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중매 (2) >
유매는 축복 속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정말 마력적인 축복을 받았다. 그녀를 수태한 가마솥에는 매일 모든 마녀들이 모여 주술을 행했고, 마녀골의 온갖 비의들이 유매의 몸 안에 이식되었다.
그렇게 태어난 건 역대 최고의 잠재능력을 지닌 모자령과,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마력을 제어하기 시작한 천재. 대마녀가 되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노마녀들은 자신들의 원수를 대신 갚아줄 존재의 탄생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너는 기적이란다.”
“우리의 희망···.”
“너라면 그걸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유매는 걸음마를 떼자마자 노파들의 지도 아래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유매가 태어나기 전부터, 마을 전체가 오직 그녀의 성장만을 위해 준비해두었던 과정이었다.
자신에게 쏘아지는 공의 방향을 바꾸는 훈련, 넘어진 뒤 즉시 마력을 이용해 일어나는 훈련. 마력을 흐트러뜨리는 가시밭길 위를 맨발로 걸어가는 훈련, 회초리질을 당하면서도 집중을 유지하는 훈련. 기절할 때까지 마력을 쓰는 훈련.
“모두가 기대하고 있어.”
“반드시 최고가 되어야 한다.”
“네 몸이라면 견뎌낼 수 있을 거다.”
복용할 온갖 시약과 휴식하는 방법 또한 정해져있었다. 어린아이인 유매였지만 훈련은 어떻게든 견딜 수 있었다. 정확히는 가까스로 견딜 수 있도록 훈련 내용이 조정되었다.
“일상생활, 양치, 호흡 전부 마력으로 해결하렴.”
“식기는 사용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더 이상 짜낼 마력이 없다고? 아직 기절하지 않았잖니!”
유매는 최대한 열심히 하려 노력했다. 유매에게 있어 마녀골은 세상의 전부였고, 노파들의 기대를 저버리기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매가 마음을 강하게 먹을수록 훈련은 점점 더 거세졌고··· 결국엔 더 이상은 싫다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나선 것이 바로 유설이었다. 언제나 훈련받고 있는 자신을 창가에서 내려다보던 언니. 예쁜 인형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전혀 다른 세상 사람이라는 듯 마음 편하게 책을 읽고 있던 사람. 대화를 나눠본 것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유설은 자기 능력을 마음껏 펼쳐보였다. 예전부터 이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단 것처럼. 자신과는 달리 우는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차분한 얼굴로 당연하다는 듯 모든 훈련에 성공했다. 노파들의 마음이 기우는 것에 긴 시간은 필요 없었다.
“재능에만 눈이 멀었던 거야.”
“아무리 자질이 넘쳐도, 의지가 없다면 소용이 없지.”
유매에게 매달린 지금까지의 자신들이 바보같았다는 듯이. 그런 말 한 마디를 남기고, 유매는 완전히 방치되었다.
마녀골의 누구도 유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다들 유설을 지도하고 보조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오로지 훈련만을 받아왔기에, 유매는 툭 하고 떠넘겨진 자유의 사용법을 알 수 없었다. 옆에서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계속 방 안에 혼자 앉아있었다. 책을 읽어보려 해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결국 유매는 유설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창가에 앉아 훈련받는 유설을 내려다보았다. 표정이 없던 얼굴에 점점 눈썹이 좁혀졌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듯한 생각이 들어, 가슴에 왠지 모를 분함이 피어올랐다.
하루하루가 지나갈수록 유매는 짜증이 많아졌다. 하지만 그런 짜증을 받아줄 사람도, 짜증내지 말라고 화내는 사람도 없었다. 언제나 회초리를 맞아서 싫어했던 식사 시간도 알약 하나로 대체되었다. 그 누구도 유매를 신경쓰지 않았다.
혼자가 되었다. 그런 말 하지 말걸, 하고 아주 조금 후회했을 때. 유매는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웃기지 마.’
유매는 가슴팍에 모은 손을 꽉 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나는 혼자여도 좋다. 저런 사람들의 관심 따위 필요 없다. 내가 질려서 버리고 나간 거지, 남한테 내 자리를 빼앗긴 게 아니다. 어른들한테 의지하지 않아도 난 최고가 될 수 있다.
‘저런 여자 따위···.’
언제부터인가 훈련하는 유설을 엿보며 복수심을 불태우는 게 유매의 일과가 되어있었다. 그 이외에는 딱히 할 것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유매는 언니가 기사가 되기 위해 학교로 떠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인사 따위는 딱히 하지 않았다.
그러자 유매는 할 일이 없어졌다. 유설을 보는 것만이 유매가 하루종일 하는 일이었으니까. 참을 수 없는 기분은 유설이 있을 때보다, 없어졌을 때 훨씬 커졌다. 이내 유매는 한 가지 계획을 떠올렸다. 자신도 그 학교에 가는 것이다.
마녀골 전체가 달라붙어 키워낸 언니를 자신의 힘만으로 박살낸다면. 상상해보니 썩 유쾌한 일이었다. 누구도 자신을 불쌍하게 여길 수 없고, 누구도 자신에게 후회하는 거냐 묻지 못할 것이다. 그 여자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도 궁금하다.
그리고 자신은 웃으며,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1년 동안 안에 틀어박힌 유매는 철저하게 마력을 단련했다. 약한 소리는 하지 않았다. 힘들다거나 도와달란 말을 입에 담을 때마다 언제나 주변에 나쁜 일만 일어났다.
엄청난 명문이라고 떠들썩하던 세한기전에 입학했을 때에도 별다른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천재라고 잘난 척하는 놈들이라 해봐야 이 정도인가, 하는 실망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 수준이라면 아홉 살 때의 자신이 와도 이길 수 있었다.
“너흰 뭐가 좋다고 몰려다니는 거야.”
풀리지 않는 짜증을 담아, 유매는 수험생들을 박살냈다.
약한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친구 따위는 필요 없었다. 어차피 자신을 신경쓰거나 도와주는 인간 따위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마녀골에서처럼 자신이 없는 것 취급 당하는, 투명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만큼은 견디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적을 만들자. 사람을 대하는 법을 모르는 유매지만, 적을 대하는 방법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유매가 마녀골에서 어릴 적부터 주입당한 내용이었다. 어떻게 해야 방해되는 것들을 완전히 짓밟고 박살낼 수 있는지.
그때 자신의 머리 위에 화분을 내던진 패거리의 짓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유매는 오히려 그런 관심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에게 먼저 상처를 입혀, 정당하게 이 참을 수 없는 짜증을 쏟아부을 수 있게 해줄 희생자들.
하지만 누군가가 끼어들어버렸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마음대로 참견해서 화분을 막아준 같은 반 인간은 필사적으로 짜증을 내는 자신을 진정시켰다. 신경써준답시고 멋대로 범인들을 붙잡아 교무실에 넘기더니, 네가 조금만 참아달라 오히려 사과하는 이상한 녀석이었다.
교실에서 슬쩍슬쩍 뒷자리를 바라보면, 언제나 누구와 즐겁게 대화하고 있었다. 자신과 달리 무슨 일이든 원만하게 해결하고, 살아가는 데에 요령이 있는 인간. 이야기한 사람은 누구나 호의를 가진다. 정말로 살아가는 세계가 다르다.
더 이상 그와 엮일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어차피 화분을 막아준 것도 지나가는 길에 보여서 어쩌다 그런 거겠지.
하지만 자신은 정말로 어떻게 된 것 같았다. 아군이라 여길 수 있는 인간을 만난 건 정말로, 정말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뒤를 따라가 도와달라고 말했다. 목걸이를 보여주며 부탁하니, 그는 간단히 승낙해주었다.
“그래, 도와줄게.”
처음 들었을 때는 믿을 수 없었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언제나 실실대며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는 듯한 저런 놈 따위, 이용해먹을 만큼 이용하다 흠씬 두들겨 패고 쫓아내면 된다.
하지만 그 실실대는 놈은 정말로 진지하게 도와주었다. 도와주는 척만 하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수업시간과 점심시간을 쪼개가며 같이 고민하고 지도해주었다. 가르쳐준 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고 화를 내지도, 초조해하지도 않았다.
“천천히 해. 어려워 그거.”
딱히 연습을 지켜보며 재촉하려 들지는 않지만,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신기하게도 같이 있으면 조금 짜증이 덜해졌다. 혼자 책을 읽어도 재미가 없었지만, 도서실에선 아무 생각 없이 내용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 인간이 식사하러 도시락을 꺼내면, 조용히 알약을 먹고 책장을 넘겼다. 어차피 이쪽은 신경쓰지 않을 테니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놈은 자기 마음대로 이쪽도 먹고 싶어할 거라 추측하더니, 매일매일 손수 도시락을 싸서 가져와주었다.
사실 알약이 아닌 음식에는 거부감이 있었다. 제대로 된 식사는 언제나 마력을 필사적으로 움직이면서 먹어야 했고, 식탁에 흘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회초리를 맞았으니까. 하지만 송한솔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깨를 떨던 자신이 반사적으로 식사를 쳐내 떨어뜨려도, 미안하다고 사과할 뿐이었다.
이상했다. 무엇이 미안하다는 건가. 미안해야 할 건 짜증을 참지 못하는 자신 쪽인데. 더욱 이상한 건 오늘 있었던 일이었다. 매일 두 명치 도시락을 싸는 건 부담될 거란 생각에 값을 지불하겠다 했더니, 친구 사이엔 그런 거 필요 없다고.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친구라고 말했다.
바보인가. 아니면 멍청이인가. 맨날 실실 웃고 다니다 보니 머리에도 이상이 생긴 건가. 언제나 짜증만 내고, 도움받았는데도 고맙단 말 한 마디 못 하고, 교실에선 모두한테 미움받고. 이런 인간을 대체 무슨 생각으로 친구라 부르는 건가.
“···멍청이.”
오늘치 도시락에 턱을 괸 유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매일 실실대는 얼굴로 남한테 참견이나 하고 다니는 인간. 저렇게 이상한 놈은 처음이었다. 평소엔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건지 궁금해졌다. 오늘은 다른 용무가 있다고 했나. 혼자 남은 유매는 작은 수정구슬을 만들어 창문에 띄워보냈다.
캠퍼스를 떠다니며 송한솔의 모습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런 이상한 녀석은 분명 금방 눈에 띌 것이다. 박살내야 할 적 이외에게 이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실제로 송한솔의 모습은 금방 눈에 띄었다.
맞은편에 서있는 것은 잘못 볼 수도 없는 얼굴이었다. 자신이 이 학교에 들어온 이유. 자신의 언니인 유설이었다. 송한솔은 유설에게 자기 품에서 편지를 건네준 뒤, 뭐라뭐라 이야기하다 그녀와 손을 잡았다. 속이 후련한 듯 웃는 얼굴로.
울컥했다.
수정구슬에 너무 많은 마력을 실어 부서져버릴 정도로.
가슴 깊은 곳에서 짜증이 솟아났다. 혼자였던 마녀골, 창가에서 유설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보다 훨씬 더한 짜증이었다. 그럼 그렇지.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그렇게 가볍게 냉소하며 넘기려 해도 도저히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또 빼앗겼다는 비웃음이 들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도서실은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모자령마저 해방시키고 날뛰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송한솔을 보고 유매는 직감했다.
대화하면 안 된다.
송한솔의 입에서 어떤 말도 나오게 해서는 안 된다. 저 녀석이 무슨 말이든 변명하는 순간, 자신은 타협해버리고 말 것이다. 이곳의 편안함을 잃기 싫어서, 그 여자의 앞잡이한테 조롱당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속아넘어간 척을 할 것이다.
그런 비참한 꼴이 될 바에야 죽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만에 하나 송한솔의 입에서 나오는 게 변명 같은 게 아니라 악의 섞인 조롱이라면. 자신은 분명 무너져버린다. 혼자여도 괜찮다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던 내면이 더 이상 수습할 수도 없게 흘러내릴 것이다.
그만큼. 정말로, 난생 처음으로 생긴 마음 편안한 장소였다. 유매의 눈에서 닭똥같은 눈물이 뚝뚝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자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송한솔이 머리를 긁적였다.
“···우냐?”
“닥쳐. 죽어버려!”
순수한 마력으로 옭아매 송한솔의 목을 잡고 일으켰다. 주위에는 당장에라도 송한솔의 몸을 찢어발길 수 있는 주문의 창이 네 자루. 떨면서 도망치려 들거나, 반격하거나. 어느 쪽을 선택하든 확실한 적이 된다면 대하기 편해진다. 적에게는 무슨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렇게 훈련되어 왔다.
“끄윽, ··· 야, 아니···왔다고···!”
“···입 열지 마.”
“네 편··· 아윽! 진짜!”
“입 열지 마, 입 열지 마···!”
유매는 식은땀을 흘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꽁꽁 숨긴 것인지 지금은 몸 안에 마력이 느껴지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마력을 짜내는 전조가 보이는 순간 패대기를 칠 것이다. 얼마나 은밀히 움직여도 유매의 마력 감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양쪽 안면에 어떠한 감각이 느껴졌다.
“우으?”
살짝 눈을 내려보면, 자신의 볼이 꼬집히고 있었다.
볼이 늘어나 아픈 것보다 먼저 든 것은 섬뜩함이었다. 꼬집히기 직전까지도 전조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상대가 마음만 먹었으면 어떤 공격이든 할 수 있었다. 멍하니 앞을 쳐다보자, 송한솔이 숨 막히는 듯 괴로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네 편 하겠다 하고 왔으니까 이거 풀라고!”
정체불명의 힘이 유매의 양볼을 더욱 세게 잡아당기자, 집중을 잃어버린 유매가 송한솔을 놓쳤다. 바닥에 떨어진 송한솔은, 일어나 걸어와 이번엔 직접 유매의 양 볼을 꼬집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유매가 송한솔을 쏘아보며 말했다.
“우흔 이히야···!”
“야 이··· 죽는 줄 알았잖아 이 자식아!”
“앙항 이허 와···!”
“뭐라는 거야 하나도 모르겠네!”
송한솔이 유매의 양볼을 꽉 잡고 마구 흔들자, 분을 못 참은 유매도 손으로 송한솔의 볼을 쥐고 잡아당겼다. 그리고 누군가가 끼이익 도서실 문을 조용히 열었다. 도서실 내부의 소리도 마력도 차단되어 밖에 새어나갈 일이 없을 텐데도.
“음···.”
송한솔과 유매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문에서 빼꼼 나온 얼굴은 차대엽이었다. 혼자서는 유매의 뜨개질 연습을 봐줄 수가 없기에, 1교시가 끝나자마자 도서실에서 나갔던 송한솔이 옆에서 마력의 흐름을 확인해달라 불러둔 조력자.
차대엽의 눈이 돌아갔다. 검귀의 상황 파악 능력은 대단히 빨랐다. 난장판이 된 도서실. 울고 있는 유매. 얼굴이 새빨개진 송한솔. 커다란 마력이 펑펑 터져나갔던 흔적들. 세 명의 눈이 조용히 마주치고, 차대엽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망 보는 게 낫나. 다 끝나면 나와.”
차대엽이 쿵 도서실 문을 닫고, 안에 정적이 흘렀다.
< 설중매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