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뭐라고? 누가 돌아왔다고?”
예상은 했지만 연주는 필요 이상으로 흥분했다. 역전 포장마차에서 나란히 소주잔을 기울이던 그녀는 소식을 듣자마자 잔 대신 대뜸 소주병을 들어 목을 축였다.
“강인하가 여기 왔다고? 그것도 삐까뻔쩍한 집까지 지어서! 하아, 어떡해!”
“……근데 너 갑자기 화장은 왜 하는데?”
알코올의 쓴맛으로 세상 쓴맛을 덮어보려던 희림이 눈앞에서 파우더를 찍어 누르는 연주에게 눈을 가늘였다. 주먹만 한 거울에 여기저기 고개를 돌려 비추는 연주의 자태가 예사롭지 않았다.
“조연주. 너 안정하 좋아한다면서.”
“야, 그럼 떡볶이 좋아한다고 순대 안 먹냐?”
“하아…….”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희림이 고개를 흔들었지만 연주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런 시골에서는 뭐 하나가 나타났다 싶으면 일단 잡아야 한다. 언제 누가 또 나타날 줄 알고, 재고 따지고 가릴 때가 아니다.
당장 저부터가 그럴 작정이기도 했고.
“강인하는 내 거야. 건들지 마.”
“야아. 그게 뭐야!”
“걔는 차기 회장님이야.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다고.”
다만 찜해놓고자 하는 목적은 연주와 조금 달랐다. 희림이 워낙에 비장한 의지를 불태우다 보니 연주도 그 기세에 눌린 듯 거울을 접어놓았다.
“아아, 그럼 그저께 군청에 소문이 자자하던 남자가 인하였구나!”
“……너도 걔 봤어?”
“아니. 이야기만 들었지. 무슨 조각상이 강림했다고 완전 난리 났었대. 토지 자료 좀 얻어 갈 수 있냐고 해서 건축과 정 계장님이 있는 거 없는 거 다 챙겨주다가 심장까지 내어줄 뻔했다잖아!”
“그래서 농민일보를 끼워줬냐?”
말을 말아야지.
더욱 속이 안 좋아질 것 같은 희림이 소주병을 기울였다. 쪼르르, 투명한 잔을 채우는 술이 제 눈물과도 같아 울컥했지만 그것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여자가 칼을 뽑았으니 언제까지 처져 있을 수는 없다.
“하여튼 강인하 어떻게든 구워삶을 거야. 아무 데도 못 가게 꽉 묶어놓을 거라고.”
“걔가 그래준대?”
“그럼 우리 동네 할머니들은 나한테 물어보고 회장 시켰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회장님에는 회장님.
친구가 저를 어떤 눈길로 보건 양심 같은 건 버린 지 오래다. 언젠가는 다가오고 말 ‘다음 달 마지막 주’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뒷목이 다 뻐근해졌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좀 서둘러야 할 거 같아.”
“그래도 강인하 만만치 않을 텐데. 걔 학교 다닐 때도 완전 장난 아니었잖아!”
“넌 그게 다 기억나?”
“그럼. 이제 와서 말이지만 나 그때 강인하 보러 학교 다녔거든.”
“…….”
이제 와서 말이지만 다 알고 있었다는, 그런 말은 필요치 않았다. 연주야 원래 늘 누군가에 반해 있던 사랑이 넘치는 아이니 놀라울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시절 강인하를 좋아하지 않았던 여학생을 찾아내는 것도 어려울지 모른다.
서울에서 온 잘생긴 전학생, 키워드 자체가 따분한 시골 학교를 뒤흔들기 충분했다.
“진짜 이런 데서 보기 드문 미모였지. 세상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 반항적인 눈매 같은 거.”
“뭐 확실히 반항적이긴 했지.”
그의 서늘한 눈매를 흉내 내어보려는 연주를 향해 희림은 지그시 턱을 괴었다. 손끝에 닿은 입술 위로 무심히 손가락을 놀려보았다.
“그뿐이야? 귀티가 아주 줄줄 흘렀잖아. 서울에서 엄청 부잣집 도련님이었단 소문도 있었잖아.”
“그런 거 말고 뭐 없어? 이렇다 할 추억 같은 거.”
“추억 어떤 거?”
“그냥…… 그런 거 있잖아.”
“뭐 다른 이유는 없어?”
뭔가, 강인하가 좋아할 것 같은 이유.
그렇게밖에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저도 모르는 걸 물어보는 그의 강하고 투명한 눈빛이 쉽게 잊히질 않았다. 마치 가슴 한가운데에 콕 박힌 모래알처럼 은근하고도 집요했다.
뭔지는 몰라도 찾아내기만 한다면 먹힐 것도 같았는데.
인하의 눈동자 속에 비치던 묘한 기대감에 그녀도 희망을 걸었다. 설령 없더라도 만들어내야만 한다.
“기억 좀 해봐. 아무거라도 좋으니까 강인하에 대해서라면 뭐라도 짜내보라고. 둘이 했던 말 중에서라도…….”
“없는데?”
간절한 그녀와 달리 연주는 덤덤했다. 얄밉게 어깨까지 으쓱거리는 친구에게 희림이 이를 질근거렸다.
“없긴 왜 없어! 조연주 너 이런 애야! 잘생긴 남자라면 20년 전에 짝꿍이 지우개 빌려주면서 했던 말도 기억하면서 무슨 강인하를 기억 못 해!”
“그거야 말을 했으니까 기억하는 거고, 강인하랑은 말 거의 안 했으니까 그렇지.”
“……뭐?”
“강인하 너랑만 말했잖아.”
그걸 정말 몰라서 묻냐는 듯한 연주를 보며 희림의 입술이 스르륵 벌어졌다. 아아, 그러고 보니 인하가 다른 아이들과 딱히 어울렸던 장면은 기억에 없다. 늘 창가에서 홀로 이어폰을 꽂은 채 노래를 듣고 있거나, 책을 보거나, 한 번씩 농구를 하는 정도가 다였다.
그마저도 제가 바라보면 찡그리듯 ‘왜’ 하고 고개를 돌려버렸지만.
“하여튼 회장님 너는 신종 자랑을 참 이상하게 하네. 강인하 네 거라고 찜해놓더니 너랑만 말한 것도 몰랐어?”
“그래도 남자애들이랑은 좀 어울렸던 거 같은데.”
“어울린 게 아니라 따른 거지. 원래 남자들은 좀 강한 사람한테 끌리는 법이잖아.”
슬슬 취기가 도는지 입가에 힘이 풀린 연주가 히죽거렸다. 그다지 표가 나지는 않지만 술이 오르는 것은 희림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난 걔 어떻게든 잡아놔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이 쉽지, 사람 잡는 게 어디 쉽냐. 그리고 우리 계장님 말 들어보니까 강인하 지금도 막 번쩍번쩍하나 봐. 차도 뭐 처음 보는 스포츠카 같은 거 타고 왔다는데 그런 애한테 뭐 부족한 게 있겠니?”
“상관없어! 일단 여기 왔다는 게 중요한 거라고!”
바로 이, 나의 구역에!
술김에 제대로 불이 붙은 희림은 개의치 않는다며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이제 와 생색내는 건 아니지만 강인하 그렇게 성공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내 덕이야. 걔 고2 때 전학 와서 학교도 잘 안 나오고! 내가 그렇게 울며 빌며 애원해서 학교 데리고 다니지 않았으면 어림도 없었을걸?”
“네가 언제 울며 빌며 했냐. 때리고 욕하고 그랬지.”
“아냐. 난 정말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각자의 기억이 다르건 말건 희림은 당당했다. 이렇게 자기최면의 단계에 다다라서라도 제 각오와 용기를 굳건히 하고 싶었다.
“솔직히 내가 지금의 강인하를 만든 거나 다름없어. 넌 몰라서 그래. 걔 절대로 학교 안 가겠다고 자기 좀 내버려두라고 얼마나 반항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아주 속이 부글부글 끓어가지고는.”
“알 만하다. 알 만해.”
연주가 정말이지 눈에 보일 것 같다며 킥킥거렸다. 반장이자 회장인 희림이 온 동네 말 안 듣는 아이들을 전담으로 떠맡은 건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다. 특히 본인이 살던 안온마을 일대는 교육청에서 ‘출석률 200프로 달성’의 한희림 공로비를 세워줘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너 그때 엄청 집요했잖아. 집에 막 찾아가서 같이 간다고 할 때까지 안 나가고 협박하고!”
“넌 그걸 언제 봤길래.”
“정하한테 들었지.”
“…….”
“음, 정하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한참 학교 안 나왔었잖아.”
동네가 동네이니만큼 할머니와 함께 사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정하 역시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 대신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으니 갑작스레 돌아가셨을 땐 꽤나 충격을 받은 것이 당연했다. 생전 반항이라고는 없던 애가 상이 끝나고도 며칠씩 나오질 않으니 역시나 그녀의 책임이 되어버렸다.
“예전에 정하가 그러더라. 너 매일 아침마다 걔네 집에 찾아와서 버텼다고. 부끄럽게 인하까지 끌고 와서 난리 쳤다며.”
“아니. 그거야 강인하 먼저 챙겨서 나오는 길에 어쩌다 보니.”
“완전 행패 부리고 사람 못살게 굴었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대문 앞에서부터 화내고 욕하고 소리 지르고.”
“……그, 그랬나?”
희림이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지만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머쓱했다. 저라고 인하까지 굴비 엮듯 끌고 오고 싶었겠냐만 정하 역시 자신의 소중한 친구였다. 이러다 졸업도 못 하면 어쩌려고. 온갖 감언이설에 화도 내고 욕도 하고 잠깐이지만 일말의 폭력도 썼다. 그때 대문 앞에 기대 있던 인하가 조금 놀란 듯 저를 바라봤던 표정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그 이후 강인하가 조금 더 순순히 절 따라나섰던 것도.
“역시 답은 힘이었나.”
“에이, 설마하니 정하도 남잔데 너 하나 못 이겼겠냐?”
“…….”
“그, 그래. 충분히 못 이길 수도 있겠다. 하긴, 꼭 남자가 여자보다 힘세라는 법은 없으니까.”
희림의 야무지게 꽉 쥔 주먹을 보던 연주가 부르르 고개를 흔들었다. 서로 마음에 둔 남자가 다르기는 했지만 어느 하나의 공통점쯤은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여튼 정하가 그러더라. 네가 몇 날 며칠 무슨 행패를 부려도 하나도 귀에 안 들어왔는데 딱 이 말 하니까 안 갈 수가 없더라고.”
“응?”
무심히 흘려듣던 희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마지막 잔을 들어올린 연주가 피식 웃으며 그녀와 잔을 맞췄다.
“꼭 같이 가주면 좋겠다고, 네가 진심으로 말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