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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14/80)

13화

“짜잔!”

겨우 아이스크림 하나 사줘 놓고 생색이다 싶겠지만, 당시의 이곳에선 겨우 아이스크림 하나마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제대로 된 마트며 배달은 꿈도 꿀 수 없는 곳이니 이런 냉동식품을 조달하는 법은 하나뿐이었다.

“읍내에서 사서 거기서부터 미친 듯이 달렸어.”

“……누가 그러래?”

“약속했잖아. 난 약속은 꼭 지킨다구.”

아침부터 아이스크림을 내미는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사실은 쌍둥이 동생들에게 줄 간식을 사는 김이었으니 고생이랄 것도 없었다. 웬일로 저 까칠대마왕이 순순히 학교까지 따라와줬으니 이 정도 보상은 해주어야 한다.

“너 학교 군소리 없이 가면 내가 어마어마한 보상 해준다고 했잖아.”

“잘도 어마어마하네.”

“왜. 그래도 맛있지 않아?”

빈정거리는 그의 헛웃음에도 똑같이 눈을 가늘여주었다. 기껏 가져온 보람도 없이 녹아내리기 전에 하얀 아이스크림의 포장을 뜯어 건네주었다. 차마 뿌리치지는 못하겠는지 손에 들고도 눈을 찡그리는 그에게 조바심을 냈다.

“얼른 먹어봐. 응?”

“……넌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응?”

“내가 학교를 가건 말건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어디 들어나 보자는 그의 한숨이 오만했다. 하지만 이쯤에서 얼굴이 빨개지거나 물러날 줄 알았다면, 저 도시 놈은 뭘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것이었다.

“나도 사실 그거 되게 궁금하거든.”

“……그런데 왜.”

“그러니까 강인하 네가 먼저 선생님 찾아가서 왜 죄도 없고 성실하게 살아온 선량한 나한테 이런 짐을 짊어주셨는지 물어본 다음에 맨날 교문에서 쌍안경 들고 감시하는 교장 선생님한테 가서 똑같이 한번 물어봐. 그다음은 너 학교 안 간다 할 때마다 우리 집 찾아와서 우시는 너네 할머니한테 물어보고 마지막으로는 학생 주제에 학교에 안 간다는 미친 너 스스로한테 좀 물어봐.”

“…….”

“너무 복잡해서 잘 모르겠다구? 좋아. 그럼 아주 쉬운 걸로 물어볼게.”

그 고아하던 입이 벌어진 채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인하에게, 희림은 그대로 뚝 떨어지기 직전의 아이스크림을 입술에 대어주었다.

“살살 녹지?”

“정하야, 여기!”

늦은 오후, 일과처럼 정하의 서점으로 찾아간 희림이 마침 안에서 나오는 그를 보고 손을 들었다. 가게 문을 닫으려 긴 막대기를 들고 나서던 정하가 싱긋이 웃었다.

“왔어?”

“너 오늘 군청 가서 일 봐야 한다며. 얼른 가. 내가 정리하고 있을 테니까.”

희림은 미안하다 소리가 나오기 전에 그의 손에서 쇠막대기를 뺏어 들었다. 그의 다리로 셔터를 올리고 내리는 일이 만만치가 않다는 걸 안다. 정하도 공연한 인사치레 대신 싱긋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올 때 맛있는 거 사올게. 뭐 먹고 싶은데?”

“으음. 뭐가 좋을까.”

“아이스크림? 희림이 너 아이스크림 좋아하잖아.”

“…….”

“왜 갑자기 얼굴이 빨개져?”

별생각 없이 말을 꺼냈던 정하가 희림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아이스크림 소리를 듣자마자 열 개를 외쳤을 애가 지금은 푹 숙인 얼굴이 발그스름했다.

“열 나?”

“아니! 내가 왜!”

“아니, 안 나면 됐고.”

그래도 희림이 버럭 하면 그쯤에서 멈춰야 하는 것을 알고 있다. 피식 웃은 정하가 다시 나서려 하자 이번엔 희림이 그를 불러 세웠다.

“저기, 있잖아. 정하야.”

“응.”

“넌 뭘 받으면 기분이 좋아져?”

개연성이라고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 질문이지만 그것도 그러려니 했다. 워낙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대화에 익숙한 안온마을 회장님의 직업병이자 숙명이기도 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만약에 내가 너한테 뭘 해주면 너도 나한테 뭐든 다 해줄 수 있을 거 같아?”

“……가지고 싶은 거 있어서 그래?”

“아니 아니. 그런 거 말고. 아이스크림 같은 것도 말고.”

벼룩의 간을 내먹지. 정하에게 뭘 뜯어먹느니 제 살을 뜯어먹는 것이 낫다. 강하게 고개를 저은 희림은 답답한 마음으로 털썩 유리창에 기대었다.

“성의 같은 거라고 해야 하나. 적어도 내가 누구한테 이 정도를 해주면 상대방도 나한테 그 정도는 해주고 싶다는 마음 같은 거.”

“난 그냥 네가 뭐 안 해줘도, 하라고 하면 그냥 전부 다 하게 되던데.”

“무서워서?”

“……미안.”

거짓말은 못하는 순진한 안정하.

그녀가 고개 숙인 정하를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연주가 똑같은 말을 했다면 셔터 고리에 머리채를 묶어놨겠지만 우리 착한 도련님은 지켜줘야 한다. 어쨌든 정하의 대답을 듣고 나자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다. 

그놈이 정말 나를 무서워한다면 그런 말을 할 리는 없을 것이다.

“뭐든 해보라고. 네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전부.”

더군다나 그런 눈 그럼 음성으로는.

“……에잇.”

희림은 인하의 목소리를 지워내려는 것처럼 귀를 문질렀다. 귓가에 바싹 붙이고 말한 것도 아닌데 어쩐지 목뒤가 습한 기분이다. 생각을 해보겠다며 대충 둘러대고 집으로 와버렸지만 벌써 이틀째 뒤척뒤척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예전처럼 아이스크림도, 간식도, 가방 들어주기로도 안 된다면 뭘 하라는 건지. 이게 다 시골에 살다 보니 생각의 폭이 좁아진 탓만 같다.

‘얼른 떠야지.’

그 어떤 고민을 하든 결론은 매번 같았다. 희림의 변화무쌍한 표정을 들여다보던 정하가 이제는 됐겠거니 마음 편히 돌아섰다.

“그럼 부탁 좀 할게. 나 금방 다녀올 테니까…… 앗.”

“야아!”

돌아서 손을 흔들던 정하가 돌부리에 걸려 비틀했다. 한 발로 중심을 잡아보기도 전에 몸이 기우뚱 넘어갔지만 본능적으로 달려 나온 희림이 그를 뒤에서 받쳤다. 몇몇 이들이 큰 소리에 돌아보는데도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으이그, 조심하랬잖아!”

“아, 고마워.”

“정말 이 누나가 눈을 뗄 수가 없네.”

희림이 일부러 장난스레 그의 어깨를 밀어 세우자 정하는 머쓱하게 뺨을 긁적였다. 다시 군청으로 돌아서는 그를 가만히 지켜보다 말고 희림도 다시 셔터 앞으로 가 막대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기세 좋게 고리를 걸고도 그녀의 팔은 한참을 멈추어 있었다.

“…….”

정말로 이놈을 어쩌면 좋지.

언제까지 찾아가서 간만 볼 수도 없고 인하의 요구대로 그럴듯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 제가 생각해도 날로 뒤집어씌우기는 너무 도둑놈 심보다.

다만 뭘 해줘야 할지는 모르겠다.

뭘 모르는 눈으로 봐도 넘치게 가졌으니 돈으로 회유할 수도 없고 전처럼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엄두가 안 난다. 뭐 하나라도 부족한 것이 있어야 말이지, 곰곰이 머리를 쥐어짜는 희림의 뒤로 스르륵 물안개 같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정하 너 왜 벌써…….”

“나는 오면 안 되는 건가?”

“야아아! 강인하 너!”

분명 귓가를 문질러냈는데도 그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또렷하다 싶더니 솜털이 바짝 섰다. 언제 다가왔는지는 몰라도 등 뒤로 붙어선 인하는 웃음기조차 없었다.

“놀랐잖아!”

“그럼 놀랄 짓을 말든가.”

“하…….”

희림이 헛웃음과 함께 팔꿈치로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조금도 밀려나지 않는 그의 몸은 언젠가 곁눈질로 보았던 것보다 더욱 단단해 그녀를 당황케 했다. 

“야, 뒤로 좀 가봐. 이러다 힘 풀려서 셔터 떨어지면 네 머리 다친다니까.”

“다치면 책임지겠지. 너 책임감 강하잖아.”

“얘가 정말.”

“장난 같아?”

“…….”

설마.

한 칸 아래 선 탓인지 이제 인하가 무슨 말을 하든 꼭 제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것만 같다. 목덜미의 솜털이 간질거리는 희림의 손이 흔들리는 동시에, 그가 높이 팔을 뻗었다.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덮어 쥔 인하는 그다지 힘도 들이지 않고 셔터를 한 번에 내려버렸다.

차르르,

쇳소리의 긴 울림이 이어지고서야 희림이 얼른 바닥으로 내려섰다. 자연스레 잡혀 있던 손도 그제야 놓여났지만 그 촉감과 온도는 여전히 남아 금세 얼굴까지 열기가 치고 올랐다.

“뭐, 뭐야. 정말. 갑자기 말도 없이!”

“말도 없는 건 너잖아.”

그녀에 반해 인하는 얄미우리만큼 멀쩡했다. 마치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것처럼 권태로운 눈빛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렇게 급한 일인 것처럼 재촉하더니, 넌 이틀째 아무 소식도 없어?”

“아아, 그거.”

“아아, 그거?”

“……혹시 기다렸어?”

낮게 으르렁대던 그의 숨이 뚝 끊겼다. 그를 따라 새침하게 굴던 희림의 눈가에도 혹시나 하는 여유가 돌아왔다. 저만 고민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니, 그 작은 깨달음 하나가 쓸데없는 용기와 생글생글 안도의 웃음을 불러왔다.

“일부러 안 찾아간 게 아니라 생각 좀 하느라.”

“뭘 얼마나 대단한 생각을 하셨기에.”

“조금이라도 더 너한테 도움이 되는 걸 해주려다 보니까.”

그날처럼 두 팔을 교차시키며 바라보는 오만한 시선에도 기가 죽지 않았다. 아니, 않으려 노력했다. 오직 둘뿐인 밤의 호수도 아니고 아직은 노을이 남은 오후의 대로변이다. 서울과 비할 수는 없겠지만 오가는 이들도 꽤 있는 완벽한 자신의 구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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