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어? 강인하!”
“…….”
그래서인지, 막상 어스름한 길 위에 선 그녀를 눈앞에 두고도 정말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막 내디디려던 발길을 세운 인하가 눈과 입가에 들어가는 힘을 겨우 참아냈다. 하지만 ‘너 거기서 뭐 하냐.’는 듯 태연하게 절 바라보는 희림에 대한 울컥함은 참을 수가 없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흙이 가득 묻은 옷은 더더구나.
“뭐야, 강인하 네가 왜 거기에 있어?”
“…….”
“차라리 정하네 들어가 있든가. 음침하게 그게 뭐야!”
그 꼴을 하고도 저렇게 생글생글 웃을 수 있는 여자가 세상에 한희림 외에 또 있을까 싶다. 처량히 벽에 기대선 그에게 놀란 그녀가 두 손을 입술 위에 붙였다. 뒷목이 뻣뻣해져오는 인하는 오랜만에 짓눌러온 본성을 드러냈다.
“한희림 너 약속이 다르지 않아? 언제든 내 옆에 붙어 원하는 대로 한다면서. 그런 애가 무슨!”
“어쨌든 잘됐다!”
“…….”
“가자!”
이런 제게 겁먹으면 그거야말로 어쩔 수 없다 싶었는데, 희림은 이번에도 그의 예상을 빗나갔다. 대뜸 그의 말을 자르고 손목을 잡은 그녀가 허겁지겁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잔소리는 나중에 하고! 일단 빨리 가야 해!”
“야, 너.”
“안 그래도 너한테 전화하러 가던 길이었거든. 휴대전화도 안 돼서.”
“…….”
이쯤 되면 뻔뻔한 한희림은 둘째 치고 거기에 못 이기는 척 이끌려 가는 제 꼴이 더 우스울지도 모른다. 이 기막힌 상황에 인하는 저를 강하게 부여잡은 희림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 어떤 억지나 기막힌 상황에도, 앞으로도 이 손을 뿌리치기 힘들 거라는 강한 예감이 그를 울컥하게 했다.
결국 참고 참은 그의 입술에서 기막힌 탄식이 흘러나왔다.
“한희림. 너 도대체 뭐 하는 애야.”
“나 당연히 회장이지.”
“…….”
잔뜩 흙이 묻은 머리칼을 흩날리면서도 희림은 잘도 웃었다. 그러면서도 앞서 나가는 걸음은 좀처럼 속도가 줄지 않았다. 이제 어디까지 가는지 한번 해보자며, 인하도 그때부터는 말없이 그녀를 뒤따랐다.
“발 조심해.”
“너나 조심해.”
“난 괜찮아. 벌써 넘어졌거든.”
“…….”
한번 포기한 탓일까, 그녀의 웃기지도 않은 농담에도 입술이 멋대로 움찔거렸다. 이런 대책 없는 긍정과 추진력도 오직 희림이니까 가능할지 모른다. 가느다란 개울가로 이어지는 논두렁 아래로 내려선 그녀의 걸음에 더욱 힘이 붙었다.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건지.
발아래가 질척였다. 속도 없이 돌아보며 웃는 희림의 뒤로 뻗은 나뭇가지를 걷어주려던 인하의 손이 서서히 멈추었다. 느닷없이 밝아진 시야에 초록빛 별들이 가득한 밤하늘이 펼쳐졌다. 그녀가 왜 그리 절 이곳에 데려오려 했는지, 이제야 알게 된 기분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봐! 반딧불 있잖아!”
“…….”
“그거 봐. 난 꼭 약속 지킨다니까!”
짜잔, 신이 난 희림의 음성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하나둘 날아오르는 반딧불로 손을 내민 그녀에게선 더 이상 엉망이 된 옷차림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그랬다.
“내가 너한테 이거 보여주려고, 이거 보자마자 진짜 얼마나 놀랐는지!”
“응.”
시골에 살면서도 진짜 반딧불은 오랜만이라, 이내 그녀의 커다란 눈에도 초록빛이 감돌았다. 또 언제가 될지 몰라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은 희림이 마치 이끌리듯 나아갔다.
“어때? 정말 예쁘지!”
“응. 예쁘네.”
“진짜 반딧불이 이렇게 예쁜지는,”
“아니. 너.”
“…….”
툭 그가 던진 말에 하늘에 머물던 그녀의 고개가 주춤했다. 고작 그 한마디에 방금 전까지 시야를 가득 채우던 반딧불이 한순간에 희미해졌다. 내가 잘못 들은 걸까. 그래, 그런 거겠지. 인하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한참 그와 시선을 마주하다 겨우 웃음을 지어보았다.
“음, 있잖아, 혹시 방금 너,”
“잘못 말한 적 없고 너도 잘못 들은 적 없어.”
“아…….”
그렇구나.
희림이 홀린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뭔가 더 똑 부러지게 행동하고 싶은데 이것 말고는 마땅한 반응이 생각나질 않았다. 다른 남자애들이라면 ‘그따위 장난에 속지 않겠다!’ 팔꿈치라도 한번 찌르겠지만, 강인하는 그때나 지금이나 진지했다.
“한희림 너 진짜 예뻐. 사람 미치게.”
“…….”
“그리고 너.”
얼어붙은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둘 사이를 가로막은 눈치 없는 반딧불을 걷어냈다. 10년 전부터 희림의 주변에 맴돌던 것들이라면 이렇게 내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진짜 열 받는다고.”
◇ ◆ ◇
“강인하,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강인하는 원래 말이 잘 없었지만 기분이 좋지 않을 땐 더욱 말이 없어진다. 적어도 그 정도는 알아챌 정도로 친해졌다 싶던 어느 날, 그는 특별히 더욱 말이 없어졌다.
그래봐야 하복에서 동복으로 갈아입었을 뿐인데, 풀고 다니던 머리를 묶었을 뿐인데.
설마 낯설어 그러는가 싶어 장난스레 어깨를 두드려보았다. 그다지 세게 친 것도 아니건만 인하의 어깨가 어찌나 움칠거리는지, 그냥 말이나 해보고자 했던 제 입이 다 말라붙었다.
“아니, 그냥…… 내 말은, 내가 혹시 너한테…….”
“없어. 그런 거.”
“그럼 왜 말을 안 해?”
“안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말하면 너는 차라리 말을 안 하는 게 더 나았다 싶어질 거라서.”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트렸지만 인하는 끝까지 제 갈 길만 나아갔다. 하여튼 웃기는 애라고 어깨를 으쓱하며 따라가던 그때의 그 답은, 10년이 지난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한희림, 넌 어때?”
“어어?”
“이거 타일 어떠냐고.”
“어……. 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제대로 된 말이 안 나올 거 같거든.
희림이 제게 타일 샘플을 내미는 인하를 보며 어깨를 움칠했다. 심지어 손길 하나 닿지 않았는데 공연히 숨이 가빠졌다. 공사를 준비하러 내려온 이들 앞에서 내내 영혼 없이 맞장구나 치는 게 전부였다.
“그럼 그냥 알아서 해주시죠.”
“아, 그래도 될까요? 사장님, 그럼 이건 어떠신가요? 요새 서울에서 아주 잘 나가는 것인데.”
“네. 뭐.”
“…….”
네에, 뭐어?
그녀가 제대로 한번 보지도 않고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인하 때문에 두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곧 그가 자신을 바라보자 다시 힘없는 꽃봉오리처럼 고개를 축 떨구었다.
“왜?”
“아, 아니야.”
“…….”
예의 무감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던 인하가 전화를 받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틈을 노린 그녀가 샘플들을 정리하는 작업자들에게 바짝 당겨 앉았다.
“정말 이걸로 하시겠다구요?”
“네? 아, 네에. 아까 사장님께서도 마음에 든다고 하시고.”
“아뇨. 쟤 마음에 안 들어요. 진짜 안 드는 거란 말이에요.”
“…….”
“쟤가 저렇게 쳐다도 안 보고 눈을 내리깔고 있으면 뭐가 마음에 안 들어도 단단히 안 든다는 건데. 말도 거의 없잖아요. 아, 원래도 말이 없지만 정말 특별하게…….”
주절주절, 인하의 기분이 얼마나 특별하게 별로인지를 설명하던 희림이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이럴 때가 아니다. 그가 돌아오기 전에 최대한 간략하게 요구 사항을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이건 보기에만 예쁘지 막상 주방에선 실용성이 없을 거 같아서요. 제 생각엔 좀 더 크고 어두운색 타일로 깔끔하게 가는 편이 좋을 거 같아요.”
“아, 네에.”
“그리고 수도를 끌어오는 것도 여기보다는 저쪽으로…….”
누가 들을까 비밀 이야기하듯 낮던 그녀의 음성이 좀 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빠져들었다. 여기는 이렇게 저기는 저렇게, 미리 준비라도 해둔 것처럼 꼼꼼히 체크한 그녀가 마지막 요구와 함께 도면에서 손을 내렸다. 정신없이 받아 적는 공사팀을 보자 뒤늦게 눈치가 보이는지 희림은 머쓱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한 번에 말씀드려야 하는데 괜히 번거롭게.”
“아니에요. 어차피 사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준비하면 된다고 하셨으니까요.”
“사, 사모님이요?”
“아니세요? 저는 사장님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그러셔서 당연히 사모님인 줄 알고…….”
공사팀의 직원이 난감해했지만 희림은 그녀보다 더욱더 난감해졌다. 등 뒤에서 인하가 돌아오는 걸음 소리가 나자 희림의 숨소리만 더욱 가빠졌다.
“아, 아니에요. 그런 거!”
“네에. 그러셨구나.”
“네. 사실은 강인하 쟤가…….”
저한테 열 받는다네요.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지 뭐예요.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이어붙여봤자 결국 안 하느니만 못했다. 자연스레 그날의 기억으로 돌아간 희림의 눈가가 울상으로 접혀들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녀가 주춤대는 사이 벌써 공사팀은 현관에서 인하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럼 저희는 일단 올라가보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진행할 테니 걱정 마세요.”
“네. 그럼 조심해서 올라가시죠.”
“좀 더 있다 가셔도 되는데…….”
왜 하필 둘만 남겨두고 가시겠다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