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벌써부터 깊은 한숨이 감도는 희림이 축 처진 가겟방 정씨 할머니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내 가게가 망했는데 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조차도 청연에서 보낸 2년간 익숙해진 일이었다.
“사람이야 왜 없겠어요. 저 다음으로 젊은 사람이 하면 되죠.”
“……희림이 너 다음에 나여.”
“아…….”
스물여덟에서 예순여덟로 무려 40년을 훅 건너뛰어버린 파격적인 나이 차에 희림도 할 말을 잊었다. 뭐가 이렇게 극단적이람. 그렇다고 이대로 엉거주춤 받아들일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녀를 놓아주기 힘든 것은 마을 할머니들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숨 막히는 회관에서, 청량한 바람과도 같은 박씨 할머니의 말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러고 보니 부동산 오 씨가 강변에 엄청 큰 부지에 리조트인지 뭔지 들어온다던데. 거기 사장이 엄청 젊다고.”
◇ ◆ ◇
회관 앞 벤치에 앉아 희림을 기다리던 연주가 두 다리를 쭉 폈다. 공무원이라 겸직도 안 되는 강 건너 불구경 처지라 그런지, 안에서 일어날 일의 결과에 대해서도 그저 즐겁기만 했다. 사실 할머니들 밀어붙이는 성격은 둘째 치고 제 친구의 정 많은 성격을 훤히 아는지라 어느 정도 상상이 가긴 했다.
“하여튼 한희림 뻔하지.”
그녀가 가볍게 휘파람을 불어보았다. 곧 1대 상가 번영회 회장님이 납시겠거니 했는데, 막상 회관의 문을 열고 나선 희림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뭐야. 농민봉기 하냐?”
“……나 간다.”
“왜? 또 어디 가는데?”
시선 한번 돌리지 않고 저벅저벅 어딘가로 걸어가는 희림의 걸음이 비장했다. 결연한 의지까지 감도는 그녀의 얼굴에 연주가 더 애태웠다.
“뭐래? 그냥 네가 회장님 하기로 한 거 아냐? 그냥 놔둘 할머니들이 아닌데?”
“절대 싫거든.”
“…….”
“나 안 해. 못 해.”
붉은 입술을 꼭 깨문 희림이 저 멀리 버스 정류장 너머 부동산으로 향했다. 애초에 상가라 해봤자 이차선 도로를 따라 늘어선 이십여 점포가 전부, 이런 규모에 굳이 회장을 뽑는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된다.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늘 제 인생에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왔다는 것이 더욱 기가 막혔다.
“이번 한 번이면 말도 안 해. 재작년 추석에는 청년회 회장이라더니 이놈의 동네는 무슨.”
“야아. 그래도 너 아니면 누가 해.”
“누가 하긴. 젊은 사람이 해야지.
희림은 걸리적거리는 연주에게 저리 좀 나오라며 한 손을 내저었다. 지금 제 앞길을 가로막는 자는 그 누구라도 떠밀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반강제로 청년회 회장으로 임명돼 동네 온갖 대소사를 떠맡은 지 2년, 여기서 상가 번영회 회장까지 된다는 건 그냥 이 마을에 평생을 바치라는 뜻이었다.
“누구 마음대로!”
“그런데 젊은 사람이라니? 이 동네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있대. 있을 거야.”
네 귀퉁이가 골고루 녹슨 부동산의 낡은 간판을 노려보던 희림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마을 지형 자체가 워낙에 고여 있다 보니 경치를 보러 온 관광객들이라면 몰라도 주민은 좀처럼 늘지 않는다. 특히나 젊은 사람들이라면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곳에 올 리가…….
“음…….”
“왜 그래?”
“아냐. 아무것도.”
무언가 떠오를 듯 어렴풋해 멈춰 있던 희림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비상사태에 10여 년도 훌쩍 넘은 옛이야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희림은 모든 잡생각을 떨쳐내듯 부동산의 미닫이문을 힘주어 열어젖혔다.
“할아버지! 어떻게 다들 저한테……. 아, 죄송합니다.”
“…….”
이크, 급한 마음에 무작정 들어가려던 그녀가 마침 밖으로 나서는 남자에게 얼른 고개를 숙였다. 곁눈질로는 미처 다 담지도 못할 만큼 커다란 키와 체격이었다. 당황한 그녀가 먼저 가시라 뒤로 물러났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한참 동안 움직임이 없었다.
“…….”
왜 그러지.
그제야 머쓱해진 희림이 울퉁불퉁 삐져나온 제 작업복을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아침나절 내내 무너진 벽을 어찌해보려 동동거리느라 흙먼지 가득한 차림새가 가관이었다. 채 가라앉지 않은 흥분으로 오르내리는 가슴도 부쩍 신경 쓰인다. 뒤늦게 좁은 입구에 나란히 선 남자를 의식한 그녀가 슬쩍 고개를 들어올렸다.
‘응?’
길고 긴 몸 위로 겨우 눈이나 마주칠까 했더니, 봄볕에 드리운 야구모자의 그림자가 금세 스쳐가버렸다. 하얀 티셔츠에 깔끔한 차림새, 그 안에 드러나는 몸의 굴곡이 단단했다. 짧은 시간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는 어느새 문밖으로 사라져버렸다.
“거기서 뭐 해? 왔으면 앉지 않고.”
“아……. 네에, 할아버지.”
자신도 모르게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희림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급히 돌아섰다. 저런 남자가 왜 우리 동네에. 처음 보는 존재에 호기심을 드러내려던 그녀가 막 입을 열려던 차에 오씨 할아버지가 선수를 쳤다.
“한 회장님, 잘 왔어. 내가 안 그래도 우리 회장님한테 한턱내라고…….”
“저 회장 아니거든요!”
“…….”
이 양반들이 진짜.
할머니들 못지않게 은근슬쩍 묻어가는 할아버지에게 그녀가 강한 거부의사를 밝혔다. 그렇게 회장을 하니 마니 한바탕 설전을 벌이고 난 후에야 다시 아까 하려던 말을 꺼내보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땠더라.
수십 년을 보아온 사람들도 이해하기 힘든 이 동네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기도 힘들다. 크고 건장한 몸을 따라 비칠 듯 말 듯 하던 얼굴이 아스라했다. 그저 낡은 부동산에는 어울리지 않는 푸른 여름의 향기만이 청량하게 코끝을 스칠 뿐이다.
어딘가 익숙하고도 따스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