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80)

10화

길고 긴 작업 끝에 노트북을 덮어둔 인하가 물을 들이켰다. 잠깐만 확인을 하려 했던 것이 벌써 세 시간을 넘어섰다. 한자리에 지나치게 오래 앉아 있다 보니 허리가 뻐근할 법도 했지만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나 있다 보니 별스럽지도 않았다.

다만 그사이에 해가 져버린 바깥 풍경은 조금 아쉬웠다. 누군가에겐 흔하디흔한 풍경일지라도 그에게는 꽤나 오랜 시간을 공들여 얻은 선물과도 같았다.

그러니 오래도록 담아두고 싶었다.

더 자세히, 가까이에서. 눈을 감아도 그려질 수 있도록.

이곳에 오고자 포기했던 것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리해야 했다. 잠시 꺼둔 휴대전화에 한가득 쌓인 메시지들을 확인한 인하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문밖으로 나섰다. 호수를 바라볼 수 있도록 놓아둔 전신 의자에 털썩 기대어 순서대로 처리해나갔다.

회사의 일들이야 미리 정리해두었으니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그 외의 일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 역시 어려울 것 없는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제게 메시지 하나 남기지 않은 상대에 대해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영업 임시중단, 자세한 상황은 추후에 공지하겠습니다.]

“……중단이라.”

SNS에 올라온 짧고도 짧은 공지사항이 지금으로서는 그녀의 유일한 흔적이었다. 어쩐지 나른해진 인하가 조금 더 고개를 젖혔다. 검은색 푹신한 의자에 파묻히듯 기대어 휴대전화를 높이 들자 머리 위로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형형색색의 디저트와 케이크들이 어둑해진 하늘 대신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보기만 해도 달콤한 사진에서 헤어나오기가 힘들다. 그나마 이곳으로 직접 오면 조금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이래서는 서울에서와 별다를 것이 없다.

그럼에도 돌아갈 마음 따위는 없다. 이제 막 시작인데 어딜 가겠다고. 한쪽 눈가를 찡그린 인하가 휴대전화를 닫았다. 

남자가 한번 칼을 꺼냈으면 뭐든 썰어 먹어야지.

뻐근한 뒷목을 받친 그가 검게 일렁이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흘러가는지, 어떤 색의 빛을 머금었는지, 하나하나 눈에 담아냈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풍경이건만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것에 대한 갈증은 어쩔 수가 없다.

조금 전 보았던 달콤한 것들과 한 잔의 술 정도?

그 두 가지만 있으면 지금은 딱히 아쉬울 것이 없다. 그렇지만 이곳은 서울이 아니다. 손만 뻗으면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있던 곳과는 달랐다. 알고 선택을 한 것이니 그 정도는 알아서 감수를 해야 한다.

아무리 전에 없던 갈증으로 목이 마를지언정.

“……안녕.”

“…….”

바람 소리에 바스락대는 잔디와 걸음 소리도 놓쳤다. 누워 있던 의자 뒤로 그녀가 고개를 들이민 순간, 인하는 허망한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알았을까. 달콤함과 술기운이 한꺼번에 배달될 줄은. 

“집에 없나 했더니 여기 있었네.”

“……너 술 마셨어?”

강하지 않은 취기에도 유독 그녀의 향은 강했다. 중얼중얼 달아오른 얼굴로 머리를 쓸어넘기는 희림을 보면서도 인하는 굳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조금 더 느슨하게 턱을 젖혔다.

“술 마셨냐고.”

“아. 으응!”

저와 가까이 눈이 마주치고도 뒤로 화들짝 물러나지 않는 것을 보면 취하긴 취한 모양이다. 오히려 더욱 가까이 다가서려는 걸음이 불안정했다. 인하로서는 굳이 말릴 것 없는 일이었다.

“술 그냥 아주 조금 마셨는데,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한테 할 말 있어?”

“……어어.”

정곡을 찔렸는지, 내쉬는 그녀의 숨결이 뜨거웠다. 본인은 알까. 술에 취하면 자신의 눈동자 가장자리로 발그스레한 빛이 일렁이는 것을.

“호, 혹시 너 다음 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 시간 있어?”

“있는데.”

“하아. 정말 다행이야. 너무너무.”

깊이 안도하는 그녀의 숨소리에 기쁨에 일렁였다. 정말이지 눈물이 핑 돌 것 같은 반가움에도 인하의 성마름은 더해졌다. 시간을 물었으면 약속을 정하든가. 팔걸이를 두드리는 손등에 벌써부터 푸른 핏줄이 돋아났다.

“다음 달 토요일에 시간 있냐 물어보러 한 달이나 일찍 온 거야?”

“아, 아니. 사실은 하나 더 있는데.”

“뭔데?”

“그게…….”

영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그녀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고양이처럼 문지르는 손길에 희림의 오목조목한 이목구비가 더욱 울상이 되었다. 이러다 정말로 눈물이 핑 돌기라도 할까, 인하는 어쩔 수 없는 한숨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또 청연 물이 어떻고 공기가 어떻고 그러려는 거면.”

“아니! 이, 이번엔 그런 거 아니야.”

“…….”

“이번에는 진심이야.”

전이라고 아니었겠냐마는 희림의 얼굴이 보다 간절해졌다. 취기에 기대지 않더라도 충분한 진심이라는 것은 떨리는 손길에서부터 느껴졌다. 느긋함을 지키던 그의 얼굴에도 서서히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뭐가?”

“그, 그러니까 내 마음은.”

“…….”

“네가…… 해줬으면 좋겠어.”

밤바람에 그녀의 말이 웅얼거리며 흩어지는 순간, 인하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한 팔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남자가 여유로운 척 구는 것도 한계라는 게 있다.

“나한테 해달라고?”

“으응.”

“…….”

청연이 이런 데였나.

놀라운 깨달음과 함께 이제는 그가 먼저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희림의 숨소리가 달아오를수록 인하의 머리칼은 더욱 흩어졌다. 

“하아아.”

뭘 해달라는 건지, 가슴에 머물던 열기도 금세 목을 타고 올랐다.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어진 인하가 단추가 두어 개 열린 와이셔츠의 목깃을 한 손으로 가볍게 흔들었다. 일단은 진정해야 했다. 취한 만큼 솔직해진 희림부터 붙잡아 앉혀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

“똑바로 말해봐.”

그게 뭐든.

“내가 너한테 뭘 해주길 바라는 건데?”

“해, 해줄 거야?”

“당연, 아니……. 뭔데.”

목젖을 넘긴 그의 말소리가 묘하게 거칠었다. 울먹이듯 희림의 바짝 달아오른 눈가를 정면으로 마주하자 지금껏 보았던 청연의 모든 풍경이 무의미하게 흩어졌다. 그 후로 들려오는 희림의 솔직하고도 잔혹한 말소리는 더욱 그러했다.

“……회, 회장님.”

◇ ◆ ◇

몇 시일까.

머리가 지끈했다. 최근 며칠간 머리를 조여오던 은근한 통증과 달리 지난 밤의 숙취는 대놓고 머리를 쪼아댔다. 그제야 어젯밤 자신의 행적이 드문드문 떠오른 희림이 눈을 번쩍 떴다.

“아…….”

혹시나 드라마에서처럼 낯선 침대 낯선 남자와 눈뜨는 게 아닐까 했는데, 당연하게도 제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저를 한심하게 내려다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지겹도록 익숙했다.

“아이고, 우리 회장님 인제 일어나셨네.”

“할머니.”

“아주 장해 죽겄네. 넌 그 나이에 무슨 술을 그렇게 퍼마시고 다니냐. 얼릉얼릉 일어나서 꿀물이나 마셔.”

상앗빛 사발을 들이미는 할머니는 대뜸 혀를 찼다. 그 연세에 하나뿐인 손녀라고 꿀물까지 타 왔으니 희림도 그 정성을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맑아야 할 액체가 매우 심란한 색상인 것은 짚고 넘어가야 했다.

“……꿀물이라며. 이게 뭐야?”

“아아, 그게 옆집 정 씨가 산에서 영지 캐 왔다고 회장님 좀 드셔보시라고.”

“그래서 꿀에 영지까지 탔다고?”

그게 다가 아닐 텐데?

그녀가 사발을 돌릴 때마다 가지각색으로 내리깔린 침전물들을 몹시 수상하게 바라보았다. 과연 할머니는 눈썰미도 좋다며 그녀의 어깨를 쳤다.

“귀신이여 귀신. 하여튼 넌 젊은 애가 몸에 좋은 걸 어떻게 그렇게 알아보고.”

“이게 지금 누가 알아보고 못 알아보고의 문제라고 생각해? 난 멀쩡한 눈이 있는데?”

“아니 그게 사실은 안골 오산댁이 얼마 전에 오미자 땄다고 가져온 거랑 철물점 양 씨가 헛개 말린 거랑 해서…….”

그러니까 할머니의 말을 요약하면 몸에 좋다는 것이란 좋은 것은 전부 때려 넣었다는 뜻이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이 동네 어른들은 뭐 하나 달라고 해서 그것 하나만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컵라면 물 하나를 끓여줘도 멸치 한 마리라도 넣어 육수를 내어주는 것이 이 동네의 인심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취지일지언정 이게 ‘안온마을 김 할머니 큰손녀’가 아니라 ‘신임 상가 번영회 회장’에게 주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왜 안 먹어? 뜨거울 때 어여 먹지 않고설랑.”

“됐어. 이런 거 다 군청 같은 데서 뇌물에 걸려. 할머니.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어휴. 아무리 시골 사람들이라도 이렇게 겁이 없다니까!”

“뭐어? 그런 거여?”

미처 거기까지 생각지 못했던 할머니는 안색이 달라졌다. 귀한 손녀에게 그런 죄를 뒤집어씌울 수가 없지. 얼른 그릇을 내려놓고는 희림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냉장고에 넣어놨던 거 얼릉 전부 다 돌려줘야겄네! 하여튼 누구 손녀인지, 똑똑하다니께!”

“그렇지?”

“그런 애를 어제 누가 그 꼴로. 쯔쯧.”

“…….”

부스스한 몰골로도 잘난 척해보던 희림이 ‘어제’와 ‘그 꼴’이라는 두 단어에 몹시 주춤했다. 마침 떠오르는 몇몇 잔상들과 겹쳐지자 안색이 점차 하얘졌다. 설마, 진심을 털어놓고 오겠다며 위풍당당 인하를 찾아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돌아왔던 것은 기억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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