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7/80)

16화

“이렇게 좋은 집도 짓고, 너 엄청 성공했나 보다.”

“그냥.”

“뭐 했는지는 말 안 해줄 거야?”

“회사 다니고, 이거저거 조금씩.”

잔을 내린 인하의 입가가 서서히 휘어졌다. 광고에나 나올 법한 그의 모습에도 슬슬 면역이 되는지 맞은편에서 몸을 굽힌 희림의 웃음도 보다 자연스러워졌다.

“그런 게 어딨어. 회사 다니면서 이거저거 하는 게 가능해?”

“너도 그렇잖아. 가게도 하고 회장님도 하고.”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주고받는 농담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한 팔을 턱에 괸 그녀의 눈이 꿈을 꾸듯 밝게 빛났다. 회사생활이라니, 제가 가보지 못한 길이라 그런지 종알종알 말소리에도 생기가 돌았다.

“그래도 강인하 진짜 의외다. 네가 멀쩡하게 회사를 다 다니다니.”

“나도 의외라서.”

“그게 뭐야.”

희림의 웃음소리가 더 높이 울렸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티셔츠 위로 하얀 쇄골이 드러나며 인하의 커피잔이 잠시 흔들린 것 빼고는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너야말로 서울에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왜 여기 남아 있는 거야?”

“응?”

“그렇잖아. 회장도 네가 싫으면 그냥 도망치면 그만이잖아. 이래야 할 이유가 있어?”

저에 대해 묻는 것은 처음이나 다름없는 그의 질문에 턱을 받친 희림의 고개가 더욱 비스듬해졌다. 글쎄. 그건 한 번씩 저 스스로도 궁금하던 일이지만 정확한 답은 모르겠다. 그럼에도 굳이 대답해야 한다면,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나는 떠나도 내 과거는 여기에 고스란히 남아 있잖아.”

“…….”

“난 여기서 나고 자랐으니까. 내 일부분이 영원히 여기에 속해 있을 텐데 어떻게 그걸 두고 비겁하게 도망을 쳐.”

손가락으로 뺨을 두드린 희림이 머쓱하게 웃었다. 저희 삼남매를 지극정성으로 키워준 할머니에 대한 고마움이 아니더라도 청연은 제 고향이다. 싫든 좋든 제 기억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생겼고 지금도 생겨나는 중이었다. 다만 그 복잡하고도 미묘한 마음을 인하같이 무덤덤한 놈에게 어찌 전달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냥 몸이든 마음이든 조금은 여기에 속해 있는 기분이거든. 솔직히 좋은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닌데 서울에서도 자꾸 생각이 나더라고. 나도 모르게 신경이 쓰이고 한 번씩 왜 이러나 싶기도 하고.”

“화도 나고?

“응. 화도 나고. 그런데도 정신 차려보니까 나도 모르게 커피를 내리고 있지 뭐야. 도저히 사람 힘으로는 안 되는 불가항력 같은 건가 봐.”

그가 넌지시 던진 대꾸에 희림이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봐야 기계에서 나고 자랐을 것 같은 강인하가 뭘 알겠냐마는, 당시의 제 마음은 그러했다. 쉽게 내던지고 떠날 수 없는 것도 그런 이유다.

“내가 말하고도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겠네. 하여튼 난 그랬다구.”

“……응.”

“참, 인하 너는 여기서 따로 하고 싶은 거 있어?”

볼썽사납게 혼자만 떠든 것 같아 희림이 말을 돌렸다. 고백 같은 걸 한 것도 아닌데 제 이야기를 이렇게 진지하게 꺼낸 적은 처음이라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도와주어야 한다. 집을 한 채 더 짓겠다고 하면 벽돌이라도 짊어질 것이고, 정원을 세우겠다고 하면 거름이라도 퍼다 줄 각오가 되어 있다.

“너도 여기까지 왔는데 하고 싶은 거 있을 거잖아.”

“나는…….”

인하가 천천히 잔을 내려두었다. 딱히 고심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충동은 조금도 보이질 않았다. 오히려 기다리고 기다린 것처럼 그녀를 향해 들어올린 눈이 그 어떤 섣부른 감상보다 진지했다.

“카페.”

◇ ◆ ◇

청연의 가을은 유독 비가 잦다. 예고 없이 쏟아지는 비에 누군가는 불평했지만 차가운 비가 더위를 씻어내면 그만큼 가을은 선명해졌다. 습하게 피어오르는 나뭇잎의 냄새라든가, 묶인 볏단에 고인 물방울이라든가, 비를 피한 처마 아래로 라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나는 생각했다.

지금은 가을이구나.

‘가을’ 2장,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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