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설마 이 시간에 문을 닫으실 리는 없으실 테고.”
“아아, 사실은 오늘치 장사 다 해부렸거든. 그래서 그려. 원래는 내가 절대루 안 이러는데 오늘 완전 사람 하나 잘 물어서.”
“어떤 손님이었길래요?”
“말도 말어. 생긴 건 아주 구척 저승사자 같은데 뭐 아무것도 모르는 거 같더라고. 부르는 대로 한 푼 깎을 줄도 모르고, 아주 천치여 천치.”
“아아, 그렇구나. 천치구나.”
“응. 보니까 뭣 모르고 동네 놀러 온 모양이던데 인물값 덩칫값도 못 하고 어깨만 운동장처럼 커다래서는, 그래…… 거기 그짝처럼.”
“…….”
신이 나 떠벌리던 양씨 할아버지가 희림의 뒤에서 스르르 나타나는 구척장신의 모습에 흠칫했다. 찔리는 것이 많은지 눈을 피해봤지만 희림이 그리 둘 리 없었다. 그녀가 아주 여봐란듯이 인하의 팔을 잡아 바짝 끌어당겼다.
“강인하, 너 이리 와!”
누가 우리 애한테 사기 쳤어!
“진짜 천치도 아니고 뭘 자꾸 뒤로 가!”
“……아니, 난 뭐.”
난감해하는 인하의 사정 또한 그녀에게는 안중에 없었다. 그래도 단단히 붙어서 팔짱을 끼다시피 하자 그도 더 이상은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세상 어느 천치도 이렇게까지 가슴을 커다랗게 펼 수는 없는 법이다.
“할아버지. 들어보니까 이게 다 십만 원어치라구요? 제가 알던 가격이랑 아주 많이 다르네요?”
“어, 어어? 아니. 그게…… 내가 인제 거기서부터 시작을 하려고 했는데 그냥 쓱 돈부터 주고 가버리시더라고.”
“……진짜 그랬다구요?”
전깃줄을 들이미는 희림의 눈썹이 가팔라졌다. 고양이처럼 앙큼한 눈이 제법 사나워지자 할아버지는 머리를 긁어댔다.
“그, 그게 내가 회장님 친구분인 줄도 모르고.”
“친구 아니거든요.”
“……그럼? 혹시 친구 아니면 애인 같은 그런 건가?”
“차기 회장님 되실 분이라구요.”
그녀가 이 와중에도 치솟은 양씨 할아버지의 호기심을 전깃줄마냥 댕강 잘라버렸다. 애초에 동네 할머니들한테 쓸데없는 소문을 냈던 것도 전부 양씨 할아버지였다. 애인, 두 글자에 맞닿은 인하의 팔에 부쩍 힘이 들어가는 것도 관심 밖인 그녀는 할아버지를 강하게 응시했다.
“우리 인하는 저랑은 다르다구요. 저처럼 좋은 게 좋다 넘어가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니까요?”
“아, 아니 난…… 미안혀.”
“이러시면 곤란해요. 회장님이든 아니든 간에 정해진 만큼만 받으셔야죠. 정찰제 표준화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앞으로 이 치열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학연 지연 이런 거 싹 다 없애야 한다구요.”
그녀가 이때다 싶어 열변을 토하자 결국 할아버지는 주섬주섬 인하에게 받았던 돈을 돌려주었다. 그새 꼬깃하게 접어 넣은 돈을 보고 인하가 미간을 찌푸렸지만 희림은 가차 없이 거스름돈을 계산했다.
“자꾸 이러시면 저 그냥 안 넘어갈 거예요!”
“알았어, 알었어. 잘못했다니까. 내가 다시는 안 그런다니께.”
“…….”
“아니, 또 왜!”
간만에 웬 횡재수인가 했더니, 역시 개꿈이었다며 실망 가득한 양씨 할아버지가 아직도 그 자리에 떡 버티고 선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이 나이에 저승사자만 무서운 줄 알았더니 구척장신의 저승사자를 끼고 있는 회장님이야말로 오한이 들 정도였다.
“휴우, 정말 실망이에요. 아직 안 준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뭐, 뭘 안 줘. 돈 다 돌려줬잖여! 진짜여! 이번에는 거짓말한 거 아니라니께?”
양씨 할아버지의 숨이 가빠졌다. 속이라도 다 뒤집어 보여줄 것처럼 답답해하는 그에게 희림은 배시시 웃으며 두 손을 내밀었다.
“서비스 주셔야죠.”
관광객이 드문 평일이니만큼 젊은 사람들의 존재는 주목을 받기 충분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둘, 모두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미남 미녀라면 시선이 쏠리는 것이 당연했다. 특별히 옷을 차려입지 않아도, 반짝이는 장신구가 없어도 그럴 만한 이들은 알아서 빛이 나는 법이다. 하지만 오늘 시선의 절반은 공교롭게도 그들의 젊음이나 미모가 아닌 희림의 목에 쏠려 있었다.
“……너 그거 진짜 안 무거워?”
“응.”
양씨 할아버지에게서 강탈해 온 전깃줄이 얼마나 두툼한지, 꽃목걸이처럼 둘러맨 희림은 의기양양했다. 처음 받아 왔던 것의 족히 세 배는 되는 양이니 뻐근한 목에도 훈장이나 다름이 없다.
“좀 부끄러워도 이렇게 한번 다녀야 앞으로 다들 너한테 사기 칠 생각 못 한다구.”
“그래도 돈은 그냥 놔두지. 아까 할아버지 엄청 실망하시는 것 같은데.”
“안 돼. 악착같이 받아야 해.”
뭐든 좋은 게 좋다는 희림이 웬일로 강경하게 나오자 인하가 한 눈을 크게 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에게 가까이 오라 손을 까딱였다. 엉겁결에 굽힌 그의 고개에 발뒤꿈치를 든 희림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있잖아. 사실은 양씨 할아버지 2년 전에 수술하셨거든.”
“응?”
“간이 많이 안 좋으셔서 술 많이 드시면 안 돼. 그래서 절대로 쓸데없는 돈이 생기면 안 된단 말이야. 돈 생기면 꼭 술 드시니까.”
“…….”
소곤소곤, 그녀의 말소리가 귓가를 간질이자 인하의 목젖이 선연하게 드러났다. 애초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도 점차 희미해졌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도 딱 먹고살 정도로만 팔아주는 거야. 거기 할머니도 작년에 돌아가셔서 더는 그러면 안 된다 따끔하게 야단쳐줄 사람도 없고.”
“…….”
“그러니까 너도 앞으로 절대로 할아버지한테 바가지 써주면 안 돼. 알았지?”
약속을 받으려는 희림이 더 높이 발을 들자 인하는 막 그녀의 숨결이 닿을 것 같은 뺨을 들어올렸다. 머리가 어질했다. 분명히 무슨 말을 들은 것 같기는 한데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는, 그 소리를 했다간 희림이 다시 쇠막대기를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따스했다.
그깟 이유야 무엇이 되어도 좋을 만큼.
“하여튼 강인하 너도 그래. 이 동네 안 살아본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동네 철물점에서 달라는 대로 다…….”
그의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희림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이어졌지만 인하는 별다른 말을 않았다. 의기양양 앞장선 희림이 뒤를 몇 번이나 돌아보자 그는 듣고 있다는 듯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까칠한 인하가 조용해질수록 희림은 더욱 으쓱해졌다.
“그래도 이 정도면 너 몇 년간은 전깃줄 안 사도 될 거야.”
“응.”
“어쩌면 호수 전체에 불 들어오게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
눈앞에 푸른 호수가 보이기 시작하자 한결 들뜬 그녀가 말갛게 웃었다. 지금도 저렇게 예쁜데 조명 아래에서는 또 얼마나 아름다울지, 기대가 가득했다.
“외국 영화 같은 데서 보면 이렇게 불 다 들어온 호수에서 수영도 하고 그러잖아.”
“너도 그러고 싶어?”
“아니……. 그냥 그건 영화니까.”
잠시 생각해보는가 싶던 희림이 머리칼을 찰랑였다. 내내 말이 없던 인하도 그제야 느긋한 웃음을 되찾았다.
“그런데 너 아까 나보고 차기 회장님 어쩌고 그러던데, 아직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왜 멋대로,”
“아이, 참. 이거나 받아!”
잘 나간다 싶으니까 꼭 이러네.
그가 더 무슨 말을 하기 전에 희림은 대뜸 전선 꾸러미를 벗어내 인하의 목에 걸어주었다. 다시 그의 말문이 막히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와아, 진짜 잘 어울린다.”
“……한희림. 너.”
“생각해봐. 나 말고 누가 너한테 이런 거 선물해주겠어.”
상큼하게 눈을 가늘인 그녀의 웃음이 바람결에 흩날렸다. 부디 강인하가 이렇게 다음 달의 꽃목걸이까지 무사히 이어받을 수 있기를, 희림이 기도하듯 전선 끝을 만지작거렸다.
“그거 봐. 너 정말 나 없으면 어쩌려구 그래!”
“…….”
오늘은 이쯤 강조했으면 됐겠지.
마냥 뿌듯한 자신과 달리 눈을 내리깐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공연히 강인하 성격에 전선을 내동댕이치기 전에 희림은 벌써 저 멀리 물러나 손을 흔들었다. 입구를 지나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서야 고개를 든 그가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게.”
이렇게 두툼한 전선을 감고도 목이 이렇게 가벼울 수도 있다. 제가 했던 거라곤 그저 바가지 좀 써준 것뿐인데, 그 덕에 얻은 것들이 많았다. 그녀의 눈웃음과 속삭임, 그리고 듣도 보도 못한 전선 꾸러미까지.
“네, 박 비서님.”
휴대전화가 끊기기 직전에야 받아 든 그의 목소리가 담담했다. 아까 다 못 한 이야기 때문인지 박 비서의 주변이 시끄러웠다.
- 안 그래도 공사팀 만나고 왔는데 거기서도 아주 의욕이 대단하네요. 꼭 최고 기술자만 내려보내겠다고 단단히 약속을,
“아니요.”
호수를 향해 돌아선 인하가 오늘 얻어낸 최고의 깨달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좀 더 많이 허술하셔도 될 거 같습니다.”
◇ ◆ ◇
봄맞이 심층취재 – 청연호수 부지, 드디어 개발될 것인가?
몇 년간 방치되었던 청연호수 부지가 새 주인을 찾으며 새로운 사업에 대한 기대가 피어나고 있다. 12,000m²에 달하는 거대한 땅이 개발되면 청연도 다른 곳들 못지않은 휴양지로 거듭날 것이란 예측이다. 그동안 베스트셀러를 통해 얻은 명성과 달리 부족한 인프라와 볼거리로 많은 주민들의 아쉬움을 사고 있었던바, 지역 사회가 벌써부터 들썩이고 있다.
한편 익명의 관계자에 따르면 1차 업종은 초대형 카페로 지어질 전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