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세나 (3) >
‘저 사람이 지금 왜 여깄어?’
나는 위쪽에서 걸어내려온 차대운을 보고 경악했다. 적어도 이 타이밍에 차대운은 검성의 성소에 오지 않는다. 그걸 알고 있으니까 순순히 정세나를 따라온 것이다. 나는 무엇이 바뀌었길래 차대운이 성소에 달려온 것일까 생각해보았다.
‘결계를 부숴서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말고는 변수가 없었다. 열쇠인 차대엽이 없는 이상 나와 정세린이 검성의 성소에 침입하려면 결계 자체를 없앨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차대운은 방벽이 사라지자마자 즉시 눈치채고 곧바로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다.
차대운과 마주한 정세나는 아랑곳 않고 식사를 끝냈다. 검성으로 만든 괴물이 그림자 안에 완전히 가라앉았다.
“그거, 꽤 공을 들인 물건인데. 다시 뱉을 수는 없나?”
차대운이 담담히 내뱉은 말에 정세나가 웃었다.
“원한다면.”
퍼엉! 하고 폭포가 거꾸로 터지듯 그림자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능력에 잡아먹힌 괴물은 정세나의 그림자 안에서 재구성되어, 추악했던 몰골을 덕지덕지 붙은 새까만 갑주로 감춘 채 자신의 주인 앞에 무릎 꿇고 충성을 맹세했다.
근묵자흑. 그림자로 물들여 종복을 만드는 능력. 이 능력 하나로 어둑시니는 걸어다니는 요괴의 군단이 되었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흑귀야.”
정세나가 뺨을 가볍게 만져주자, 뭉친 그림자가 새까만 도깨비 탈을 이루었다. 고개를 끼이익 돌린 검은 무사가 차대운을 향해 섰다. 가면 아래에서 푸른 귀안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차대운은 상당히 놀랐다는 듯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어떻게 귀안을 발동한 거지? 이성은 철저하게 짓밟아놨을 텐데. 망가뜨려둔 신체 조직들도 수복된 것 같고.”
차대운의 의문에 정세나가 대답했다.
“아직 몸뚱이에 기능이 남아있으면, 나에게 충성하는 새로운 인격을 집어넣으면 될 뿐. 숙련된 검술이 유실된 건 아쉽지만, 이 정도 소체면 몸에 박혀있는 기억만으로도 충분히 잘 싸울 수 있겠지. 전투 경험은 이제부터 쌓게 하면 돼.”
원래 어둑시니의 그림자는 기사를 흡수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처음부터 정세나에게 충성하는 상태면 모를까, 인격과 자의식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림자의 침식이 힘들어져 굴종시키는 과정에서 거부반응을 못 견디고 죽어버린다.
그런 면에서 마물의 기관이 잔뜩 섞여있던 검성 괴물은 완벽한 소체라 할 수 있었다. 검성의 몸을 베이스로 한 육체에, 기사의 혈통능력도 약간이나마 쓸 수 있다. 자의식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에 그림자로 침식하는 것도 대단히 간단했다.
본래의 검성과 비교하면 전투능력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지금의 정세나가 주력으로 쓸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말인 건 확실했다. 무엇보다 근묵자흑으로 만들어낸 종복은 그림자 안에 회수만 해도 자동으로 몸이 수복된다. 갈갈이 찢겨 즉사하지 않는 이상 숨만 붙어있다면 끝없이 부활한다.
‘휴대용으로 데리고 다닐 수도 있고.’
이내 정세나 발밑의 그림자가 커다랗게 퍼져나가 성소의 바닥을 검게 물들였다. 차대운이 눈썹을 찌푸리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대요괴 어둑시니의 두 번째 능력. 묵계.
이 위에선 어떤 혈통능력도 발동이 불가능하고, 누군가가 능력 발동을 시도하면 그 즉시 능력을 흡수당해 정세나가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신검 발현이나 모자령 해방처럼 따로 특수한 기관이 필요한 능력은 재현할 수 없지만, 마력을 가공해 쓰는 대부분의 혈통능력은 완벽하게 빼앗아버린다.
대요괴였던 존재의 능력답게 반칙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 만큼 사기적인 효과였다. 아직 미숙한 정세나는 자기 주변 몇 미터 정도밖에 전개하지 못하지만, 전대 어둑시니의 경우엔 전장 전체를 덮을 정도였다. 이걸로 차대운의 능력은 봉인됐다. 이미 꺼내둔 신검 한 자루만 갖고 싸울 수밖에 없다.
당장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능력이나 주문도 쓸 수 없었다. 거기다 정세나의 그림자엔 아직 전력이 많이 남아있다. 이른바 외통수에 몰린 상황에서, 차대운은 턱을 매만졌다.
“꽤 뒷조사를 한 것 같은데. 여긴 어떻게 알아냈지? 아니. 그건 됐어. 집요하게 조사하다 보면 걸릴 만한 점이 없는 것도 아니니. 그보다 어떻게 성소의 결계를 부순 거지?”
“그냥 힘으로?”
“농담하지 마, 아가씨. 그랬으면 이 주변이 멀쩡할 리가 없지. 애초에 그럴 수 있을 만한 힘도 없어보이고.”
그 말대로 검성의 결계를 밖에서 강제로 부수려면 대요괴 수준의 존재가 일격을 가할 필요가 있었다. 그 정도 충격이 가해지면 여파로 성소 전체가 무너져버릴 것이다. 추궁해봤자 대답해주지 않을 거라 판단한 차대운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아가씨는 여기서 죽어줘.”
차대운이 조용히 검을 치켜들었다. 발밑에선 그림자가 능력을 봉인하고, 앞에서는 흑귀가 귀안을 흉흉히 빛내고 있다. 그런데도 차대운은 식은땀을 흘리긴커녕 여유마저 잃지 않고 있었다. 그걸 허세라고 생각했는지 정세나가 피식 웃었다.
“하긴 이런 제정신 아닌 짓을 벌이고 있었다는 걸 들키면 큰일이 나겠지. 자기 아버지를 좀비 비슷한 걸로 만들고.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꼭두각시로 만들 생각이었어?”
정세나의 말에 차대운이 눈썹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턱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차대운이 이내 이해했다는 듯 입을 벌렸다.
“꼭두각시라니. 하하, 설마 여기서 괴물 군단이라도 만들고 있다 생각한 거야? 그런 유치한 짓을 하려는 게 아니야. 할 의미가 없지. 억지로 몸에 마물을 집어넣어봤자 약해지기만 하고, 이미 이쪽의 전력은 충분하다 못해 넘치거든.”
그리고 순간적으로 차대운의 눈이 차가워졌다.
“애초에 내가 아버지를 살려둘 리가 없잖아.”
“그 목적이 아니라고? 그러면···.”
“사업이야, 사업. 이래 봬도 회사원이라.”
차대운이 리모콘을 꾹 누르자, 성소 안쪽에서 기형으로 변해있는 인간들이 꾸물꾸물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성을 잃은 괴물이 됐지만, 전부 한때는 꽤 괜찮은 실력을 가지고 있던 기사들이었다. 차대운이 안심하라는 듯 웃었다.
“무기를 파는 비즈니스지. 혈통능력을 지닌 기사의 몸에 마물의 정수 비슷한 걸 만들어낼 수 있으면··· 그 정수를 가공해서 유해 무기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어? 걱정 마. 재료로 쓴 건 전부 죽는 편이 나은 쓰레기들이니까.”
유해 무기. 죽은 마물의 정수를 가공해 만들어지는, 보통의 무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특수한 능력을 갖춘 강력한 무기.
그것을 마물이 아니라 기사의 능력을 베이스로 만들어보겠다는 게 차대운의 기획이었다. 누구나 검귀의 신검 같은 것을 구매해 사용할 수 있도록 시장에 뿌리는 것이다. 그 무기가 같은 기사를 가공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건 숨겨둔 채로.
“···인간으로 무기를 만들어서 팔겠다고?”
“인간 아니야.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룰을 어긴 것들이거든. 여기저기서 제발 좀 잡아 죽여달라 부탁이 들어오는데, 그냥 죽이긴 아까우니까 나름대로 재활용할 방법을 생각해낸 거지.”
담담히 설명하는 차대운에게 정세나가 헛웃음을 지었다.
“나도 나쁜 짓에 뭐라 할 입장이 아니긴 한데···. 당신은 진짜 장난이 아니네. 대단해. 확실하게 정신이 나갔어.”
정세나의 그림자에서 몇 마리의 마물이 더 튀어나왔다. 시합장에 난입해왔던 악마처럼 생긴 그 거대한 마물 또한 있었다. 도망치지 못하게 포위하고, 여기서 확실하게 죽여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만큼 차대운은 무언가 위험했다.
“당신이야말로 여기서 죽어.”
정세나가 차대운을 똑바로 노려봤다. 수많은 마물이 공명하며 포효하고, 흑귀의 손아귀에 검은색 검이 쥐여졌다.
“척 봐도 강해보이니 아마 1급 기사랑도 싸울 수 있는 실력이겠지?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고. 하지만 상대가 너무 나빴어. 검성 수준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못 살아나가.”
흑귀가 땅을 박차고 단숨에 차대운의 코앞까지 도약했다. 그대로 차대운을 짓이겨버리기 위해 팔을 휘두르자, 싹둑, 하고 흑귀의 오른팔이 잘려나갔다. 잘려나가 공중에 뜬 오른팔이 한 번, 두 번, 세 번 더 잘려나가 잘게 다져진다.
한쪽 팔이 잘려 평형을 잃어버린 흑귀가 바닥에 굴렀다. 새삼스럽다는 듯 신검을 휘두른 차대운이 콧숨을 쉬었다.
“여기까지 아버지를 끌고 온 건 누구겠어?”
“뭐···.”
“검성 수준이 아닌데 검성을 제압할 수 있었을 리 없잖아.”
거대한 악마형 마물이 차대운의 몸을 쥐어 터뜨리기 위해 손바닥을 내리쳤다. 휙휙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순간 마물의 커다란 손바닥이 조각조각나 잘려나갔다.
대충 가볍게 휘두르는 것 같은 검격에 마물들의 몸이 두부처럼 잘려나간다. 원래 기본적으로 마물과의 싸움은 화력을 쏟아부어 단단한 외피를 뚫어내기까지의 싸움이다. 하지만 절삭에 특화된 차대운의 검은 거의 모든 방어를 무시한다.
“설마 내가 아버지보다 약할 거라 생각한 건가?”
신검을 땅에 툭툭 치며 칼날에 맺힌 피를 털어낸 차대운이, 양복 셔츠에 얼룩이 튄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정세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야 강할 것이라곤 생각했지만 예상한 범위를 한참 뛰어넘었을 것이다.
묵계의 영향 하에서 차대운은 어떤 능력도 발동하지 못했다. 오직 신검 한 자루만을 쥐고 이러한 전투력. 이 정도면 대요괴의 오른팔, 백귀야행 간부 수준의 강함이었다. 기사가 정직하게 단련을 해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당신, 몸에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딱히 무슨 짓을 하지는 않았어. 태어나길 이상하게 태어난 거지. 그것 말고는···아버지의 교육 덕분일까.”
정세나가 이를 깨물었다. 전력을 잘못 쟀다. 이쪽이 힘에서 밀린다 해도 숫자로 밀어붙일 수 있는 어둑시니의 능력은, 어떤 마물이든 일격에 베어버리는 저 검과 상성이 안 좋다. 당장 가진 말들로는 적당히 싸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상대 자체가 안 된다. 지금은 과감하게 판단해야 했다.
정세나는 바닥에 물들이고 있던 묵계를 거두고, 회수한 그림자를 자신의 등 뒤에 거대한 벽처럼 세웠다. 그곳에서 수많은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여러 종류가 섞인 마물들 수십 마리가 동시에 쏟아져 차대운에게 날아간다.
정세나의 뒤에 펼쳐진 그림자는 하나의 거대한 둥지가 되어있었다. 아무리 빠르게 쳐낸다 해도 다 막아낼 수 없는 마물의 급류. 쏟아지는 괴물의 숫자는 이미 수십 마리를 넘어서 백 단위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차대운이 검을 들었다.
차라리 묵계를 해제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해제해버린 이상, 이제 차대운 또한 능력을 발동할 수 있다. 검귀가 가진 혈통능력의 극치. 신검발현의 영역을 넘어서, 어떠한 도달점에 이르게 된 자들에게만 허락된 오의. 신검에서 쏟아지는 마력의 빛이 차대운의 몸 전체를 감쌌다.
“신검합일(身劍合一).”
광채가 터져나오는 것과 함께, 날카로운 금속이 차대운의 몸을 덮어갔다. 이윽고 나타난 것은 칼날과 같은 갑주를 두르면서도, 유연히 곡선을 그리며 움직이고 있는 기이한 형체였다. 말 그대로 검과 동화해 변신한 것 같은 강철의 귀신.
그리고 변신한 차대운과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진 마물은 그가 검을 휘두를 것도 없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연속적인 참격에 잘게 썰려나갔다. 급류처럼 쏟아지는 셀 수 없는 마물들을 상대로 차대운은 그저 가만히 서있기만 했고, 그것만으로 모든 마물들은 피분수가 터지며 갈려나가 몰살당했다.
그리고 셀 수 없는 마물들의 자폭 돌격이 마침내 멈춰 묘소 전체가 피로 물들었을 때, 차대운의 앞에 있던 정세나는 사라져있었다. 흑귀를 비롯한 중요한 장기말만을 급히 회수한 뒤, 조무래기들을 버림패로 써서 능력으로 도망쳤다.
“놓쳐버렸군. 대단한 능력인데.”
신검합일을 해제한 차대운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놓친 것에 대해 딱히 아쉬움은 없는 듯 했다. 침입자를 차단하는 결계가 무너진 시점에서 어차피 이곳은 폐기해야 했으니. 그리고 차대운이 휙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쪽은 언제까지 숨어있을 거지?”
나는 심장이 철렁이는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시치미를 떼려 노력했지만, 정확하게 이쪽을 바라보며 걸어온 차대운이 검을 겨누었다. 나타나지 않으면 베겠다는 경고였다. 한숨을 쉰 나는 항복 자세를 취하고 순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응? 한솔이.”
차대운이 처음으로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정세나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