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7/80)

26화

이제 별게 다 원망스러운 희림이 헐레벌떡 따라 나와 인사를 끝냈다. 일부러 느릿느릿 걸어와 인하의 뒤에 서는데 그의 등이 이렇게까지 크게 느껴질 수가 없다.

“…….”

그녀가 며칠간 자신에게 온갖 혼란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아무리 제가 시골에 파묻혀 있다지만 세상 돌아가는 순리를 모르지는 않았다. ‘너 예쁘다, 그러니까 사귀어줘.’라든가 ‘너 예쁘다, 그러니까 좋아해.’라든가. 보통 드라마만 봐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너 예쁘다. 그런데 진짜 열 받네.’라니.

“…….”

듣도 보도 못한 파격적인 내용 전개에 희림의 눈가가 퀭해졌다. 만약 제게 모종의 복수를 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거라면 강인하의 작전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자그마치 이틀 밤을 꼬박 새웠으니까.

아니, 복수든 뭐든 그냥 한 번에 알아듣게 남들 하는 것처럼 말해주면 안 되는 건가? 2년도 전, 제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영화에서만 해도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예쁘다.’라고 감탄하고는 자연스레 키스를…….

“너 뭐 해?”

“나? 내가 뭐! 강인하 너 되게 웃긴다!”

“…….”

갑자기 돌아볼 건 또 뭐람!

저도 모르게 영화 속 키스신을 떠올리고 만 희림이 정색하며 주먹을 꼭 쥐었다. 영화처럼 되기를 바란 건 아니지만 하필 그런 장면을 떠올리고 만 스스로에게 한숨이 다 났다.

‘미쳤네. 대체 내가 강인하랑 무슨 사이라고.’

고작 동창, 잘 봐줘야 현 회장과 차기 회장일 뿐이다. 심지어 저는 그에게 회장 자리를 넘겨주는 동시에 서울로 뜰 몸이다. 다른 무엇보다 제게 그런 날벼락 같은 말을 던져놓은 당사자는 지나치게 태연했다. 만약 그것이 정말로 남녀 간의 의미심장한 기류였다면 저렇게까지 무덤덤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희림 너 나한테 무슨 할 말 있어?”

“나?”

지금도 느긋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인하는 무슨 일이라도 있냐는 듯 눈썹을 치켜세우는 것이 다였다. 얄밉기 짝이 없는 그 모습에 희림도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할 말은 무슨. 그런 거 없어.”

“아아.”

“음, 강인하 너야말로 나한테 무슨 할 말 없어?”

최대한 자연스럽게 받아친 그녀가 넌지시 눈길을 주었다. 차라리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설명이라도 해주면 좋겠다 싶은 마음으로 꺼낸 말이었지만 막상 인하가 자신을 지그시 훑어보자 침이 꼴깍 넘어갔다.

“…….”

묻지 말걸. 그냥 모른 척 넘어갈걸.

그랬다면 저 혼자만의 꿈이었던 것처럼 지나갈 수 있었을 텐데.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인하의 시선에 뺨이 따끔거렸다. 더는 안 되겠다 싶은 그녀가 후다닥 손을 내저었다.

“아니. 뭐 굳이 할 말 없으면 꼭 안 해도 되니까,”

“너 신발 바꿔 신었어.”

“…….”

“그냥 그렇다고.”

인하가 반듯하게 입가를 늘이자 희림의 가슴이 눈에 띄게 오르내렸다. 하, 뒤늦은 코웃음도 매우 부자연스러웠다. 나도 원래 다 알고 있었다는 둥, 아까는 급해서 그런 거였다는 둥, 딱 그녀답게 종알거리다 말고 냅다 안으로 도망을 쳐버렸다. 그런 희림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인하가 뒤늦게야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튼.”

연기가 안 되면 처음부터 말을 말든가.

그녀가 사라진 유리문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인하가 데스크를 짚으며 몸을 기대었다. 선선한 봄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와 초록의 물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예쁜 풍경 속에 그깟 신발 좀 바꿔 신은 사람이 예쁘지 않을 리가 없다. 봄날의 여유에 흠뻑 빠진 그가 느긋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신발조차 없이 덩그러니 양말만 신은 채인 제 발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 ◆ ◇

거울을 보면 내가 보인다. 그리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그녀를 보면, 내 마음이 보인다. 12월 어느 겨울, 얼어붙은 논바닥이 미끄럽다 불평하는 그녀에게 나는 동감하지 않았다. 네 얼굴이 말갛게 비치는 겨울의 선물이 어찌 싫을 수가 있겠냐고.

‘겨울’ 5장, 얼어붙은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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