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6/80)

15화

짧은 감탄사와 함께 웃음을 되찾은 할머니들의 반응이 다행스러우면서도 몹시 언짢아진 희림은 그제야 정면으로 돌아앉았다. 더 이상 이야기가 커지기 전에 사태를 진압해야 했다.

“저기요, 할머니들. 언제까지 이러고 계실 거예요.”

“응? 뭐가. 우리야 뭐 맨날 이러고 노는데.”

“그러니까요!”

바로 그게 문제라며, 희림이 할머니들을 한 분 한 분 주목했다. 안 그래도 한번 꼭 짚고 넘어가려던 차이니만큼 매섭게 눈에 힘을 실었다.

“지금 우리 마을이 상당히 중대한 기점에 서 있단 말이에요.”

“……중대 뭐?”

“하여튼 그렇게 떠도는 소문 같은 거에 휩쓸리면 안 된다구요!”

앞으로 떠돌 더 크고 자극적인 소문들을 의식한 그녀가 손가락을 휘저었다. 뒤에서 보면 두둥실 하얀 솜사탕 같은 할머니들의 머리가 손가락을 따라 유연하게 움직였다.

“앞으로 관광객들 더 많아질 건데 우리가 딱 중심을 잡고 손님을 대접해야지 이거저거 뒤에서 입 대고 수군거리면 손님들 입장에서 어떨지 생각해보셨어요?”

“아, 아니.”

“내 이러실 줄 알았지!”

이 순간만큼은 점쟁이가 따로 없는 희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죄인처럼 수그러드는 할머니들의 어깨가 가엽기는 했지만 지금 희림에게 세상에서 제일 가여운 존재는 저였다. 고로 거리낄 것도 없다.

“방금 말씀하셨던 그…… 정말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웃음이 막 나네요 정말.”

“미, 미안혀.”

“하여튼 그것도 말이 안 되잖아요. 가녀린 여자가 구척장신 남자를 업고 다니는 게 가능하다 생각하세요?”

“그게 우리가 한 게 아니라 철물점 양 씨 그 인간이…….”

“그 할아버지 열에 아홉은 술주정인데, 어제 역전 간 것도 술 마시러 간 게 뻔하지 않겠어요?”

뻔하든 뻔하지 않든 뻔해야만 했다. 아아, 이미 수긍하기 시작한 할머니들의 얼굴에 희림은 끝까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분간 제가 특별히 이런 일에 신경을 좀 써야겠네요. 동네 위신과 발전을 위해 넘어갈 수가 없다구요.”

“어어. 주의할겨.”

“앞으로 할머니들도 어디서 말도 안 되는 거 보거나 들으시면 ‘그냥 내 눈을 한번 씻고 말자’ 그런 마음을 먹으셔야 해요. 진짜진짜 이건 좀 그렇다 싶으신 건 저한테만 먼저 제보해주세요. 제가 먼저 듣고 검열을 좀 해야겠으니까. 아시겠어요?”

멋대로 ‘특별 소문 단속 주간’을 선포한 희림이 도망치듯 대문을 빠져나갔다. 홀린 것처럼 그녀를 바라보던 할머니들은 얼음이 동동 뜬 미숫가루를 한 모금씩 마시고서야 말문이 트였다.

“……아따. 우리 회장님이 아주 일 처리 하나 시원시원하시네!”

“내 말이!”

“저렇게 잘하실 줄 알았으면 진작 시켜드릴걸. 우리가 너무 무심했다니께.”

서로 고개를 끄덕여가며 신임 회장님을 칭송하던 그들은 어느 순간 고요해졌다. 남의 이야기 안 하면 이제 뭘 해야 하나.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다 보니 서서히 몸이 꼬이기 시작했다. 결국 가겟방 정씨 할머니가 눈치를 살피며 슬쩍 운을 뗐다.

“그래서 말인데, 나도 솔직히 어제 양 씨 이야기 들으면서 좀 말이 안 된다 싶긴 싶더라니까.”

“왜애? 또 뭐라 해? 뭐가 또 있대?”

“아니 뭐. 아냐 됐어. 우리 회장님이 입단속 잘하라고 하셨는데.”

정씨 할머니의 줄 듯 말 듯 애태우는 스킬이 ‘별거 아니라’는 손짓으로 정점을 찍었다. 둘러앉은 할머니들의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그래도 회장님이 언제부터 말하지 말라고는 안 하셨잖여!”

“그렇지!”

누가 출마도 안 한 회장 뽑아준 이들 아니랄까 봐 손발이 척척 맞았다. 결국 정씨 할머니가 못 이기는 척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게 여자가 막 남자를 업었다가 안았다가 하면서 골목을 왔다 갔다 하다가,”

“하다가, 뭐? 뽀뽀라도 했대?”

“쇠막대기를 들더라니까.”

차라리 뽀뽀를 했으면 이렇게 찝찝하지는 않지, 난데없이 쇠막대를 들다니. 양 씨의 술주정 설은 더욱 신빙성을 더해갔다. 

“아주 개 잡듯이 쇠막대기를 휘두르다 제풀에 지쳤는지 남자고 막대기고 그냥 길에 싹 다 던져놓고 가버렸다잖여.”

“남자가 안 쫓아가? 화도 안 내고 그걸 그냥 둬?”

“그러니까.”

말을 꺼낸 정씨 할머니조차 영 긴가민가한지 쯔쯧 혀를 찼다. 하라는 뽀뽀는 안 하고 쇠막대를 들었으면 싸움이라도 제대로 하든가.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도 여자 못지않게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그냥 그 자리에 한참을 기대서 혼자 큭큭대더라지 뭐여.”

◇ ◆ ◇

“안녕. 나 들어가도 되지?”

이왕 뻔뻔해지기로 한 희림은 문 앞에 기대선 인하를 보자마자 상큼한 웃음을 지었다. 뚱한 얼굴이 제대로 웃어본 적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가 왜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보는지는 모르지 않았다.

“잠은 좀 잤어?”

“아니. 너한테 얻어맞은 데가 결려서.”

“…….”

전말은 이러했다. 어제 터무니없이 제 등에 들러붙은 그를 떨쳐내려 골목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다 결국은 손에 잡히는 대로 쇠막대기를 집어 들었다. 그 일련의 과정이 동네에 어찌 퍼졌는지를 떠올리던 희림은 깊은 한숨을 삼켰다.

“때리긴 언제 때렸어. 그냥 시늉만 한 거지.”

“원래 뭐든 제대로 안 하고 시늉만 한 게 더 아프거든.”

“무슨 소리야 그게.”

총총 부엌으로 온 그녀가 부스럭대다 말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인하는 기분이 풀리지 않는지 싱크대에 걸터앉았다. 

“그러니까 남자한텐 책임질 수 있는 소리를 했어야지.”

“……남자는 무슨.”

구시렁거린 희림이 그를 흘겼지만 어쩐지 다시 목뒤가 간지러운 느낌이다. 귀와 목에 닿던 그의 숨결이 떠오르는지라 괜히 싱크대에 앉아 있는 인하를 의식했다. 

막 씻고 나왔는지 아직도 물기 어린 머리칼이 촉촉했다. 벌어진 하얀 셔츠 사이로 단단한 가슴이 드러날 듯 말 듯 비쳤다. 씻어둔 포도 한 알을 입가에 가져가던 그가 ‘왜?’ 하고 바라보자 희림은 냉큼 눈을 돌려버렸다.

‘쟤는 안 그래도 심란한데.’

매해 여름 느지막이 온 마을에 달달한 포도 향이 넘쳐나는데, 왜 남의 집에서 생전 포도 구경도 못 한 사람마냥 넋을 놓는지 알 수가 없다. 올여름에는 포도를 한입 가득 먹어야지 결심하던 그녀가 문득 주춤했다.

올해 여름에는 내가 없겠구나. 

“……너 왜 그래?”

바로 저놈 덕에.

“한희림?”

“아아. 네 말대로 제대로 해보려고.”

저를 바라보는 인하의 의아한 눈에 희림은 다시 손이 바빠졌다. 다시 딴생각이 들기 전에 챙겨 온 드립 커피도구와 원두를 꺼내자 인하의 의아함이 더해졌다.

“그건 왜? 커피 여기도 있는데.”

“어제 네가 정하네서는 안 먹는다고 해서.”

“아…….”

“그러고 보니까 너한테 계속 대접만 받는 것 같아서. 내가 너 여기 있는 거 생각해보는 동안 전부 도와준다고 했잖아. 그래서 가져온 거야.”

그와 눈이 마주치며 빨라졌던 말이 서서히 그녀의 템포를 찾기 시작했다. 사실 다른 것을 해줄 만한 돈이 없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가장 자신 있는 것이 바로 커피와 디저트였다. 수동 그라인더에 원두 가는 소리가 사각사각 예쁘게 울렸다.

“아쉽네. 가게만 그렇게 안 됐으면 우리 가게에서 해줬을 텐데.”

“그거야 뭐.”

“그치만 멀리서 마시러 와주는 분도 계시고 그랬어. 정말이야.”

생각해보면 그다지 오래전 일도 아닌데, 워낙 짧은 사이에 온갖 일이 몰아치다 보니 그조차도 먼 옛날만 같다. 떠날 결심을 해서일까. 커피를 내리는 손길에도 더욱 정성과 미련이 묻어났다.

쪼르르, 한 방울씩 떨어지는 커피를 보며 그녀가 능숙하게 속도를 조절했다. 청연에서 유일하게 제가 좋아서 했던 일이다. 꿈도 희망도 여과지 위 커피처럼 부풀어, 가만히 지켜보다 보면 시간이 어찌 가는지도 몰랐다. 수십 번의 실패 끝에 처음 제대로 구워낸 빵을 들었을 때의 기분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때 생각을 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곤란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 미안. 이제 됐어.”

또 한눈을 팔아버렸구나.

이번에도 어김없이 소리 없는 미소를 짓던 희림이 머쓱하게 등을 세웠다. 딱히 제게 눈총을 주지는 않지만 제가 대접하겠다 멋대로 쳐들어와놓고 인하에게 못 보일 꼴만 보인 것 같다.

“이제 마셔.”

“……응.”

그와 어울리는 푸른 잔에 옮겨 담아 내밀자 인하는 의외로 단정하게 자리를 잡았다. 대충 걸터앉아 마시는 시늉이나 할까 했더니 제자리에 앉아 잔을 드는 모습이 어느 레스토랑에 데려다 두어도 될 만큼 흠잡을 데가 없다. 

하여튼 의외라니까.

멋쩍어진 희림이 홀로 중얼거렸지만 그 덕에 괜한 긴장이 더해졌다. 앞치마에 손을 닦아내며 그의 반응을 기다리는 시간이 초조했다. 긴장하면 다른 말이 나오는 것은 그녀의 오랜 버릇이었다. 

“그런데 인하 넌 여기서 뭐 할지는 생각해봤어?”

“나?”

“참, 서울에서는 뭐 하고 살았는지부터 물어봐야겠구나.”

그러고 보니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명색이 차기 회장님 되실 분인데, 제가 너무 무심하다 싶었다. 커피에 대한 인하의 반응도 궁금하긴 하지만 별것 아닌 걸 물어보는 자체가 생색을 내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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