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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46화 (46/113)

< 정세나 (2) >

온갖 옷가지나 쓰레기들로 어지럽혀져 있던 아지트 안은 말끔하게 정리되어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도 이곳에서 지내야 할 텐데 난장판인 상태로는 집중이 안 됐다. 나는 고개를 돌려 소파에서 게임기를 갖고 노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다 먹었으면 그때그때 바로 버리라고.”

“오빠 되게 피곤한 성격이네? 이따 몰아서 치울 거야.”

“안 치우잖아.”

<마인드맵 확장 : 염동력 Lv.5>

눈썹을 찌푸린 채 손가락을 들어 휙 옆으로 휘둘렀다. 발현된 염동력은 소녀 옆에 놓인 다 마신 콜라캔과 과자봉지들을 깔끔하게 쓰레기통까지 날려보냈다. 정세나가 신기하다는 듯 짝짝 박수를 쳤다. 나는 한숨을 쉬고 주방에 걸어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싱크대에는 설거지거리가 전혀 없었다. 물론 제때제때 설거지를 끝내서 그런 게 아니라 과자나 즉석식품만 먹느라 그릇 자체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세나가 나가서 장을 봐온 재료들을 도마에 늘어놓았다.

“뭔가 작전이라도 꾸미는 줄 알았는데. 정말로 장 좀 봐오란 거였을 줄은 몰랐네. 긴장감이 없구나? 오빠.”

“알았으면 다음부턴 좀 귀여운 애를 두고 가.”

그녀가 밖에 나가있는 동안, 감시역으로 놓고 간 거대한 마물과 단둘이 아지트에서 눈을 마주치고 있어야 했다. 이빨 사이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침. 명령이 있기 전엔 공격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아도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요 주변은 죄다 공장이 돌아가고 있었고 근처에 있는 가게라 해봐야 자그마한 편의점 정도였기에, 그다지 제대로 된 식재료는 구할 수 없었다. 나는 찬장에 있던 스팸을 위에 얹은 덮밥과 참치캔을 넣은 샐러드를 만들어 식탁에 올렸다.

숟가락으로 한 입 떠먹어본 소녀가 눈을 빛냈다. 딱 봐도 하루 세끼 과자 같은 거나 집어먹던데 제대로 된 밥을 먹는 건 오랜만일 것이다. 정세나가 덮밥을 먹으면서 말했다.

“뭐야. 요리 잘하잖아.”

“네가 잘 모르나 본데 여기 오기 전엔 어떤 성깔 대단하신 아가씨 전속 요리사로 일했었어. 이른바 프로라는 거지.”

정기적으로 재료비를 후원해주는 스폰서까지 있었다. 어깨를 으쓱인 내게 정세나가 일리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청소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고. 이 정도면 그냥 그림자로 먹어서 내 전속 하인으로 만들어버릴까.”

그녀 발밑의 그림자가 꿈틀댔다.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그림자 안에 빠뜨려 자신의 권속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림자의 권속이 되면 어둑시니에게 충성하는 대신 더욱 강한 힘을 부여받는다.

정세나는 동료 같은 것 없이 혼자였지만, 지금도 그림자 안에는 전대가 모아온 온갖 마물과 요괴들이 숨어있었다.

‘아직은 마물 수준밖에 꺼내지 못하는 것 같지만.’

대요괴 어둑시니의 후계자로서, 그녀는 아직 태어난지 몇 년 지나지 않은 아기에 불과했다. 요괴 사이드를 플레이할 때 핵심은 정세나의 능력을 빠르게 성장시켜 이전 백귀야행의 간부 요괴들을 언제든지 꺼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차대엽이 말도 안 되는 잠재능력으로 급성장을 계속하는 캐릭터라면, 정세나는 죽어가던 전대가 남겨둔 안배를 따라 힘을 되찾아가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 시점에서는 정세나가 압도적으로 강하겠지만 결국엔 입장이 뒤집힌다.

“어때, 오빠? 여기서 나한테 먹히는 건.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 생각하는데. 난 언젠가 모든 요괴의 정점에 설 테니.”

이쪽을 보는 정세나는 인간을 그림자로 먹어치우는 행위에 저항감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인계받은 건 대요괴의 능력만이 아니다. 복수에 필요한 기억과 지식도 함께 건네받아, 사고방식 또한 인간보다는 요괴의 그것에 가까워져 있다.

필요하다 생각하면 정말로 날 당장에 집어삼킬 것이다. 나는 천천히 일렁이고 있는 그림자를 보며 말했다.

“협력을 깨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내가 지금 정말로 여기서 못 도망쳐서 이러고 있다 생각하는 건 아니지?”

사실 못 도망치는 게 맞긴 했다. 그녀가 작정하고 마물을 풀어서 추적하기 시작하면 지금 내 능력으로는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묵묵히 밥을 먹으며 허세를 부린 게 통했는지, 정세나가 콧숨을 내쉬고 그림자를 거두었다.

“성소 침입은 최대한 빨리 해주면 좋겠는데.”

“왜, 추적자가 따라올까봐? 상관없어. 어차피 천년서생은 세한기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머지는 누가 와도 날 죽일 수는 없어. 애초에 이곳 위치를 알아내지도 못할걸.”

정세나가 자신감 있게 단언했다. 그녀가 아니라 전대 어둑시니의 지식이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하긴 그렇게 거대한 마물이 날아다니다 사람 그림자 속에 쏙 들어가 갑자기 증발해버리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추적하기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부정했다.

“아니, 나 학교 가야 돼. 너랑 달리 사회에 순응해야 하는 소시민이거든. 출석일수 못 채우면 책임질 거냐?”

정세나가 눈썹을 찌푸리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 * *

“정말 들어갈 수 있는 거 맞아?”

온갖 식물들로 뒤덮여있는 풀숲 깊은 곳, 바위에 걸터앉은 정세나가 이쪽을 보고 말했다. 이곳이야말로 당대 검성과, 차기 검성으로 내정된 자에게만 그 위치가 전해지는 검성의 성소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숲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대단히 부자연스럽게 새하얀 돌바닥이 깔려있는 제단이 있었다. 칼자루 위에 커다란 구슬이 박혀있는 석상 앞에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다. 하지만 직계의 피를 잇지 않은 외부인은 성소를 향한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초대 검성의 결계.

대요괴 수준의 강자라 해도 결계와 함께 주변을 완전히 초토화시키지 않고서는 침입할 수 없는 견고한 방벽이었다. 하지만 빈틈은 있었다. 절대적인 견고함을 얻은 대가로, 결계가 외부인을 차단하는 건 아주 얇디 얇은 한겹의 막 뿐이다.

<마인드맵 확장 : 블링크 Lv.3>

손바닥을 밀어 튕겨나오는 방벽의 경계선을 확인한 나는, 아무렇지 않게 안쪽으로 순간이동했다. 마력을 이용한 전이라면 방해하거나 튕겨내도록 짜여져있겠지만, 아무리 검성의 결계라고 해도 염능력에 대응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제단에 걸어가 푸르게 빛나고 있는 구슬을 깨뜨려버렸다. 결계의 술식이 짜여진 구슬이 박살났으니, 성소 주변의 방벽 또한 자연히 녹아내리듯 사라졋을 것이다.

‘차대엽네 조상님 죄송합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사과한 뒤 저편에 앉아있던 정세나를 불렀다.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던 그녀가 어이 없다는 얼굴로 걸어왔다. 결계가 사라진 성소는 더 이상 외부인의 출입을 거부하지 못했다. 결계의 복원 또한 이제는 불가능했다.

“이렇게 간단히? 대체 무슨 요술을 부린 거야.”

“기업 비밀.”

정세나가 눈썹을 찌푸렸다. 나에 대한 경계가 몇 단계 올라간 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안쪽은 말 그대로 거대한 무덤이었다. 미로처럼 꼬여있는 길들은 각각 역대 검성의 묘소로 이어져있었다. 각 무덤 앞에는 주인이 생전에 휘두르던 신검이 묘비처럼 꽂혀있었다.

‘지금은 아무 쓸모가 없지.’

신검이란 그 이름처럼 진정한 의미에서 검귀의 수족이나 다름없었다. 살아있는 검귀가 휘두르는 신검은 스스로 수복되며 온갖 기이한 능력을 발휘하는 마검으로 기능하지만, 검귀가 죽은 뒤엔 아무런 능력도 없는 고철덩이에 불과했다.

물론 특별한 능력 같은 게 없어도 대단히 튼튼하게 만들어진 검이긴 하고, 수집품으로서의 가치 또한 충분했다. 하지만 결국 죽은 검귀의 팔다리를 박제한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음습한 취향의 시체 애호가들 사이에서나 인기를 끌었다.

한 층 더 아래로 내려가자, 거대한 공간이 나왔다.

수많은 약품과 썩어가는 고깃덩이 냄새. 쇠사슬이 잘그락대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없어야 할 묘소에 살아있는 누군가가 걸어다니고 있다.

“역시. 여기서 이런 짓을 하고 있었네.”

정세나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쇠사슬을 잘그락대며 이쪽을 향해 걸어온 것은, 거적떼기를 걸친 한 명의 중년인이었다. 아니, 중년인이라고 표현하기도 뭐했다. 그의 한쪽 몸에는 보랏빛 살덩이가 부풀어올라 비틀려있고, 거대한 칼날같은 뿔은 수십 개가 어깨까지 돋아나있었다.

곱추 같은 자세를 하고, 움직일 때마다 자신의 뿔에 자신이 상처입어 피를 흘리고 있다. 초점이 풀린 눈빛에선 약간의 이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인간의 몸에 마물이 반쯤 섞여있는 것 같았다. 이것이 차대엽의 아버지이자 전대 검성의 영락한 몰골이었다. 나도 정세나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정세나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고, 내가 뒤에서 물었다.

“자신 있어? 검성이 상대인데.”

“농담하는 거지, 오빠.”

길게 늘어진 정세나의 그림자에서 거대한 마물의 손이 튀어나왔다. 시합장에 난입해 나를 붙잡았던 그 마물의 손아귀였다. 하지만 마물의 손바닥 안에 잡힌 검성은 단순한 힘만으로 구속을 풀어버렸다. 애초부터가 최강의 검귀인데, 거기에 이런저런 개조가 들어가 신체능력이 더 상승해있다.

“훌륭한걸. 장기말로 쓰기 딱 좋겠어.”

하지만 정세나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싸움에서 정세나가 패배할 가능성은 없었다.

애초에 저건 이미 차대엽의 아버지조차 아니었다. 그 몸을 소체로 해서 만들어진 괴물일 뿐이다. 신검도 꺼내지 못하고, 혈통능력도 발동할 수 없다. 그 대단했던 검술조차 하나도 구사하지 못한다. 있는 것은 오직 강한 완력과 단단한 몸뿐.

세간은 그런 것을 두고 갖고 놀기 딱 좋은 먹잇감이라 부른다. 정세나는 미친 검성을 자기 그림자에 흡수하기 위해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사지를 집요하게 공격했다. 나는 뒤에서 염동력으로 가끔씩 검성의 움직임을 방해해주었다.

‘애초에 차대엽 혼자서도 이길 수 있는 상대니.’

검귀의 혈통능력인 귀안은 전투용의 기술이 아니다.

오히려 그 진정한 쓰임새는 연습 때에 있었다. 모든 힘의 흐름을 포착하는 귀안이 있다면, 아주 미세한 힘의 누수도 놓치지 않고 개선하며 끊임없이 ‘정답’에 다가설 수 있다. 완벽한 자세와 완벽한 동작. 그것에 의한 완벽한 힘의 전달.

이윽고 도달하는 건 기술의 완성이다.

동작 하나하나의 극한의 완성도는, 몇 번 검을 나누는 것만으로 검귀가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게 해준다. 검을 나누면 나눌수록 아버지가 절대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이해한 차대엽은, 자신의 손으로 미쳐버린 아버지를 죽여버린다.

미친 아버지를 날뛰지 않게 치료해주겠다 약속했던 정세나는, 뒤통수를 치고 검성 괴물을 자기 부하로 만들 계획이 무너져 화를 낸다. 하지만 성소 지하엔 비슷한 실험체가 수십 체 있었으니 그것들 전부를 흡수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걸로는 부족해.’

최대한 희생을 내지 않고 모든 대요괴를 확실하게 다 죽이기 위해선, 정세나가 최대한 빨리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곳 성소에 있는 모든 괴물들은 정세나에게 넘겨줄 생각이었다. 도중에 내가 챙겨가야 할 물건도 하나 있었고.

뒤에서 적당히 구경하고 있으니, 정세나는 검성 괴물의 정리를 대충 끝내놓은 상태였다. 바닥에 무릎 꿇은 괴물은 더 이상 저항이 불가능한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이쪽으로 조용히 걸어오고 있는 정신이 느껴졌다.

구속에서 벗어난 실험체가 다가오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그렇다기에는 발걸음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다가오는 익숙한 정신의 정체를 눈치챘다. 지금 저 사람이 나타날 리 없는데. 난 곧바로 벽 쪽에 다가서 몸을 숨겼다.

<마인드맵 확장 : 인비저빌리티 Lv.1>

내 모습이 주변과 동화해 사라지고, 위쪽 계단에서 내려온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색 양복을 입고 있는 남자는 지하 성소의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림자의 늪에 반쯤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는 괴물과, 그 앞에 서있는 한 명의 소녀.

“음. 꼬마 아가씨. 여긴 관계자 외 출입 금지인데.”

“모르고 들어왔는데···. 지금 나가면 용서해주나?”

괴물을 흡수하고 있는 정세나가 멋쩍게 웃으며 물었다. 똑같이 빙그레 웃은 차대운은, 대답 대신 신검을 발현시켰다.

< 정세나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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