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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5/80)

14화

심지어 손에는 쇠막대기까지 들려 있지 않은가. 강인하가 아닌 산짐승이 내려왔다 해도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네가 뭘 좋아할지 생각하다 보니까. 정하처럼 이렇게 몸으로 대충 때울 수도 없는 일이고,”

“왜 안 되는데?”

“응?”

나름대로 주도권을 잡아보려던 희림이 처음부터 주춤했다. 하지만 인하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얼마나 이를 세게 물었는지, 가볍게 걸친 검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모습조차 사냥을 앞둔 맹수처럼 날렵했다.

“걔는 되고 왜 나는 안 된다는 건데?”

“……그게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정하는,”

“뭐가 그렇게 대단하기에.”

“…….”

“아니면 내가 부족해?”

노을처럼 저무는 목소리에도 음산함이 가득했다. 그런 그를 한참이나 넋을 놓고 바라보는 그녀 앞에서 인하는 짙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안정하는 아주 끝까지 눈을 못 떼고 뭐라도 하나 더 해주려고 한 몸처럼 붙어 난리더니 나는 못 해주겠다는 이유가 뭐냐고.”

“아…….”

도대체 어디서부터 본 거람.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드디어 그가 서 있었을 거라 추정되는 골목 맞은편의 작은 틈을 발견했다. 20년 넘게 이곳에 살면서 있는 줄도 몰랐던 공간에 헛웃음이 절로 흘렀다.

“웃어?”

“응. 웃어.”

인하의 기세가 더욱 사나워지건 말건 희림의 웃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쇠막대기를 바짝 잡고 있던 손에서도 힘이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

“좋아. 그럼 나도 네가 하는 일 도와주면 되는 거야?”

“뭐?”

“으이그, 진작 말하지!”

난 또!

장난스레 고개를 기울인 그녀의 웃음이 조금 더 커졌다. 돈도 힘도 안 되면 뭘 노려야 하나 고심하던 차에 장본인이 직접 정답을 가져오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이런 거면 이틀이나 걸리지도 않았지.”

“이런 거?”

“정하처럼 몸으로 때우라며. 그렇게 쉬운 걸 가지고.”

어차피 저야 일하는 데는 이골이 났으니 그런 쪽으로는 맞춤형 인재였다. 인하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그녀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말만 해. 내가 너 해달라는 대로 뭐든 다 해줄게.”

“다?”

“응. 내가 이 동네 유지잖아. 너 여기 자리 잡는 거부터 가게 할 거면 그거 허가받고 준비하고 전부 다 같이 봐줄게!”

“……그게 다야?”

“아니. 아니 아니!”

‘뭐든 다’에서부터 급격히 누그러진 인하였으니 희림도 보다 적극적인 공수표 남발에 애썼다. 그래봐야 다음 달 마지막 주까지, 겨우 한 달 반 정도의 기간이니 2년간의 무급 노동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였다.

“진짜 사소한 거 하나하나까지 다 도와준다니까? 예기치 못한 사고라거나 한밤중에 전기가 나간다거나 아아, 전에 네가 나 술 취했을 때 데려다준 것처럼 나도 똑같이 데려다줄 수도 있어! 업으라면 업고 뛴다면 뛴다고!”

“……진짜?”

“그럼! 난 약속은 꼭 지켜!”

믿어달라 가슴을 두드리는 그녀의 고양이 같은 눈매에 인하가 오늘 처음으로 입가를 비스듬히 끌어올렸다. 유순해진 강인하, 이때를 놓치지 않으려는 희림이 닫힌 셔터를 두드렸다. 청년회 회장 2년 차, 제대로 배운 거라고는 뭐든 이름 쓰고 도장부터 찍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그러지 말고 안에 들어가서 자세히 이야기할래? 내가 커피 만들어줄게.”

“됐어.”

“왜애. 나 진짜 커피 잘 만들거든.”

“그러니까 그걸 왜 안정하네서 하겠다는 건데?”

“…….”

책방에서 커피를 타면 잡혀가는 것도 아닐 텐데 고고히 턱을 든 인하는 강경했다. 당장 계약서를 적는 건 무리겠거니, 아쉬움을 삼킨 희림이 살랑이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쇠막대기를 치켜들고 싶어도 아직까지는 자신이 아쉬운 것 많은 을의 입장이니 비위를 맞춰줘야 한다.

“알았어.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얼른 가봐.”

“너는?”

“난 정하 올 때 다 됐으니까 열쇠 주고 가야지. 너도 일 있어서 나왔을 텐데 얼른…….”

툭, 가게로 돌아서는 그녀의 오른쪽 어깨가 무거워졌다. 절 짓누르는 무게감의 정체를 돌아볼 것도 없이 푸른 향기가 코끝에 감돌았다. 나른하게 젖은 음성이 이번엔 대놓고 귓가를 스치자 얼어버린 희림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미, 미쳤어? 지금 뭐 하는 거야?”

“업고 간다며.”

그가 자신의 의지를 보이듯 두 손을 마저 올렸다. 느릿느릿, 어깨에 하나씩 내리 닿는 기다란 손가락이 그녀를 꼼짝없이 조여왔다. 이러다 입술마저 붙어버리기 전에 희림이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 속닥거렸다.

“장난치지 마. 저기 사람들 있잖아.”

“나 취했다고.”

후우, 작게 모은 그의 입술에 과연 엷은 취기가 올라왔다. 마지막 기차가 들어서는 소리가 아스라하게 환청처럼 들려왔다. 저 끝에 어른들이 있다는 말이나, 아까까지는 멀쩡하게 서 있지 않았냐는 말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가게 앞 난간의 좁은 틈에 희림을 몰아세운 그가 취하기로 작정했다면, 그리되는 수밖에.

“제대로 업어. 안아도 좋고.”

◇ ◆ ◇

다음 날 희림이 무너진 카페에서 물건을 정리해 돌아왔을 땐 마루에 온 동네 할머니들이 한가득이었다. 대충 인사만 하고 모른 척 방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마침 들려오는 이야기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러니까 어젯밤에 역전에서 젊은것들이 막 끌어안고 난리가 났다고?”

“그렇다니께!”

“…….”

막 신발을 벗어내려던 그녀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어젯밤 역전. 어느 도시에나 있을 법한 흔한 풍경이겠지만 청연에서는 드문 일이다. 최소한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로는 딱 저 하나뿐이기도 했다.

“아이구 회장님! 이제 오셨어!”

“아아, 네에.”

도망치기는 늦은 데다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반기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처음부터 자신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희림이 마지못해 돌아서자 행동대장인 가겟방 정씨 할머니가 대뜸 그녀의 손목을 잡고서 끌어당겼다.

“아니, 번영회 회장님이 이런 일에는 나셔주셔야지!”

“……또 왜 그러세요.”

“어젯밤에 철물점 양 씨가 읍내 나갔다가 아주 요사시러운 꼴을 봤다지 뭐여!”

“…….”

‘뭔데요’라고 묻고 싶기도, 묻고 싶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줄줄 나오는 것이 이 동네 할머니들의 룰이었다. 프로답게 한 뜸을 들인 정씨 할머니는 그렇고 그런 소문 하나에도 힘을 바짝 주어야 할 포인트를 알고 있었다.

“역전에 그 어디냐, 정하네 서점 근처! 거기서 여자가 남자를 뒤에서 막 껴안고 그러다가 양 씨가 술 사서 나올 때 보니까 이번엔 또 다른 남자를 끌어안고 난리가 났다지 뭐야!”

“세상에나! 아주 남사스러워서 죽겄네!”

“그러게 말이여!”

기다리던 할머니들의 추임새까지 이어지자 희림은 입맛이 모두 떨어졌다. 서 있을 힘도 없어 대충 마루에 주저앉자 정씨 할머니를 필두로 할머니들이 그녀에게 다가앉으며 손부채질을 해주었다.

“우리 회장님 아주 더위 먹겠네! 하여튼 우리 회장님은 이렇게 죽으나 사나 동네 하나 살려보겠다고 쫓아다니는데 외지에서 놀러 온 것들이 아주 못쓰겄어!”

“……화,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아니여. 양 씨가 아주 피를 토하면서 설명을 하는데 이건 진짜다 싶더라니깐!”

“…….”

사람이 어디 그런 일에 피를 토해서 되겠냐 따지고 싶었지만, 희림이야말로 딱 지금 피를 토하고 싶어졌다. 그러고 보니 역 근처에 사람들이 좀 있다 싶긴 했지만 설마하니 자신들을 봤을 줄은 몰랐다.

“음, 그냥 그럴 수도 있죠. 물론 저야 잘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

“아이고, 우리 회장님이 이렇게 순진하시네! 시퍼렇게 젊은 남녀가 붙었는데 사정은 무슨 사정!”

정씨 할머니의 노골적인 너스레에 왁자지껄 웃음이 한바탕 쏟아졌다.

“아주 둘이 안았다가 업었다가 골목을 휘젓고 다녔다잖여!”

“남자가 아주 여자한테 절절매나 보네. 그렇게 남의 동네까지 와서 예쁘다고 업고 다닐 정도면!”

“아니 아니.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업고 다니더라던데?”

“어이구, 웬일이여.”

“서울에도 힘센 여자들이 많은가 벼. 난 또 우리 회장님이나 그러는 줄 알았지.”

“…….”

음, 가만 보자.

할머니들의 시선이 하나둘 희림에게 모여들었다. 보이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다. 저 멀리 대문 밖 한 점으로 시선을 모은 그녀가 자기최면으로 버텨내자 다른 할머니 한 분이 그럴 리 없다며 끼어들었다.

“에이, 우리 회장님 어제 읍내 안 나갔잖여!”

“나갔는디?”

“…….”

과일을 내어오던 할머니가 멋모르고 한 대답에 남은 할머니들의 시선은 더욱 집요해졌다. 어느새 웃음소리까지 그친 오목한 앞마당에 의심이 가득 고였다.

“뭐여. 양 씨가 다른 소리는 안 해? 어떻게 생겼다 말 안 했어?”

“하지. 남자는 아주 구척장신에 멀리서 봐도 인물이 아주 훤칠하다고!”

“여자는?”

“아주 세련됐더랴. 티비에 나오는 그 뭐냐, 미스코리아들처럼!”

“아아…….”

잠시만요. 왜 거기서 의심을 푸는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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