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내가 여기 뜨기 전에 조연주 손목부터 잘라야지.”
부스럭, 오늘도 아침부터 혈압이 오르는 희림이 신문을 구겨버렸다. 관계자라고 해봐야 저밖에 더 있나. 어쩐지 꼬치꼬치 캐물을 때부터 예상했어야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감출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이제 확실히 제 마음도 정했겠다, 곧 공사까지 시작될 테니 그녀도 슬슬 정리해야 할 때가 왔다.
“자아, 할머니들! 여기 주목하세요!”
이름하여 새 회장님은 새 마을로!
마침내 원대한 계획의 캐치프레이즈를 정한 그녀가 회관에 모인 회원들 앞에서 박수를 쳤다. 아무리 저 혼자 민다고 해도 인하가 하루아침에 회장님이 될 수는 없다. 자고로 회원들의 열화와 같은 협조와 성원이 필요한 법이다.
얼마 전 양씨 할아버지의 일만 해도 그랬다. 그걸 딱 보면 모르나, 저 하나 벗겨먹겠다는 생각이 가득한 사람을 보고도 홀랑 넘어가버린 인하에게 속이 터졌다.
‘이 순진한 강인하 같으니!’
혼자 똑똑한 척은 다 해놓고 이런 데서 그리 허술한 것이 영 못 미더웠다. 이미 신문에까지 난 일을 되돌릴 수도 없다 보니 그녀의 마음은 더욱 바빠졌다.
“저기요! 여기 보시라구요!”
“……또 왜 그려.”
희림의 급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가 두 번이나 주목을 외치고도 막상 돌아본 것은 정씨 할머니 한 분뿐이었다. 그마저도 화투에 방해가 되니 조용히 좀 해달라는 경고와 귀찮다는 눈짓이 다분했다.
“기다려봐 회장님, 우리 이거 하던 것만 좀 마저 하고,”
“저 회장 안 해요.”
“…….”
떠들썩하던 회관이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싶더니 일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껄껄대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이구, 우리 회장님 오늘은 아침부터 그러시네!”
“그러게 말여. 빨라 오늘은.”
역시나 희림의 사퇴 선언을 지나가는 푸닥거리 정도로 생각한 정씨 할머니가 기세 좋게 화투장을 내리쳤다. 광이 나오는 걸 보니 오늘 운이 좋을 모양이었다.
“번쩍번쩍 아주 마을에 해가 둘이라도 뜨려나. 그러니까 회장님도 이제 그만하라니께. 어차피 취임식도 얼마 안 남았고.”
“아뇨. 저 다음 달에 서울 가요.”
“……뭐?”
“다들 표정이 왜 그러세요? 그럼 제가 영원히 여기 있을 줄 아셨어요?”
이렇게 순진들 하셔서야.
고양이 같은 눈매를 치뜬 희림은 제법 도도했다. 제 주위에는 왜 이렇게 순진한 사람투성이인지, 남은 기간을 생각하니 그녀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졌다.
“후임자도 찍어놨으니까 걱정 마세요.”
“후, 후임자?”
그럼 정말이라는 건가.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할머니들이 하나둘 제대로 돌아앉기 시작했다. 후임자 소리에 정씨 할머니를 포함한 몇몇 육십 대의 어린 회원들의 반발이 거세졌다.
“그건 안 돼. 나는 못 혀!”
“나, 나도 안 돼. 내가 어떻게 언감생심 회장님을 하겠다고!”
“걱정 마세요. 할머니들 안 시킬 테니까.”
“…….”
반발을 잠재우며 희림이 허리에 두 손을 짚었다. 벌써부터 난관이 예상되긴 하지만 이럴 때는 추억팔이가 제격이다.
“다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기 위에 북안골 감나무 집 할머니한테 손자 있었잖아요.”
“응? 그 잠깐 살다가 가버린 애 말이여?”
“네에. 걔가 다시 돌아왔거든요. 그리고 제가 한동안 지켜보니까 회장의 자질이 아주 뛰어나더라구요.”
인하에게 팔던 약을 할머니들에게라고 못 팔 것은 없다. 이제 대놓고 약장수로 나선 희림은 거리낌이 없었다.
“애가 아주 됐다고나 할까. 하긴, 인하가 고등학교 때도 표현만 좀 그랬던 거지 심성은 괜찮았어요.”
“그게 무슨 소리여. 걔는 인간 안 된다니까.”
“맞어! 인하인지 이놈인지 아주 키만 장승만 해서 어른들 봐도 밍숭밍숭하게 굴더니만 무슨 회장님을 혀!”
“…….”
강인하, 넌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았기에.
양쪽에서 난관을 맞은 그녀가 잠시 코끝을 문질렀다. 울더라도 나중에 서울 가서 혼자 울어야지, 여기서는 양쪽 그 누구에게도 틈을 보여서는 곤란했다.
“그건 잘 모르시는 말씀이라구요. 인하가 얼마나 변했는데, 아주 딴사람이 다 됐다니까요?”
“안 돼 안 돼! 사람 절대 안 변하지, 안 될 말이여.”
“그러게. 어디 언감생심 회장님 자리를 넘본다고.”
하지만 할머니들이 회장님 직책을 ‘누구나 탐내는 기사 작위 정도’로 착각하는 이상 이야기는 도돌이표였다. 희림은 어쩔 수 없이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여기 보세요. 신문 보이시죠?”
다시는 펼치고 싶지 않았던 신문을 높이 든 희림이 할머니들의 이목을 모았다. 할머니들 시력에 제대로 기사가 보이기는 하겠냐마는 최소한 청연에 굉장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인하가 이 땅 주인이래요! 아주 어마어마하게 성공을 했다구요!”
“……걔가 그렇게 돈을 벌었다고? 어쩌다가!”
“그걸 알면 제 가게가 망했겠어요? 하여튼 그 땅에 이거저거 시작하고 하면 얼마나 상권이 발달할 텐데. 그럼 외부에서 손님들도 더 많이 찾아올 거고 다들 두루두루 좋아질 거란 말이에요.”
모처럼 관심을 보이는 회원들을 향해 그녀는 열변을 토했다. 인하가 얼마나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이곳에 돌아와 새사람으로 태어났는지, 있는 것 없는 것 전부 끌어다 붙였다. 물론 그의 다정한 면모를 강조할 때는 가슴이 조금 찔리긴 했지만 마침 양심이 없어 다행이었다.
“왜 다들 말이 없으세요? 인하 잘할 거라니까요?”
“그치만 우리한테는 회장님이 있는데 어떻게…… 사람 된 도리로 우리 회장님이랑 쭉 가야지.”
“그려. 회장님이 어떤 회장님인데. 우리가 인두겁을 쓰고 회장님을 몰아낼 수는 없지 그럼.”
“아. 니. 요.”
몰아내는 게 아니라 몰려나는 게 소원인 사람이라고, 희림은 다시 한번 간청했다. 그럼에도 할머니들의 시무룩한 자책은 계속되었다.
“우리 회장님만큼 잘하는 사람이 어딨어. 우리는 그냥 우리 회장님이 최고라니까?”
“저거 봐. 회장님 마음 약해서 저러다 울겠네.”
“네에.”
울지언정 넘어가주진 않겠습니다.
짝짝, 철혈의 희림이 잠시 감격하던 척하던 것을 멈추고 박수를 크게 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전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무작정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물쭈물 망설이는 것이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 보였다.
“또 왜 그러시는 건데요? 인하가 못할까 봐 그러세요? 아니면 저한테 미안해서요?”
“그게 아니라…… 우리가 낯을 가리잖여.”
“……그르니까. 이 나이에 맨날 보는 사람만 보니까 낯선 사람 보면 영 마음이 좀 그렇고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에 희림이 주춤했다. 하긴, 낯선 사람을 볼 일이 드무니 낯을 가리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난관을 어떻게 풀어나갈까 고심하던 그녀가 신중하게 턱을 받쳤다.
낯을 가리는 이들에게 경계심을 줄이게 하는 방법이라면…….
“그래, 그게 좋겠네요!”
“……좋은 데가 여기야?”
마을회관 앞에 선 인하가 입안을 꾹 깨물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듯했지만 차마 하지 못하는 갈등이 찡그린 미간에 고스란했다. 크나큰 한숨과 함께 내뱉는 목소리가 극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반딧불 보여주겠다면서.”
“그치만 빛나긴 하잖아.”
널 향한 눈빛들이.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 선 할머니들을 힐끗거린 그녀가 기어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를 삼켰다.
“미안.”
“……하.”
미안하다. 진심으로 미안하다.
그녀도 사람인 이상 미안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눈 딱 감고 우기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한 번은 인사 와야 하잖아. 모르는 할머니들도 아니고 앞으로 계속 모른 척하고 살 것도 아닌데.”
“그거야 그렇다 치고.”
“제발, 싹싹하게 잘하라 이런 건 바라지도 않아.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냥 앉아만 있어줘. 응?”
희림이 기도를 하듯 손을 모으자 인하도 체념했다. 하지만 그의 입이 떨어지기 전에 회관의 문이 먼저 열려버렸다.
낯을 가리는 할머니들이 부디 극도로 낯을 가리는 강인하와 친해질 수 있기를.
그녀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맞잡은 손에 꼭 깍지를 꼈다. 전사처럼 살벌하게 회관으로 들어서는 인하의 뒷모습에 차마 바라보지 못하겠다는 듯 두 손에다 얼굴을 파묻었다.
“나는 인하 너 옛날부터 이렇게 성공할 줄 알았지!”
“나도! 어쩜 이렇게 인물이 번듯해가지고는, 낮에 걸어다니면 하늘에 해가 두 개나 떴나 하겄어! 아주 번쩍번쩍하네 사람이!”
“…….”
거기, 낯가리신다는 할머님들 어디 가셨습니까.
인하의 마을회관 입성 삼십 분 후, 희림은 멀뚱히 홀로 앉아 있었다. 정씨 할머니가 인하의 인사를 받자마자 입을 틀어막은 것을 시작으로 나머지 할머니들이 그를 포위하듯 둘러쌌다. 어깨를 두드리고 손등을 쓸어대며 다들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려 난리가 났다. 하지만 할머니들보다 더 의외인 사람은 단연 인하였다.
“내가 너 어릴 때부터 쟤는 큰 인물 될 거라고 될 거라고 염불을 외고 다녔다니까? 난 예배당에 다니는데!”
“그러셨어요?”
귀가 따갑도록 떠들어대는 할머니들 사이에서도 전혀 싫은 기색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주 다정하거나 살갑다고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제법 공손히 귀를 기울였다. 지금도 열 번째 같은 말을 반복하는 정씨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귓속말을 들어주는 중이었다.
“아…… 정말요?”
“그럼, 사실은…….”
둘이 뭐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