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중매 (1) >
나는 인적 없는 새벽의 공원에서 염력을 단련하고 있었다. 어제 일로 나는 정식으로 흑패 소유자가 되었고, 덤으로 금예린에게 받은 팔찌까지 녹염령주로 진화시킬 수 있었다. .
<마인드맵 확장 : 동기화 Lv.1>
또 하나의 수확은 흑패 퀘스트의 보상으로 얻은 이 능력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내 방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 주변의 풍경이 머릿속에 비추어졌다.
동기화. 다른 물건의 내부에 나의 념을 심어,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 내 정신과 이어져있는 상태로 만들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선도부실의 물건 하나를 나와 동기화해두면, 멀리서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대화를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 한 물건에밖에 못하는 게 흠이긴 한데.’
또한 내 염력의 일부분을 계속 물건에 묶어둬야하기에, 쓸 수 있는 힘이 조금 줄어든단 문제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활용할 여지가 많은 능력이었다. 정면 승부로 혼혈들과 싸우는 건 아직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이런 잔재주가 중요했다.
그리고 나는 손목에서 은은히 빛나는 팔찌를 바라보았다. 금가의 가보였던 홍원령주가 변화해 생겨난 아이템. 이번 일로 얻은 최대의 수확은 바로 이 녹염령주라 할 수 있었다.
<마인드맵 확장 : 염동력 Lv.5>
내가 위쪽으로 손가락을 까닥이자, 염동력이 바닥에서 돌을 들어올렸다. 떠오른 돌멩이는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총합 다섯 개의 커다란 돌멩이들이 역장에 감싸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각각 다른 방향으로 회전하며 내 주위를 춤추었다.
사실 여러 개의 돌멩이를 띄워올리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그것들 각각에 이렇게 개별적인 움직임을 갖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전혀 다른 작업들을 동시에 처리하는 것과 똑같다. 내 정신에 걸리는 부하가 너무 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와 감응하고 있는 팔찌가, 내 의도를 그대로 반영해 처리를 대신해주고 있었다. 머릿속에 고성능 계산기가 부착된 기분이었다. 이제 여러 물건을 동시에 제어할 때도 염력이 빠져나가는 것에만 신경쓰면 된다.
“가로로 정렬. 세로로 정렬. 하트. 십자.”
내 호령에 따라 주변에 떠있는 돌멩이들이 착착 움직이며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갔다. 이렇게 편해도 되는 걸까. 이전이라면 1번부터 5번까지 돌멩이 각각을 따로 신경쓰며 움직이는 힘이나 방향을 하나하나 고려했어야 했을 것이다.
“우리는 평생 가자.”
나는 사랑스러운 우리 팔찌의 표면을 손으로 쓰다듬었고, 내 의식과 감응한 팔찌가 우우웅 진동하며 공명했다.
그리고 적당히 몇 가지 기술들을 더 연습하고 있자니, 저편에서 아는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호랑이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건 배은호였다. 내가 새벽에 공원으로 나오라고 불러낸 거였다. 내 얼굴을 확인한 그녀가 우다다 뛰어와 소리쳤다.
“무슨 짓이야, 이 나쁜 놈아!”
선배가 내 멱살을 쥐고 어떻게 책임질 거냐 마구 흔들었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어제 선도부 쪽에서 씨앗 관련으로 조사를 들어가게 됐다고 솔직 알려주었다. 나는 후드가 늘어나도록 날 잡고 흔드는 선배를 내려다보았다.
“멱살?”
선배가 흠칫 내 몸에서 손을 뗐다. 지금 자기 생명줄이 누구 손에 쥐여져있는지 잠깐 잊고 있던 모양이었다.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었다. 사람이 뭘 좀 까먹을 수도 있지, 나는 잠깐 실수한 걸로 뭐라고 할 만큼 째째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깨를 부르르 떨던 선배가 내게 소리쳤다.
“···말 안 하겠다고 했잖아!”
“했잖아?”
“했잖아···요!”
배은호는 속 터져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2학년생 동기들도 수족처럼 부려대는 양반이 새파란 1학년한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려니 위장이 아파올 지경이겠지. 나는 배은호가 흐트러뜨린 옷매무새를 대충 정리하고 친근한 웃음을 지었다.
“장난이고요. 존댓말까지 쓸 필요는 없어요.”
“진짜지?”
“학교 선배한테 존대 들어봐야 기분만 이상하지.”
이건 진심이었다. 같은 학년은 물론 후배한테까지 존댓말을 쓰는 해괴한 말투의 보유자는 유설 하나로도 충분하고 넘쳤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옆에 선 배은호에게 말했다.
“일이 이렇게 돼서 저도 참 그렇긴 한데, 저쪽이 알아서 찾아낸 것까지 내가 막아줄 순 없잖아요. 어차피 걸릴 만한 건수는 벌써 다 정리했을 텐데 적당히 사리고 있어요. 이 정도로 덜미가 잡히면 솔직히 선배는 이용가치가 없는 거고.”
내 말에 뭔가를 느낀 건지 배은호가 미간을 좁혔다.
“···아예 아무 꼬리도 안 잡히면?”
“그럼 같이 뭔가를 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나는 허심탄회하게 생각을 밝혔다. 이건 하나의 테스트였다. 배은호가 선도부에게 마킹을 당하고도 이번 건을 완전히 은폐할 수 있을지. 그게 가능할 만큼 신중함과 수완을 갖추었다면, 앞으로도 충분히 뒤쪽의 서포트를 부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마 배은호는 성공적으로 도망칠 것이다.
산군 혼혈이라는 혈통답지 않게 배은호는 뼛속까지 장사치였다. 정말 위험하다고 느꼈다면 나한테 와서 이러는 게 아니라 이미 잠적을 했겠지. 어차피 지금도 괜히 엄살을 피워 나한테서 뭔가를 뜯어내는 게 이득이라 판단한 것일 뿐이다.
나는 다 알고 있다는 듯 웃으며 선배에게 말했다.
“호랑이굴 후계자 정도론 만족 못하죠? 선배도 욕심이 많잖아요. 세한에서 저런 미친 짓을 벌이려 했을 만큼.”
“······.”
“불만이면 그거 부수고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도 돼요.”
난 주머니에서 USB 메모리를 꺼내 배은호에게 휙 던졌다. 그 안에 든 게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이다. 저것은 USB 모양을 한 대형 폭탄이었다. 선도부에 넘기기만 해도 배은호는 물론 호랑이굴 식구들까지 펑 터뜨려버릴.
열쇠고리에는 유성펜으로 두 글자가 쓰여있었다. 목줄.
맹세컨대 복사본 따위는 없었다. 아무튼 선도부장이 아주 작은 단서라도 사건의 냄새를 맡은 건 내 불찰이니, 배은호 선배가 해방을 요구한다면 그냥 정말 들어줄 생각이었다.
몇 초 뒤, 그녀가 내게 다시 USB를 던졌다. 손바닥으로 툭 받은 내게 배은호가 고개를 돌리고 운동복 후드를 덮어썼다.
“조용해지면 내 쪽에서 다시 찾아오겠어.”
나는 손을 흔들어주며 대답을 대신했다. USB를 다시 주머니에 넣자, 배은호는 조용히 왔던 길로 돌아가 사라졌다.
‘이게 맞아.’
흔적을 지우거나 현장을 통제할 땐 배은호만큼 믿음직한 사람이 없었다. 약점을 잡았으니 내 말에 따라라, 따위의 말로는 결국 그 정도 도움밖에 받을 수 없다. 정말 제대로 협력관계를 구축하려면 상대방에게도 이득이 되어야 했다.
나는 천천히 캠퍼스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아침부터 교실은 북적이는 분위기였다. 이제 슬슬 반 애들끼리 안면을 트고 패거리가 형성돼, 같이 어울려다니는 놈들은 자연스레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
앞쪽에서는 진소란이 금예린의 책상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나한테 필승법을 전달받았으니 이번에야말로 금예린의 목에 패배자 팻말을 걸어주겠단 거겠지. 진소란이 대련을 신청하자, 금예린이 입가에 부채를 펼쳤다.
“싫은데요?”
당연하다는 듯 거절당한 진소란은 돌처럼 굳었다.
“어, 어째서지!”
“솔직히 시시하고···. 당신이랑 대련해서 얻을 게 없어요. 매일 친선전 심판 서주시는 교수님한테도 민폐고요.”
“이번엔 정말 이길 수 있단 말이다! 겁먹은 거냐!”
“네, 네. 겁먹었답니다. 생각보다 너무 약해서.”
그리고 과장하며 하품하는 손짓을 한다. 역시나 사람 속을 살살 긁는 데엔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진소란은 뭐라 대꾸하지도 못하고 꽉 쥔 주먹만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금예린의 대답은 척 봐도 거짓말이었다. 아마 내가 진소란에게 무언가 귀띔해준 걸 눈치챈 거겠지. 벌칙을 받고 있던 진소란이랑 찍은 인증샷을 올리기도 했으니. 내 생각대로 금예린은 다 알고 있다는 듯 이쪽을 슬쩍 쳐다보고 웃었다.
당신 생각대론 안 돼요. 금예린의 입이 소리내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호전적인 시선은 언제든 기회가 있으면 나를 무릎 꿇리고 말겠다는 결의로 불타고 있었다. 나는 솔직히 무서워서 슬쩍 눈을 피했다. 금예린의 뒤끝은 장난이 아니었다.
시간표를 확인하자, 1교시는 마력 제어 수업이었다.
‘제껴야겠네.’
나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간다, 하고 짝꿍 어깨를 쳤다. 차대엽도 내가 이 수업을 듣지 않는 걸 알기에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복도를 걸어 도서실에 도착하자 문은 이미 열려있었다. 안에서 책을 읽던 유매가 이쪽을 보았다.
“오늘도 평소처럼 실실대는 얼굴이네.”
“너는 얼굴 좀 펴고 다녀라.”
유매에게 기술을 지도해주겠단 약속을 한 뒤로 점심시간과 마력 제어 시간에는 이렇게 도서실에서 만나고 있었다. 나는 시비 거는 듯한 인사를 적당히 받아넘기고 자리에 앉았다. 딱히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쟤는 누구한테나 다 저랬다.
“그래서 감은 대충 잡았고?”
“아직은 힘들어. 실전에서 쓸 게 못 돼.”
유매가 자존심 상한다는 듯 살짝 미간을 좁혔다.
내가 지금 그녀에게 연습시키고 있는 건 유설의 마력중재에 대항할 필살기였다. 이른바 뜨개질. 두 가지 다른 형태의 마력을 겹쳐서 짜내는 것으로, 겉의 술식이 벗겨지는 순간 두 번째 주문이 메아리처럼 터져나오는 구조의 기술이었다.
말이 두 주문을 뜨개질처럼 짜는 것이지, 생각해야 할 요소나 주문을 구성하는 난이도가 두 배가 아닌 제곱 수준으로 늘어나기에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여겨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매에게는 가능했다. 애초에 뜨개질은 내가 생각해낸 발상이 아니라, 유매가 유설에게 한 번 된통 깨진 뒤에 스스로 파훼법을 떠올려 만들어낸 기술이었다. 계속해서 특훈한다면 결국엔 유매의 화력을 상징하는 필살기가 된다.
하지만 아무리 마력 제어에 괴물같은 재능을 타고난 유매라고 해도, 곧바로 성공시키기엔 무리가 있었다. 나는 최대한 게임에 나와있던 기술 설명을 풀어서 얘기해주며, 유매가 뜨개질의 이미지와 이론적인 틀을 갖출 수 있게 해주었다.
‘확실히 나 혼자 연습시키긴 좀 불편해.’
나는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유매가 끙끙대며 뜨개질을 시도할 때 옆에서 제대로 되고 있나, 어디 구멍이 나진 않았나 확인해줄 사람이 한 명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내 눈에는 마력 자체가 안 보이기에 그런 피드백을 해줄 수가 없었다.
한참을 집중하며 마력을 꿰어가던 유매가 이마의 땀을 닦았다. 언제나 찡그리고 있던 눈썹이 살짝 풀어진 걸 보니 그래도 웬만큼 감을 잡기 시작한 것 같았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유매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 쪽에 내밀었다.
“뭐야 이거.”
“도시락 값. 이 정도면 충분하지?”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이 녀석이 내 소시지를 다 털어간 날 이후로, 나는 도서실에서 혼자 밥 먹기도 좀 그래서 유매의 것도 같이 싸오고 있었다. 하지만 냉동식품 해동한 소시지에, 적당히 남은 것들로 만든 반찬에··· 심지어 밥까지 인스턴트였다. 도저히 돈을 받을 수 있는 퀄리티가 아니었다.
“아니 뭘 굳이 돈을 주냐.”
“나는 빚지는 거 싫어해.”
“필요 없거든요. 그냥 친구끼리 하는 일인데.”
물론 친구끼리 하는 일에도 받을 건 받는 게 맞지만, 이건 양심에 찔려서 못 받겠다. 그리고 나는 내심 안심했다. 도시락 먹을 때마다 똥 씹은 표정이길래 맛이 더럽게 없어 저러나 싶었는데 그냥 얻어먹는 게 불편해서 그런 거였나 보다.
그러자 유매는 또 확 눈썹을 찌푸리고 정색했다.
“···내가 너랑 친구라고? 언제부터.”
“그렇게 말하면 상처받거든? 그럼 모르는 사이냐?”
아무튼 돈은 못 받겠다고 하자, 유매가 순순히 봉투를 다시 집어넣었다. 무엇보다 돈을 받기 시작하면 유매의 온갖 반찬투정을 다 받아줘야 할 것 같다는 게 무서웠다. 입맛을 쩝 다신 나는 자리에 앉은 유매의 목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근데 그 사람은 왜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거냐? 궁금해서 그런데 좀 알려줘라. 나도 나름대로 협력자잖아?”
“참 남 일 참견하기 좋아하네. 원래 성격이 그래?”
“응. 내가 원래 좀 그래.”
나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요구했다.
실제로 과거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도 잘 몰랐다. 알고 있는 건 둘의 고향인 마녀골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 정도고, 정확히 어떤 연유로 유매가 유설을 적대하게 됐는지는 게임에서도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았다.
그러자 유매가 작게 짜증 섞인 한숨을 쉬었다.
“머리는 좋은 편 같고. 눈치가 없어 보이지도 않고. 그 얘기를 꺼내면 내 화를 살 거란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래서 얘기하기 싫으시다?”
“그래. 싫어.”
유매의 단호한 대답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로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런 거지 딱히 억지로 개인사를 캐낼 생각은 없었다. 더 이상 역린을 건드렸다간 진짜 화낼 것 같고. 조금의 침묵 뒤,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유매가 중얼거렸다.
“···니까. ······에는···.”
“뭐라고?”
내가 휙 고개를 돌리자, 뒤통수만 보이는 유매는 아무 말 안 했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손에 턱을 괬다.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중얼거린 소리였기에 뭐라고 말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건 나한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인드맵 확장 : 사이코메트리 Lv.4>
책상에 손바닥을 붙이고 방금 있었던 일을 재생한다. 눈꺼풀의 어둠 너머로 몇 초 전의 과거가 비쳤다. 유매가 조용히 중얼거렸던 말이 한 글자 한 글자 귀에 들어왔다.
“···그런 걸 궁금해하는 건 너 정도니까. 기분이 내키면 말할지도 모르지. 어쩌다 반찬이 맛있는 날에는···.”
눈을 뜨고 현재로 돌아왔다. 멍하니 입을 벌리던 나는, 나도 모르게 풋 웃음을 터뜨렸다. 휙 돌아본 유매가 이상한 인간을 보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야 눈 감고 있다 갑자기 혼자 웃는 놈을 보면 나라도 저런 눈으로 볼 것이다.
곤란하네. 무슨 반찬 좋아하는지 모르는데. 유쾌해진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도서실 자리에서 드르륵 일어났다.
“점심시간엔 안 올 거야. 오늘 할 일이 있어서.”
“뭐?”
유매가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다. 나는 유매 앞에 오늘 점심 도시락을 툭 건네주고선 도서실에서 나왔다.
* * *
오전 수업이 끝난 뒤 점심시간. 나는 2학년 건물 쪽을 서성이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다니는 선배들 중 선도부원인 몇 명은 내 얼굴을 알아보았다. 나는 적당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다, 마침내 교실 안에서 만나러 온 얼굴을 찾아냈다.
“잠깐 나와주실래요?”
유설 선배는 놀란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따라나왔다. 나는 그녀와 함께 인적이 없는 곳까지 느긋하게 걸어갔다.
이쯤이면 될 거라 생각하고 주변에 누가 없는지 확인했다. 이내 교복 안주머니에서 꺼낸 건 유설이 마력으로 각인해 밀봉해놓은 편지봉투였다. 내가 편지를 돌려받으라고 유설에게 내밀자, 불려나온 유설은 당황해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슨···.”
“유매는 선배를 박살내고 싶어해요.”
옆에서 알림창이 딸랑거렸다. 이 편지는 유매에게 건네서 읽게 만들어야 할 퀘스트 아이템이었다. 그래서 나는 유매가 이걸 읽게 만들기 위해 매일매일 도시락을 싸고 수다를 떨었던 건가? 유매와 가까워진 건 유설 선배의 부탁 때문인가.
그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 돌려주는 것이다.
“일부러 져주면 더 화낼 거라 생각하죠? 맞긴 한데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어요. 선배는 질 겁니다. 지지 않으려고 무슨 수를 써도 반드시 져요. 제가 옆에서 도와줄 거니까.”
조용히 편지를 받아든 유설에게 난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한 번 밟힌 다음에, 선배 손으로 직접 전해줘요. 한 번 화풀이해서 기분이 풀리면 읽어줄지도 모르니까.”
유설은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자기 부탁을 거절당해 실망한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편지봉투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조용히 쓴웃음처럼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한 걸음 다가온 유설이 기도하듯 양손으로 내 손을 잡아주었다.
“고마워요.”
“별 말씀을.”
나는 확실히 박살내드릴게요, 하고 안심하라 격려해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섬뜩, 등줄기를 달리는 것이 있었다.
<마인드맵 확장 : 초감각 Lv.4>
뭔가가 잘못됐다는 위기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뒤쪽으로 휙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야 미행 같은 게 있었다면 한참 전에 정신 감지로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직감은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번쩍 눈을 떴다.
<마인드맵 확장 : 투시 Lv.4>
역시나, 뒤쪽의 벽 너머에 무언가 날아다니는 것이 있었다. 나는 재빠르게 달려가 위화감의 정체를 확인했다. 코너를 돌자, 제어를 잃고 바닥에 구르고 있는 것은 수정구슬 형태의 마도구였다. 멀리까지 정찰을 내보내기 위한 눈의 대용품.
이 마도구를 사용한 것이 누구인가는 명백했다.
“아이고.”
나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대강 견적이 나왔다. 나는 유설에게 양해를 구한 뒤 1학년 건물을 향해 달려갔다. 계단을 올라 잠긴 도서실 문고리 위에 손을 얹으니, 또다시 등줄기에 어떠한 위기감이 달렸다.
조심스레 문을 열자, 도서실은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책장은 쓰러져 벽에 부딪혔고, 안의 책들은 바닥에 쏟아져 널브러져있었다. 점심식사였던 도시락도··· 바닥에 엎어져있다. 마치 이 안을 폭풍이 한 번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그리고 그 잔해들의 중앙. 책상 위에 유매가 조용히 서있었다.
“내가 미쳤지.”
머리 한구석에 달려있던 모자는 커다랗게 변형되어 유매의 머리 전체를 덮고 있었다. 모자 쪽에서 기분 나쁘게 끼릭끼릭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뒤돌아 나를 바라보는 유매의 표정은, 지금까지 보았던 인상 쓴 얼굴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모자의 챙으로 그늘진 얼굴에 보라색 눈이 빛났다.
“하필이면 그 여자의 끄나풀한테···.”
뭐라고 입을 열 틈조차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내 몸에 무언가의 힘이 작용해 도서실 가운데에 끌려갔다. 도서실 문이 쾅 닫히고, 소리도 마력도 외부에 전해지지 않게 차단됐다. 책상 위에 서있는 유매가 널브러진 나를 내려다봤다.
“···하긴, 그렇지 않으면 그리 실실대면서 나한테 접근할 리가 없지. 나답지도 않았어, 정말로.”
그리고, 공중에는 기묘하게 비틀려있는 모양의 송곳들이 하나둘씩 만들어져 정확하게 내 머리를 겨냥했다. 눈을 붉히고 있는 유매는 지금 당연하게 뜨개질을 성공시켰다. 그것도 운 좋게 하나가 아니라 연속으로 네 번의 뜨개질을.
“변명할 필요는 없어. 들어주지 않을 거니까.”
그것은 한없이 차갑고 경멸에 가득찬 음성이었다,
나는 입학한 뒤 처음으로 죽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 설중매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