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초보아빠.
내 음악적 감각에 계속해서 놀라는 어린 선생과 놀아주기 시작하자,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시윤아! 아빠 왔다!"
나는 피아노를 치다가, 입구를 힐끔 쳐다보았다.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 감격한듯한 표정을 짓는 아빠.
나는 그런 아빠의 모습을 보다가, 귀찮아서 손을 대충 흔들었다.
어느새 강아지처럼 내 옆으로 다가온 아빠.
"시윤아 재밌었어?"
"아니."
아빠는 내 반응에 익숙해진 듯, 자연스럽게 무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나만 바라보던 아빠는 피아노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당장이라도 치고 싶어 안달 난 것처럼 보였다.
"....."
내가 누르고 있던 건반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아빠.
"아빠도 피아노 되게 잘 치는데... 시윤이가 원한다면... 보여줄까?"
나는 아빠를 쳐다보다가 건반 위의 손을 살짝 뗐다.
"해 봐."
장난감 피아노이지만, 떨리는 손가락으로 건반을 만지는 아빠.
검지로 건반을 누르자, 전율이라도 느끼는 듯 손가락이 더욱 떨린다.
빠르게 한 번씩 눌러본 아빠는 평소 나를 보는듯한 행복한 표정으로 피아노를 바라봤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멜로디, 장난감 피아노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아름다운 멜로디가.
어린이집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장난감 피아노 소리를 따라 홀린 듯 선생들과, 꼬맹이들 할 것 없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빠는 나와 피아노를 번갈아가면서 보며,절정에 가까운 행복을 두 눈앞에 보고 있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인정하게 되었다.
가족이 없던 내가 '가족'이라고 여기며 키운 아이들,
그렇지만 결국 나 때문에 죽었어야만 했던 이들.
내가 이들을 키우며 느꼈던 감정에 비추어보았을 때,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초보 아빠는...
나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들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다는 듯이 행동하며,
조그맣고도 어린 핏덩이를 위해,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하고 싶어 하던 일을 4년간 포기했다.
인정한다, 49년을 살았던 내가 인정하겠다.
내가 하지 못했던 일을 하고 있는, 진정한 '아버지'다.
지금 이 순간, 아니 저 어린 남성이 보여주는 모든 것들이...
진정한 의미의 '가족'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지금도 피아노와 나를 번갈아보며, 진정한 행복을 깨우친 듯 웃고 있는 아빠가 말했다.
"아빠 짱이지?"
나는 피식 웃으며, 나를 위해 4년 가까이 희생한 아빠에게 작은 보답을 하기 위해 건반에 손을 얹었다.
동영상처럼 틀어지는 기억의 필름을 따라가며, 아빠가 눌렀던 건반들을 느리지만 정확하게 처음부터 순서대로 눌러보기 시작했다.
놀람과 경악스러움이 섞인 아빠의 반응을 무시한 채, 아빠가 연주했던 박자에 맞춰서 눌렀다.
"....."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다시 쳤을 때는, 아빠가 보여줬던 테크닉과 감정을 실어 넣어보았다.
"!!!"
황당한 표정으로 내 작은 손가락을 쳐다보는 아빠.
"뭐해?"
나는 비어있는 옆자리를 내주었고, 아빠는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 오른손위에 자신의 손을 얹는 아빠, 내가 남은 왼손으로 박자에 맞게 건반을 누르자,
아빠는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하며, 새로운 소리가 만들어졌다.
내가 누르고 있는 박자에 맞춰서, 자신의 기분을 피아노로 표현하는 아빠,
나를 보는 아빠의 얼굴에는, 피아노를 바라보았던, 행복하다는 표정이 지어졌다.
"짱이지?"
"응... 우리 딸 대단하네?"
나를 우주선처럼 생긴 차의 상석에 태운 뒤,
내 간식을 사주겠다는 아빠, 우리는 마트로 향했다.
"어린이집에서 뭐 했어?"
핸드폰을 만지고 있는 나를, 사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묻는 아빠.
"카메라로 봤다며."
하지만 내 대답에 아빠가 조용해졌다.
"....."
"나도 알고, 아빠도 아는 사실을 굳이 내 입으로 또 말해야 돼?"
"... 미안."
가족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나는, 신선한 감정을 느끼면서 이 초보 아빠를 놀리기 시작했다.
초보 아빠는, 내 말투를 받아주면서도 풀이 죽은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상대방은 상처를 받는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건지, 그 모습이 솔직하게 말하면 재밌다.
그리고 아마도... 내 생각이지만... 저 초보 아빠도 즐기고 있었다.
'취향 참...'
내 모습에 엄마가 생각이 나는지, 처음엔 숨어서 많이 울기도 했지만,
요즘은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주로 보인다.
마트에 도착한 뒤,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착용한 아빠는 나에게 전용 마스크를 씌워줬다.
"답답해"
"하지만 이걸 착용해야 사람들이 못 알아볼걸?"
"알아보면 어때서?"
아빠는 나를 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시윤이는 모르겠지만, 유명해지면 엄청 힘들어~"
나는 아빠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맨날 집에 있으면서?"
"... 음... 밖에 잘 안 나가게 되는... 거겠지?"
"뭐래 나 때문에 안 나간 거였으면서"
"....."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뭐... 그래도 힘들어 보이긴 하네~"
"... 아... 아빠 힘들어 보여?"
나는 카시트가 설치되어 있는 상석에서 내리려고 했지만,아빠가 나를 들어 올려 자신의 품에 안았다.
"편안하구만~"
"모시겠습니다 공주님~"
"그래, 어서 가자꾸나. 내 오늘은 짭조름한 과자가 당기니."
"아하핳"
나는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듯, 쇼핑카트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와..."
'세상 참 좋아졌네...'
내 표정에 장난기가 생긴 아빠가 나에게 말했다.
"시윤이 신기해?"
"응."
나는 또래의 아이들처럼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저건 뭐야?"
아빠는 하나하나 설명해 주기 시작했고,
주변의 눈치가 보이는지 어느새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영어를 쓰는 아빠를 보며,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과거, 내가 쓰던 영어 발음은 갱단의 말투와 비슷했다.
용병을 뛰고 있을 때, 적응하기 위해서 배운 영어,
"Holy shiiiiiit, So Amazing bro"
"... 딸?"
"Oh my gosh... What the fuck is that... !?"
"....."
아기천사같이 귀여운 외모를 가진, 4살 여자아이의 입에서 나온 감탄사는
아빠를 부끄럽게 만들기엔 더할 나위 없었다.
"일부로 그러는 거지...?"
"응."
아빠는 내 영어의 출처를 '영화리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고, 나에게 물어보았다.
"...영화에서 본거야? 무슨 뜻인지는 알아?"
"모를까 봐?"
"...아빠는 우리 딸 이쁜 말 쓰는 게 좋은데..."
"알았어~"
우리는 각종 고기와 햄, 소시지, 야채들과 과자를 더 담은 뒤에 계산대로 다가갔다.
"어...? 혹시..."
아빠는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조용히 말했다.
"계산해주세요."
"아! 네..."
내가 밑에서 멀뚱멀뚱 쳐다보자, 아르바이트생이 나를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너무 이쁘다~ 이름이 뭐니?"
"검색해보면 나올걸요?"
"... 어?"
나는 힘겹게, 계산대 위의 과자 봉투를 아빠에게 넘겼다.
아빠가 자연스럽게, 과자 봉투를 뜯어서 나에게 줬다.
"어른한테 예의 있게 행동해야지~"
"그럼 아빠 이름도 떠들고 다닌다?"
"....."
"안아 줘."
내가 팔을 벌리고 있자, 아빠는 나를 들었다.
아빠의 팔은 승차감이 좋다.
나는 마스크를 내리며, 과자를 하나씩 집어먹었다.
"시윤이에요, 어디 가서 얘기하면 아빠가 나 숨길걸요?"
"... 그렇구나..."
"아빠 힘들었던 거 알죠? 잘 부탁드려요~"
"응!"
아빠는 나를 보며 피식 웃었더니, 아르바이트생에게 말했다.
"혹시... 사인해드릴까요?"
"허억! 진짜요?"
작게 말하는 아르바이트생이 빠르게 자신의 노트를 꺼냈다.
날짜를 적고, 사인을 끝낸 아빠.
"나도 해줄까요?"
"진짜!?"
아빠가 그런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 김지호의 딸 김시윤 싸인★.
나는 감격해하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손 인사를 하면서 말했다.
"나중에 저 유명해지면 사인 받은 거 자랑해도 돼요."
"꼭! 그렇게 할게."
나는 쿨하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가! 다음에 또 와~"
아빠는 처음에는 애매모호한 표정을 짓더니,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집에 가서 맛있는 거 해줄까~?"
"응.
나를 품에서 놓지 못하는 아빠에게 말했다.
"나를 내려놓고 짐을 들지?"
"너무 많이 샀나 봐... 어떻게 하지?"
내 말을 무시하며 나를 꼬옥 안은 채, 고민을 하는 아빠에게 말했다.
"나 내려놓으라고, 잘 따라갈게"
"....."
한자리에 서서 15분가량을 고민한 아빠에게 말했다.
"오줌 마려."
"어?"
"쉬 마려 내려줘, 여기에서 싼다?"
아빠는 나를 빠르게 내려주고 짐을 들었다.
오줌이 마렵다는 말로 초보 아빠의 고민 시간을 줄일 수 있었고.
우리는 빠르게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양손에 한가득 짐을 들고 있는 아빠.
"다음에 또 나오면 되지 왜 이렇게 많이 산거야?"
"김시윤, 대부분 너가 사자고 한거잖아..."
"그래서 나 때문이야?"
아빠는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아니..."
"나는 어려서 조절 못하는데, 아빠가 못 사게 해야지."
"그치..."
엘리베이터 동승자인 내가 모르는 여학생이 우리의 부녀의 모습을 보며 키득거렸다.
"어머~ 너무 이쁘다."
"알아요."
"그래? 예쁜 것도 알고, 똑똑하네?"
"그것도 알아요."
"그럼 모르는 게 뭐가 있을까?"
나는 슬슬 이 여학생이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음... 엄마 얼굴?"
"어... 어? 미... 미안..."
내가 말싸움하기 귀찮다는 듯이, 탈룰라를 시전하자 바로 백기를 든 여학생.
아빠가 당황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뭐."
"아... 아니야."
집에 도착하자 아빠가 짐을 내려놓고 나를 씻겼다.
"시윤아, 오줌 마렵다며."
"응, 거짓말이야."
"....."
소파에 앉아있는 나를 보더니 옆에 앉는 아빠.
"딸."
"응?"
"엄마 보고 싶어?"
"딱히?"
내가 엘리베이터에서 어린 학생에게 한 말이 계속 신경 쓰였는지,
아빠는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
"할 말 있으면 해."
"... 아빠가 미안해."
나는 말을 돌리는 아빠에게 말했다.
"힘들면 울어도 돼, 숨기지 말고"
"우리 시윤이는... 똑똑하고, 착하네..."
아빠는 내 모습만 한참을 바라보다가, 혼자 무언가 결심을 했는지,
2층으로 올라가서 먼지가 가득한 상자를 꺼내왔다.
그리고는 오랜 시간 가만히 서서, 상자를 바라본다.
아빠의 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복잡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러다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수건으로 상자를 닦아서 가져온 아빠.
그리고 상자를 열어 나에게 건넸다.
"이거 우리 시윤이 엄마가 사용하던 거야.”
나는 흥미가 생겨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사진을 보는 그 모습을 보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초보 아빠.
"아빠가 보여줘, 사진 무거워."
"... 응."
아빠는 나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더니, 사진을 꺼내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행복하게 웃고 있는 둘의 모습, 서로 어렸을 때부터 사귀었는지, 어린 아빠의 더 어렸을 때의 사진들이 가득했다.
아빠의 군대를 기다리는 모습부터, 나를 가지게 되어 행복해하는 모습까지 있었다.
서로의 공연을 지켜보는 모습, 엄마 또한 연예인이었다.
사진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내 머리 위로 아빠의 눈물이 떨어졌지만, 모른척했다.
"예쁘네."
아빠는 잠기고 떨리는 목소리로, 내 말에 대답해 주었다.
"그치...? 엄청... 예쁘지?"
"응. 나만큼 예쁘네."
내 반응에 아빠는 눈물을 흘리며 억지로 웃었다.
한동안 사진을 바라보던 아빠, 나는 옆에 있던 수첩을 꺼내서 펼쳤다.
엄마의 일기로 보이는 물건.
- 또 내 일기 훔쳐보면, 깨문다?
일기에 적혀있는 글귀, 말 그대로의 의미가 담겨있는 글.
머리 위로 떨어지는 굵은 눈물방울로 인해, 나는 아빠를 쳐다보았다.
아빠는 떨리는 손으로 나를 옆에 내려놓고서, 가슴이 답답하다는 듯이, 자신은 도저히 견디기 힘들다는 듯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떨리는 아빠의 울음소리.
아빠를 바라보다가 나는 아빠에게 얼굴을 내밀고, 옅게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도 사진 찍어서 넣어놓을까? 엄마가 볼 수 있게."
눈앞에 흐느끼고 있는 이 어린 초보 아빠는 떨리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눈물과 콧물이 가득한 얼굴로, 가능한 밝게 웃으면서 나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
"응... 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