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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4/80)

3화

또박또박 할머니의 꿈을 깨트린 희림은 속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남은 맥주를 비웠다. 보란 듯 할머니에게 삐죽거리긴 했지만, 막상 취기가 도는 머리로 마음껏 베고 누울 수 있는 것도 할머니의 무릎뿐이다.

“아아, 내가 2년 전에도 이 무릎에 푹 빠져서 못 일어났는데.”

“어이구, 그랬어?”

“응.”

쌓이고 쌓인 막대한 피로와 긴장감이 할머니 무릎 위에선 무방비하게 몰려왔다. 감추었던 어리광도 이런 순간에는 어김이 없다. 머리칼을 쓰다듬는 할머니의 손길에 스르륵 저절로 눈이 감겼다.

진도 1의 지진도, 난데없는 감투 같은 것도 일어난 적 없는 완벽하게 평화로운 그녀만의 시간이었다.

“있잖아. 시간이 너무 빠른 것 같아, 할머니.”

“우리 손녀가 왜 또 이러실까.”

“그냥. 아무것도 해놓은 게 없는 것 같아서.”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그간 한 번도 쉬지 않고 살아왔는데, 막상 오늘 무너진 가게 앞에 멍하니 앉아 있자니 막막하기만 했다. 그 텅 빈 기분이 워낙에 오랜만이라, 이렇게 취기와 함께 가슴을 울렸다.

“막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네가 왜 아무것도 아니여. 희림이 너는 누가 뭐래도 우리 청연의 자랑스러운,”

“상가 번영회 회장님 빼고. 청년회 회장님도 빼고.”

“……어쨌든 자랑스러운 할미 손녀지.”

뾰족뾰족 인간 고슴도치가 되어버린 희림조차 부인하지 못할 말을 찾아낸 할머니는 안도의 웃음을 흘렸다. 꼭 손녀의 기운을 북돋워주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더할 나위 없는 뿌듯한 사실이었다.

“희림이 너 어릴 때부터 꼭 반장 하고 회장 하고, 친구들이랑 전부 사이좋게 잘 지내고!”

“그럼 전교생이 몇인데 잘 지내야지.”

“그 누구더라. 아아, 맞다. 북안골에 감나무 집 손자!”

“…….”

지금은 없어진 어느 집을 떠올린 할머니는 크게 박수를 쳤다. 따박따박 받아치던 손녀가 대답이 없어진 걸 아는지 모르는지, 할머니는 열심히 손녀를 추어올렸다.

“걔도 영 삐딱하니 절대로 사람 안 될 거 같더니만 희림이 네가 끝까지 붙어서 챙겨줬잖여!”

“으응. 그랬었지.”

“그거 보라니까. 희림이 넌 타고난 게 정 많고 다정해서 어쩔 수가 없어 그러니까 여기에도 그렇게 오래 있었던 거고.”

앞으로도 그렇게 꼭 붙들어두겠다는 의지처럼, 할머니는 손녀의 두 손을 눌러 잡았다. 늘상 투덜거리긴 해도 천성이 다정한 손녀답게 세상 어느 것도 모른 척하지 않는다는 것이 할머니의 자랑이라면 자랑이었다.

그러느라 미처 손녀가 치를 떠는 무거운 직책에 방심했다.

“우리 한 회장님은 앞으로도 그럴 거여. 사람들 하나하나 다 챙기고 복도 많이많이 받고,”

“아니, 사양할게.”

불쑥 정면으로 돌아누운 희림이 할머니의 두 손을 스르륵 한쪽으로 내려두었다.

“동네 할머니든 길 가는 개든 그…… 감나무 집 손자든 누구든 내 앞에 나타나기만 하라 그래.”

“…….”

마지막에 잠깐 입안을 질근거리는가 싶던 희림이 천천히 두 눈을 떴다. 여전히 그날의 별빛을 담은 눈동자 위로 결연한 의지가 겹쳐졌다.

“악착같이 속여서 회장 감투 씌운 다음에 나 그냥 지옥 갈래.”

◇ ◆ ◇

이른 아침부터 읍내로 나온 희림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떡집 아저씨가 갓 나온 백설기를 쥐여줄 때까지는 그러려니 했지만 과일 가게 아저씨까지 억지로 쫓아와 사과를 떠안기자 무언가로 얻어맞은 듯한 강한 깨달음이 몰려왔다. 안쓰러운 얼굴로 제게 무어라도 안겨주려는 이들의 공통점을 찾아낸 그녀가 이를 질근거리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 네, 사람과 숲이 함께하는 푸른 인연, 청연군청 산림과의…….

“너 죽을래?”

- …….

과연 찔리는 것이 많기는 한지, 연주는 다짜고짜 욕설을 내뱉는 악성 민원인에게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다 싶은 희림이 미간을 강하게 눌러 잡았다.

“조연주! 내가 농민일보인지 뭔지 내 이야기 싣지 말라고 했지!”

- 아니, 그게……. 그래도 어떻게 그래. 우리 군수님도 상가 번영회 회장님이 그런 일을 당했으면 다 같이 도와야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러시고.

“……너 오늘 만약에 뒷산에 불나면 난 줄 알아라.”

산림과 공무원이 한가하다면 직접 할 일을 만들어줘야 한다. 얘가 이번엔 대체 뭐라고 써놨길래. 울상이 된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1도 지진이랑 상가 회장이랑 둘 중에 뭘 썼는데?”

- 어어, 그게…….

“만약에 둘 다라고 할 거면 그냥 입 다무는 게 좋을 거야. 산에 불 지른 다음에 유서에 네 이름 쓸 거니까.”

- …….

이어지는 침묵에 희림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확성기를 들고 불우이웃성금을 거두든가. 이 좁은 동네에 비밀이라고는 없으니 정말이지 죽어라 내모는 꼴이다. 하지만 평안한 죽음조차 회장 자리를 물려준 이후에야 가능했다.

- 근데 한희림 너 진짜 거기 찾아가려고?

“당연하지.”

아직 끊기지 않는 전화에서 들려오는 연주의 조심스러운 질문을 무시했다. 마음 같아선 저 기레기부터 요절내고 싶지만 구독자보다 발행자가 더 많은 만년 적자 신문에 그깟 이름 좀 올라봤자다. 제 팔자 꼬인 거야 어차피 청연 사람들 전부 아는 일이니 더 감출 것도 없었다.

딱 한 사람만 빼고.

“일단 가서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고 슬쩍 운도 좀 떼어보려고.”

- 그 사람이 만나는 준대?

“내가 지금 약속 잡고 사람 만나게 생겼어? 지옥이라도 쫓아가야 한다고.”

희림은 팔자 좋은 소리 좀 그만하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연주에게 화풀이할 것은 아니지만 저 역시 결코 농담하는 게 아니었다. 제가 이 모든 속박과 굴레를 벗어던지고 마음 편히 청연을 뜨는 방법은 오직 이 하나뿐이었다.

“거기 사장이 몇 년 전부터 호수 끼고 그 큰 땅을 다 사들였잖아. 벌써 임시로 지낼 건물도 하나 만들어놨다던데 부지가 워낙 넓어서 그것도 몰랐지 뭐야. 하여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어마어마한 부자라는 거 같은데 그런 사람이 왜 이 동네에 왔나 몰라. 거기다 얼마나 훤칠하고 젊은지…….”

다 됐고, 젊은 사람이라.

대낮부터 술에 취해 있던 부동산 오씨 할아버지가 떠벌리던 말을 되뇌던 그녀는 한 가지 단어에 꽂혔다. 그간 왜 동네 어른들이 저만 보면 젊다는 걸 강조하나 했는데, 제가 같은 입장이 되고 보니 오직 그것밖에 보이질 않았다. 그 남자가 그 큰 호수를 전부 다 사들였든, 눈이 부실 만큼 잘생겼든, 제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였다.

저 대신 상가 번영회의 회장이 되어줄 수 있는 젊은 사람인지 아닌지.

“…….”

새삼 입이 바짝 타는 그녀가 오솔길을 따라 서서히 드러나는 풍경에 걸음을 멈추었다. 사실 이곳이야말로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청연에 뿌리내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마음의 안식처라고 할까.

사시사철 푸른 호수가 가장 먼저 두 눈을 사로잡았다. 하고 있던 생각이 그 무엇이든, 자연의 일렁임 앞엔 잠시나마 말문이 막혔다.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를 둘러싼 짙푸른 녹음을 배경으로 호수의 은빛 물결이 잔잔하게 반짝였다. 정오가 조금 지나, 저렇게 눈이 부실 정도로 일렁이는 물결 위로 하얀 설원이 겹쳐질 때면 그녀는 이곳을 이렇게 부르고는 했다.

한여름에 만나는 겨울 같은 곳이라고.

“…….”

아니지, 내가 지금 뭘 하는 거람.

잠시 잠깐 넋을 놓았던 그녀가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이 호수는 더 이상 마음의 안식처라든가, 제 추억을 묻어둔 장소가 아니다. 엄연한 사유지로 주인이 있는 땅이었으니 이렇게 들어서는 것조차 조심해야 한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던 희림의 시야에 하얀색 건물 하나가 들어왔다.

“아.”

저기인가 보구나.

잠시 지낼 곳을 지어두었다니 아마 저곳인 모양이다. 임시 숙소나 다름없는 가건물이 아닐까 했는데, 한 발 한 발 가까이 다가설수록 규모나 디자인이 상당했다. 겨우 두어 달 보내고 말 곳을 저리 견고하게 짓다니. 연주가 보았다면 ‘역시 부자는 다르다’며 호들갑을 떨었겠지만 갓 이재민이 된 희림의 소감은 달랐다.

“……이 정도면 진도 9도 견디겠네.”

이제 그녀에게 모든 건물은 지진을 견디느냐 아니냐, 둘 중 하나로 나뉘어진다. 부러움 반, 감탄 반으로 진심을 흘리던 희림이 저도 모르게 벽으로 손을 올려보았다. 똑똑 노크를 하듯 두드려보자 그 견고한 울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진짜 튼튼하구나.”

“그렇게 지어달라고 했으니까요.”

“아아, 네에……. 에?”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그녀의 뒤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살랑이는 나뭇잎의 엷은 그림자와는 달리, 희림을 가로막은 남자의 그림자는 짙고 견고했다. 그녀가 짚은 건물의 벽처럼 단단한 그림자의 주인공은 목소리마저 무게감이 느껴졌다.

“아직 개방하지는 않았는데 여기까진 어쩐 일로.”

“죄, 죄송합니다.”

세상에나.

이렇게 갑자기 집주인을 만나게 될 줄 몰랐던 희림이 얼른 고개를 내려 붉어진 얼굴을 감췄다. 늘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를 부르며 대충 들어서던 집들과는 다르다는 것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하다 하다 무단침입자까지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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