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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13/80)

12화

이제야 말이 조금 통한다 싶은 희림이 활짝 웃었다. 있는 그대로 솔직해진 그녀의 맑은 웃음에 인하는 한쪽 무릎을 세워 비스듬히 턱을 받쳤다.

“그러는 넌, 읽어봤어?”

“응?”

“저번에 대답 안 했잖아. 내가 읽어봤냐 물어봤을 때.”

“아아, 그렇지.”

머쓱해진 희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꼭 국어 시간에 감상문을 발표하던 때로 돌아간 것 같다. 그때는 이렇게까지 떨리진 않았지만, 어쨌든.

“당연하지.”

“……정말?”

“그럼 당연히 읽어봤지. 나도 청연 사람인데 어떻게 이걸 안 읽어.”

그녀가 이미 그의 손으로 넘어간 책 표지를 살짝 두드렸다. 어땠는지 묻는 듯한 그의 눈길이 꽤나 집요하다 보니 어떻게든 입을 열어야만 했다.

“뭐랄까. 되게 감각적이고 섬세하고.”

“또?”

“좋더라.”

“…….”

더 이상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는 그녀가 던진 짤막한 대답에 인하도 더 이상은 물어보지 않았다.

“하아.”

대신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조금 더 깊이 몸을 기댔다. 방만한 포즈가 특유의 나른하고도 거친 분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서서히 그의 소맷단을 타고 오르는 물길에 엷은 살갗과 근육이 드러나자 희림의 목이 꿀꺽 넘어갔다.

미치겠네.

그때나 지금이나 강인하는 강인하일 뿐이라고, 그리 쉽게 생각했는데 벌써부터 그게 아니라는 깨달음이 강력해지고 있었다. 마른 입안을 감춰보려 입술이 바빠졌다.

“아, 그리고 정말 괜히 베스트셀러가 되는 게 아니다 싶고, 또 이런 게 글이구나 가슴을 절절히 울리기도 하고,”

“회장.”

“…….”

“넌…… 여전히 약을 참 잘 팔아.”

거친 음색, 가볍게 첨벙이는 소리와 함께 그가 몸을 일으켰다. 예전엔 이렇게 일어서면 저를 따라가겠다는 뜻이었는데 지금의 그는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젖은 소매를 걷어붙이며 제 앞에 선 인하를 마주하며 희림은 최대한 침착함을 되찾았다.

“한 번만 긍정적으로 생각해주면 좋겠어. 어차피 한 사람은 해야 하는 거라서.”

“너는?”

“……나야 뭐. 청년회 회장도 하고 있으니까.”

하마터면 ‘네 취임식 날 뜰 거다’ 하고 진실을 말할 뻔한 희림이 얼른 얼버무렸다. 조금 더 삐뚜름해진 인하의 눈길에도 허리를 세우고 단단히 버텼다.

“당장 결정해달라는 게 아니라 적어도 생각만이라도…….”

“그럼 넌 나한테 뭐 해줄 건데?”

“……으응?”

당당하게 젖은 손을 내민 그는 조금 전 자신 못지않게 당당했다. 희림이 저기 저 뇌물은 어쩌고, 눈짓해보았지만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리 캐묻던 책들조차 관심 밖이었다.

“네 말대로 생각 정도는 해볼 수 있겠지.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나도 나름대로 출혈이 크잖아.”

“으응. 그러니까,”

“제대로 한번 꼬셔봐.”

후우, 그녀의 머리칼을 흩날리는 그의 숨결이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제 마음을 돌릴 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인하의 눈이 오만했다. 다만 더는 아이스크림이라든가, 대신 들어주는 가방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내가 안 넘어가고는 못 견디게 만들어보라고.”

◇ ◆ ◇

“……해줘.”

제 등에 업힌 그녀의 목소리가 젖은 듯 바스락거렸다. 양다리를 받쳐 잡은 손등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응? 부탁이야…… 제발, 해줘.”

갈수록 애절하게 속삭이는 음성

한계로 치달은 인내심은 깨어지며 목뒤가 뻣뻣해졌다. 당장 논두렁 어디에라도 눕혀놓고 싶은 열기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잔인하게 뒤따르는 마지막 말만 아니었다면.

“회장님께서 조금 전에 전화가 오셨는데,”

“그것 좀 그만두시죠.”

“…….”

아니, 내가 뭐랬기에.

아침부터 청연에 내려와 있던 박 비서가 다소 사나운 인하의 반응에 움찔했다. 기껏 회장님 소리 한 번 꺼낸 것 말고는 정말이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니면 오지 말라는데 기어이 와버려서 화가 나신 걸까.

그렇지만 그의 회사 내 입지를 생각하면 미루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비록 대기업은 아니지만 한울 산업은 업계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는 중견기업이었다. 건축자재업을 바탕으로 유통과 건설까지 사업을 넓히며 실속 없이 이름만 그럴듯한 대기업보다도 훨씬 탄탄하다는 평을 받아왔다.

그런 회사를 최근 몇 년간 두 배로 키워냈던 상무님이 자리를 비웠으니 그 빈자리가 유독 큰 것이 당연하다. 아무리 모든 일을 정리해두고 떠났다지만 회사 규모가 규모니만큼 직접 그의 결재를 받아야만 하는 사항들도 꽤 쌓여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잠을 잘 못 잤더니.”

“아, 네에.”

먼저 사과를 하는 인하에게 박 비서도 웃음을 되찾았다. 사실 인하는 보기와는 달리 절대 누군가에게 먼저 화를 내거나 소리치지 않았다. 아주 큰 실수나 잘못이 있었더라도 마찬가지다.

그저 무시할 뿐.

타고나길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무관심하고 냉소적인 사람이었다. 살인적인 일더미에 기계적인 속도로 응답하면서도 찡그리는 것조차 보기 힘들다. 오죽하면 저런 사람도 한 번씩은 끓어넘치는 감정에 이성을 잃기도 하는지, 직원들끼리 몰래 내기를 하기도 했다.

만약 정말로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그런 강인하가 대단한 건지, 아니면 그 불가능한 일을 만들어낸 사람이 대단한 건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심히 갈리긴 했지만.

“흐흠.

하지만 박 비서는 인하의 최측근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의 모든 일을 맡아 하는 바,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그런 이들처럼 굴 수는 없다.

사실 조금 전 창을 통해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았으니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 속 젊고 건강한 남과 여, 글재주가 없더라도 절로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인하가 내려둔 세 권의 책까지 흘깃 바라본 박 비서의 표정이 보다 조심스러워졌다.

“상무님, 혹시 조금 전에 그분이…….”

“회장님이요.”

무심하게 목뒤에 손을 얹었던 인하가 그대로 젖은 셔츠를 벗어냈다. 회장님, 마치 마법의 단어처럼 세상 모든 열기를 한 번에 식혀내리기 딱 좋다. 하지만 눈에 제법 오래 담아둔 탓에 지금은 이대로 넘기기가 힘이 들었다. 인하가 욕실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

훤히 드러난 그의 상반신에 공연히 박 비서만 눈을 둘 데가 없어졌다. 남자 사이에 이 정도로 뭘 그러나 싶지만 인하의 몸은 달랐다.

어딘가 야하다고 해야 하나.

단순히 조각상 같다든가 근육질의 몸이라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 군더더기 없는 매끈한 몸에 저 거친 눈빛이 더해지면 같은 남자라도 저절로 눈을 내리깔게 된다. 지거나 짓눌리는 기분을 넘어 얽히고 싶지가 않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끝장을 보게 될 것만 같아서.

“어, 어쨌든 회사 일은 잘 돌아가고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걱정은요. 6년 만에 첫 휴가 받아오자마자 이렇게 시달리는 제가 더 걱정이죠.”

싱긋 돌아보며 웃는 그의 등 근육이 바짝 화가 나 있었다. 차라리 대놓고 화를 내시든가, 박 비서의 얼굴이 더욱 숙연해졌다. 

“참,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

“아버지 이야기면 안 하셔도 됩니다. 약속을 했으면 지키셔야지요.”

“아뇨, 회사 일 말고 다른 일이라서.”

“…….”

박 비서의 망설이는 음색에 인하가 비스듬히 몸을 돌렸다. 이번에도 짐작이 가는 게 있는지 눈만 한 번 찡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은 연락 말라 하시죠. 어차피 당장은 진행이 힘들 테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박 비서가 얼른 휴대전화를 들어 그의 일정을 체크했다. 그래도 힘들게 여기까지 내려와 목적은 달성했으니 짐을 하나 덜었다. 한결 가뿐해진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책 옆에서 보온병을 발견했다.

차인가.

아직도 뜨끈한 것이 제법 묵직했다. 본능적인 궁금증에 박 비서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다른 상사들이었으면 꿈도 못 꿀 행동이지만 인하는 그마저도 담백했다. 제 것에 대한 소유욕이 없다고 해야 하나. 그 어떤 귀한 선물이 들어와도 정해진 자신의 공간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한 남자였다.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빈티지 와인도 예외가 없다. 뭐든 알아서 하라며 귀찮게 고개를 내젓는 것이 전부다. 그러니 이 보온병 속의 정체 모를 액체는 어찌해야 할지, 박 비서가 코를 조금 더 가까이 가져다 댔다.

‘독약인가.’

생전 처음 보는, 이 달달한 듯 단조롭지 않고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심란한 색이라면…….

“사, 상무님!”

“…….”

보온병을 들어올린 인하가 주저 없이 목을 뒤로 기울였다. 꿀꺽대며 거칠게 넘어가는 심란한 액체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고개가 점점 젖혀지며 입술 아래로 타고 흐른 한 줄기 물길이 헐벗은 가슴을 가로질렀다. 

“…….”

이게 무슨 일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보는 이의 얼굴이 다 화끈하고 숨이 막힌 이 광경이 정체를 모를 액체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깨끗이 비워내고야 고개를 바로 한 인하가 손등으로 쓱 입가를 닦아냈다.

“제 거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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