찜찜했다.
“좋아. 그럼 시작해라.”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신들은 사천당문의 정예들이고, 곧 상대는 목숨을 구걸하며 밖으로 기어나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풀어라.”
하독이 시작되었다. 굳이 당문악이 나서지 않았지만, 그와 함께 온 사천당문의 정예들이 소매를 펄럭거리며 첫 번째 독을 풀었다.
“…….”
“…….”
“반응이 없습니다.”
오두막집에서 꽤나 떨어진 곳이지만 제대로 독이 풀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 주변에 피해를 입히지 않기 위해 독을 한 위치로 집중시켜야 하는 상태라면 모를까, 이 같은 개활지에서는 전력으로 독을 풀어낼 수 있었으니까. 백장, 아니 그 이상의 거리에 상대가 있더라도 확실하게 중독시킬 수 있는 하독술을 익힌 자들 수십이 동시에 독을 푼 것인 만큼 확실하게 독이 전해졌을 텐데도, 오두막에서는 어떤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정도에 굴복하면 재미없지. 다음 독을 풀어라.”
하지만 당문악은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았다. 처음에 푼 독은 가벼운 것이니까. 아직 상대를 괴롭힐 만한 독들은 얼마든지 있었고, 애초의 목적 또한 그들을 천천히 고통 속에 파묻는 것이었다.
“하독하라.”
그의 지시에 따라 당가의 고수들이 두 번째 독을 풀었다.
“…….”
“…….”
“계속할까요?”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 두 번째 독을 풀고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오두막에서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얼마나 버티나 보자. 계속해.”
세 번째, 네 번째 독이 순서대로 하독되었다. 점점 강도가 높아지기도 했지만, 순서에 따라 풀린 독들은 복합독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하나만 흡입해도 위험하지만 둘, 셋이 중첩될수록 그 효과가 배가되는 치명적인 독이었다. 함께 흡입할수록 강해지는 독인 만큼, 해독하기도 어려워지니까. 그런 것들이 겹겹이 쌓여 오두막과 그 주위를 덮었다. 하지만 여전히 오두막 안에서는 별다른 기척이 일어나지 않았다. 숨을 삼거나 내기를 이용해 독을 차단하고 버티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인 이상, 숨을 쉬어야 하는 이상 이 정도면 슬슬 중독 증상이 올라올 때가 되었음에도 조그만 기척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저 안에 있는 게 확실한가?”
무려 여섯 가지 독을 뿌려댈 때까지도 아무런 기색이 없자 당문악이 인상을 구기며 수하를 쏘아보았다. 이 멍청한 놈들이 놓친 것은 아닐까? 당장 객잔에서도 밖으로 나서는 놈을 한 차례 놓친 바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예. 아마도…….”
이쯤 되자 수하들의 보고에도 자신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저 안에 목표물이 없다면? 지랄맞은 당문악의 성질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암담해졌다.
“부숴라.”
“예?”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말하게 할 셈인가? 마지막 독을 하독하고 저 오두막을 부수란 말이다. 안에 놈들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때 당문악이 결정을 내렸다. 마지막 일곱 번째 독을 푸는 것과 동시에 오두막을 파괴하여 놈들의 모습이 드러나게 하라는 것이다. 안전한 하독을 위해 백 장 이상 거리를 벌리고 있는 탓에 검기나 검강을 날리는 것은 어렵겠지만, 발사기를 이용한 암기들이라면 어떻게든 닿을 것 같았기에 수하들은 즉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준이 쉽지는 않겠지만 여기서 토를 달면 당문악이 패악질을 부릴 테니까. 즉시 하독을 지시했고, 휴대용 대포처럼 생긴 발사기를 조준했다. 이미 크기에서부터 암기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뭐에 당한지 모르고 죽으면 그게 암기이니 상관없겠지.
“쏴라!”
투앙-! 잠시 후, 발사기에서 투사체가 발사되었다. 폭발과 동시에 독을 퍼트리는 철독환이라는 특수 병기가 오두막을 향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