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야, 회장아. 우리 이러지 말고 정하네 가서 라면이나 끓여 먹자.”
“라면?”
“응. 비 오는 날에는 역시 라면이지. 그러고 보면 우리 비 올 때마다 맨날 라면 끓여 먹었는데.”
연주는 벌써부터 침이 고이는지 입맛을 다셨다. 하나뿐인 친구가 없는 양심을 쥐어짜며 괴로워하건 말건 연주는 저 멀리 책방의 불빛만 봐도 주르르 침이 흘렀다.
“희림이 너보고 끓이라고 안 해. 정하 시킬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야, 왜 그걸 정하 시켜!”
“그럼 네가 한강 물처럼 끓이는 라면 먹게 생겼냐? 너 기억 안 나? 라면 끓일 때마다 다 망했던 거.”
“내가?”
희림이 난생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눈을 크게 뜨자 연주는 저거 보라며 그녀를 아래위로 훑었다.
“너 다른 음식은 다 잘해도 간 맞춰야 하는 건 싱겁게 하잖아. 누가 이 동네 회장님 아니랄까 봐 손맛도 할머니들 입맛에 맞춰져서는.”
“……난 몰랐는데?”
“그럴 줄 알았다. 하여튼 너 라면 끓이면 물도 많은 데다 스프도 반만 넣어주잖아. 오죽하면 주는 대로 다 받아먹는 정하도 네가 끓인 라면은 매번 남기겠어.”
“그래도 우리 할머니는 다 잘 드셨단 말이야.”
“야, 그건 그냥 사랑인 거고.”
연주가 그녀를 크게 비웃었다. 이제 다 마셔가는 커피가 아쉬운지 기지개를 켜듯 어깨를 위로 쭉 들어올렸다.
“한 이틀 굶거나 병원에서 저염식 안 하면 죽는다고 통첩 받은 거 아니면야 누가 그걸 다 먹어주냐.”
“그래도…… 한 사람쯤은…….”
“한 사람 뭐?”
“아냐. 아무것도.”
멍하니 빗줄기를 바라보던 희림이 고개를 흔들었다. 정확하지도 않은 기억으로 저 승냥이에게 괜한 빌미를 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오늘처럼 비가 쏟아지던 하굣길, 비라도 그치면 가라 제집으로 이끌었던 그날. 끌어당긴 그의 셔츠 자락이 빗물로 눅눅하던 감촉은 아직도 선연했다.
살갗이 닿은 것도 아닌데 깜짝 놀라 손을 떼어냈던 것도, 그래놓고 막상 쳐다보자 할 말이 없어 라면을 팔아먹었던 것도.
“더 있어?”
막상 먹을래 물어볼 때는 대답도 시원찮더니 깨끗하게 비운 그릇에 웃음이 났던 것도.
“하여튼 커피 다 마셨으면 나가자. 비 와서 딱히 손님도 없을 건데 정하네 가서 라면도 끓여 먹고……. 야, 너 뭐 해?”
“아, 아니. 내가 하긴 뭘 해.”
그깟 라면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저를 질책하듯 희림은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비웠다. 하긴, 엊그제 일도 제대로 기억이 안 나는데 하물며 10년 전 일이야. 그 한마디로 수긍을 마쳤지만 오히려 입안에 남은 커피의 쓴맛처럼 심란함만 더해졌다.
‘입맛도 시원찮은 애가 무슨 카페를 하겠다는 건지.’
제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그러고 보니 저는 망했다. 수백억 빚을 끌어안은 인하가 망하면 어찌 될지, 흙탕물 속 작게 일어나는 소용돌이에 가슴이 덜컹했다. 인하네 집이야 워낙 최신식이니 저런 흙탕물은 없겠지만 마침 호수가 있었다.
인생의 끝자락에 빠져 죽기 딱 좋은 호수가.
“아……. 말려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말릴까.”
“한희림, 안 가? 비 다 그쳤는데 아직도 그러고 있으면 어떡해.”
약해지는 빗방울에 나설 채비를 하던 연주가 싱겁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비가 모두 멎었다. 양심과의 싸움에서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희림도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어보았다. 가을은 아니지만 비가 오면 시야가 부쩍 맑아지는 것은 변함이 없다.
말갛게 갠 하늘과 옹기종기 늘어선 작달막한 상가들, 군청 앞마당에 자리한 자그마한 화단에도 어느새 꽃봉오리가 맺혔다. 무심히 고개를 돌리던 희림이 화단 옆 무언가를 보고 눈가를 쓱 문질러보았다.
“연주야. 근데 저거 뭐야?”
“아아, 저거. 다음 달 네 취임식에 쓴다고 군수님이 미리 챙겨놓으라 했을걸.”
“…….”
잘못 본 게 아니구나.
희림이 화단 옆 사륜 트랙터 곳곳에 달린 화환과 리본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넘겼다. 지금 태평하게 남의 입맛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어디 가냐 외치는 연주의 부름도 무시하고서는 무작정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그러니까 내가 카페 하면 엄청 잘할 거 같다고?”
막 읍내에 다녀와 짐을 풀던 인하가 붙잡고 있던 휴대전화를 끊고 그녀를 마주했다. 숨을 쌕쌕거리며 문 앞에 선 희림은 막 말하는 법을 배운 예쁜 앵무새를 연상케 했다.
“응. 정말 잘할 거 같고 너랑은 천직처럼 잘 어울리는걸. 대박 날 거야!”
“어제는 한 달 안에 망할 거 같다면서.”
“아니, 안 그랬어.”
“…….”
“아니, 사실은 그랬는데 생각이 바뀌었어.”
커다란 눈을 슬그머니 옆으로 피하는 것도 그가 서울에서 키우던 앵무새와 비슷했다. 웃음을 꾹 참은 인하가 안으로 들어서라 했지만 희림은 아직 외워 온 말이 한참이나 남은 듯했다.
“여긴 경치도 정말 좋잖아. 사람들이 오면 한눈에 반할지도 몰라.”
“……그래?”
“응. 일은 차근차근 배우면 되는 거니까.”
꼭 그래야 한다며 희림의 눈이 더욱 간절해졌다. 양심을 도려낸 자리가 따끔거리긴 해도 꽃목걸이와 리본을 제 눈으로 본 이상 돌이킬 수가 없었다.
강인하는 누가 뭐래도 차기 회장님이다. 그래야만 한다.
“내가 그래도 너보다는 경험이 있으니까 가르쳐줄 수 있어.”
“흐음, 어제 말이랑 너무 달라서.”
“걱정하지 마. 난 어제의 내가 아니거든!”
희림이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듯 한 손으로 주먹을 단단히 쥐어보았다. 제 변덕 때문에 인하를 무작정 빚쟁이로 내몰아서는 안 된다. 책임감 하나는 타고난 그녀답게 여기까지 오는 길에 이미 결심을 마쳤다.
“내가 널 꼭 준비된 사장님으로 만들어줄게.”
“…….”
“웃어도 할 수 없어. 나는 진심이니까.”
웃음을 참듯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인하에게도 그녀는 당당했다. 이젠 꼭 회장직 하나 때문만은 아니다. 커피를 내리는 것부터 디저트를 만드는 것이나, 가게를 준비하는 과정 모두 손을 빌려줄 생각에 내심 가슴이 뛰기도 했다.
“그렇게까지?”
“응.”
“왜?”
“……그거야 약속했으니까 그렇지.”
점차 짓궂어지는 그의 반응에 희림은 모른 척 시치미를 떼었다. 인하가 저를 굉장히 수상쩍게 바라본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리 둘러댈 대답이 없다.
그렇다고 어제 이곳에서 커피를 내렸을 때의 그 기분이 너무 좋았다고는 할 수가 없지 않나.
오랜만에 느끼는 그 촉감과 느낌이 저도 모르는 가슴속 무언가를 건드린 것도 같았다. 아직은 스스로도 잘 알 수 없는 아리송한 감정이나마 어차피 이곳을 떠나면 다시 느낄 일도 없다. 그러니 이곳에 남은 시간이라도 그 기분을 온전히 누려보고 싶기도 했다.
길어야 한 달이 전부일 테니.
“너도 마음 변하면 안 돼, 응?”
“그러지 뭐.”
인하의 선선한 대답에도 희림은 썩 미덥지 않은 표정이었다. 저게 저렇게 쉽게 대답할 일이 아닐 텐데, 못내 밀려오는 불안함에 서성이다 그의 발치에 놓인 전선을 발견했다. 그 시선을 좇은 인하가 무심코 그것을 주워 들었다.
“아아, 아까 읍내 가서 샀어.”
“이걸 왜?”
“호수 앞 전등에 달 줄이 짧아서. 주인 할아버지 말로는 이게 제일 괜찮다던데. 길이도 이 정도면 쓸 만할 거라고.”
인하가 기다랗게 늘어진 전선을 둥글게 감아보았다. 서울에서 공사팀이 오기 전까지의 임시방편이긴 하지만 밤의 호수를 놓치고 싶지가 않아 이렇게라도 해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모든 설명을 듣고도 희림은 불 꺼진 전구마냥 눈가가 어둑했다.
“그래서 이걸 다 얼마 주고 샀는데?”
“글쎄, 십만 원쯤 했나.”
“……있잖아. 혹시 거기 역전에서 제일 끄트머리에 있는 다 쓰러져갈 것처럼 생긴 철물점이야? 주인 할아버지 코 옆에 큰 점 있고.”
“그럴걸.”
“……하아아.”
재깍 나온 그의 대답에 희림이 자신의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커피 내리는 거나 알려주며 소소한 행복을 누려보려 했더니,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녀가 영문도 모르고 멀뚱멀뚱 서 있는 예비 사장님의 팔을 끌어당겼다.
“뭐 해! 빨리 안 나오고!”
작은 시가지에서도 조금 더 외진 곳에 자리한 양씨 할아버지의 철물점은 대부분 파리가 날렸다. 그런 가게에 어쩌다 손님이라도 하나 왔다 가면 주인 할아버지는 서둘러 문부터 닫기 일쑤다. 그렇게 그가 룰루랄라 흥겨운 콧노래를 부르며 나서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걱정 말라니께. 나야 뭐 잔소리할 마누라가 있나. 오늘 눈먼 돈도 하늘에서 뚝 떨어졌겠다, 아주 이참에 코가 삐뚤어지도록…… 회장님?”
“네. 저랍니다.”
휴대전화를 귀에 받치고 가게 문을 걸어 잠그던 양씨 할아버지는 머리 위로 드리우는 음산한 그림자에 하던 일을 멈추었다.
“이게 누구여. 우리 희림이, 아니지. 회장님이 여기까지 웬일이셔. 할머니가 나 가져다주라 김치 줬구만!”
“아뇨. 우리 할머니가 호구도 아니고 왜요.”
“아, 아니여?”
“네에. 근데 할아버지 어디 가세요? 오늘 되게 기분 좋아 보이시는데.”
상냥한 듯 아닌 듯, 희림은 가게 문을 잠그려 하는 할아버지의 행동에 주목했다. 그가 민망한 웃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때를 놓치지 않은 희림은 얼른 셔터를 발로 쭉 밀어 올렸다. 몹시 아쉬워하는 할아버지를 보면서도 속눈썹 하나 끄떡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