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주춤하는 그들의 앞에 지갑을 연 희림이 지폐를 집어 올렸다. 모르긴 몰라도 오늘 먹은 고깃값 정도는 하고도 남는 금액이었다.
“거스름돈은 휴지 값으로 받아주세요. 안 그래도 빈손으로 와서 마음에 걸렸는데.”
“에이, 희림아. 우리 사이에 휴지는 무슨. 우리가 어디 그런 거 주고받을 사이야?”
“응. 우리 사이니까 당연히 줘야지.”
“어?”
제 엄마 대신 나섰던 상현이 얼떨떨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예쁜 미소에 헤벌쭉 입이 벌어지는 그를 가볍게 흘기는 희림의 눈웃음이 상큼했다.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동창 사이에 개업을 하든 말든 휴지를 왜 사 들고 오겠어. 내가 호구도 아니고.”
“뭐?”
“난 그냥, 네가 10년 전에 학교 담벼락 앞에서 나한테 고백했다 그 자리에서 까이고 하도 울길래 인간적으로 휴지 하나 못 사주고 온 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더라고. 지나가는 개한테도 그러면 안 되는데.”
우리는 딱 그 정도라고, 희림이 둘 사이의 선을 제대로 그어냈다. 물론 얼이 빠져 있는 상현의 엄마에게도 다시 한번 공손한 인사를 잊지 않았다.
“제가 정말 상현이 덕에 계산 하나는 제대로 배웠지 뭐예요?”
◇ ◆ ◇
“……에이.”
거스름돈 그냥 받아 나올걸.
터덜터덜 논두렁을 걷던 그녀가 빈 지갑을 열어보며 아쉬워했다. 이번 달 생활비였는데, 제대로 먹지도 못한 한우 값으로 날리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럼에도 상현 모자의 넋 나간 표정들을 생각하면 웃음이 났다.
그래. 그 값으로 치지 뭐.
사실 고등학교 때 제게 고백했던 남자애들이야 한둘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상현은 덩치에 안 맞게 꺼이꺼이 울며 하도 슬퍼하는 게 마음의 짐으로 남아 커피나 한잔 같이 마셔줄까 했더니, 그사이 변해버린 모양이다.
하긴, 무려 10년인데 사람이 바뀌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순진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니 어쩐지 조금 서글퍼진 희림의 걸음이 느릿해졌다.
“한희림. 너 설마 쟤 때린 거야?”
“아냐, 그런 게 있어. 그냥 내가 죄 많은 여자라서 그래.”
그러고 보니 강인하도 그 자리에 있었던가.
우는 상현을 뒤로하고 나서던 담벼락 모퉁이에서 마주했던 그가 얼마나 눈을 찌푸리는지, 그 서느런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나도 참, 어쩌자고 이 얼굴로 태어나서.”
“…….”
“야, 강인하! 너는 이해가 안 가겠지만 세상엔 내가 취향인 남자도 있을 수 있는 거거든!”
그게 그렇게까지 오만상을 찡그릴 일이었던가.
나름대로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던진 농담에조차 그는 일말의 반응도 없었다. 그저 어이가 없다는 듯 휙 돌아섰을 뿐, 나름대로 그와 친해졌다 생각한 이후에도 인하는 그런 쪽의 농담에는 코웃음 한 번조차 터트린 적 없었다.
오히려 더 살벌해지면 살벌해졌지.
‘그런 면으로는 참 일관된다고 해야 하나.’
이 나이에 버스비 하나 없이 좁은 시골길을 걸어가는데도 쓸데없이 웃음이 났다. 당시의 인하가 얼마나 까칠했는지 알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뭐든 인상부터 쓰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이상하게 인하에게는 더욱 신경이 쓰였다. 아주 세상에 불만이 가득한데,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의심스레 눈을 가늘이기만 하는데, 그런 그를 보고 있자면 웃음이 날 때가 많았다. 이렇게 10년이 지난 빈털터리 신세에도 웃음이 나고 마는 걸 보면 그거야말로 제 인생에 가장 신기한 일일지도 모른다.
“엄마야!”
잠시 방심했던 희림이 발이 미끄러져 주르르 논두렁 아래로 떨어졌다. 일이 꼬이려면 이렇게도 꼬이는지, 애써 신음을 참은 그녀가 몸을 일으키며 흙을 털어냈다. 연주라도 부를까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지만 일이 안 되려는 모양인지 그마저도 배터리가 다해 전원이 꺼져 있었다. 다행히 집까지 가는 길이 멀지는 않으니 방향만 잘 잡으면 무서울 것은 없다.
늘 그렇게 믿어왔다. 나만 괜찮으면 세상에는 무서울 것이 없다고.
딱 하나 지진 빼고는.
“아…….”
기껏 힘을 내어보던 그녀가 자그마한 개울 앞에서 불현듯 걸음을 멈추었다. 해가 저문 어둑한 밤에 한시라도 서둘러야 하는 것을 알았지만 이상하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꿈처럼, 눈가에 아른대는 무언가에 놀라 고개를 든 희림이 벌어지는 입을 가렸다.
◇ ◆ ◇
“……인하야. 자리에 좀 앉아.”
“아니.”
정하가 연거푸 권유하는데도 인하는 단 한 번도 자리에 앉지 않았다. 이곳에 와 희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한 것도 잠시, 그 후로는 점차 온몸이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곳을 박차고 뛰쳐나갈 수 없는 이유가 그를 더욱 불쾌하게 했다.
여기 말고는, 희림이 갈 만한 데가 달리 생각나질 않으니까.
“계속 전화 꺼져 있네. 어디서 일하는 건가.”
“이 시간에 일은 무슨.”
“걱정하지 마. 희림이 원래 여기저기 잘 다녀서 연락 안 될 때 많아.”
속을 끓이는 그와는 달리 정하는 그간 알고 지낸 연륜이라도 보이듯 태연했다. 저따위 연륜은 없는 게 나을 텐데, 인하의 미간에 깊은 금이 패였다.
“그래서 넌 한희림 걱정 안 돼?”
“세상에서 희림이 걱정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짓이 없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
정하가 느긋하게 받아치자 아드득 인하가 이를 갈았다. 그런데도 무슨 말이 그러냐 화를 내지는 못했다.
실제로 그런 말을 한 것은 자신이니까.
“희림이 왜 그래? 상현이 쟤는 왜 저기 숨어서 울고?”
“나도 몰라.”
“그래도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희림이한테 무슨 일 있었던 거면,”
“아니. 그런 거 없어.”
딱 봐도 어디 덜떨어진 놈한테 고백이나 받고 말았을 희림을 떠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일상에도 심각함은커녕 본인의 미모 탓이나 하고 있는 그녀였으니 걱정 같은 건 할 필요도 없다. 애초에 그런 걸 하는 놈이 미친놈이고, 그렇게 저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는 미친놈이 되어갔다.
“잘 들어, 안정하. 세상에 한희림 걱정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짓이 없어.”
“그래도 그때가 참 재미있었는데. 희림이가 하도 거기서 고백 받는 통에 네가 담배 피우러 못 가서 좀 그렇긴 했겠지만.”
“기억 안 나.”
“아아, 천하의 강인하도 기억이 안 나는 게 다 있구나.”
커피잔을 든 정하가 조용한 웃음을 머금었다. 어째 즐거워 보이기까지 한 그의 표정에 열이 오른 인하가 대충 자리에 걸터앉으려 했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아! 거기는 희림이 전용 자리인데. 미안한데 희림이 아니면 아무도 못 앉아.”
“……안정하.”
“뭐 벌써 알고 있으려나.”
정하가 파란 스툴을 넘겨다보며 그곳을 단단히 사수했다. 이제 뭐가 어찌 되든 다 상관없을 것 같아 인하의 눈썹이 가팔라졌다.
“한희림은 알아? 너 이런 놈인 거?”
“모를걸.”
“…….”
“근데 걔는 네가 그런 놈이었던 것도 모를 거라서.”
어쭈, 인하가 가볍게 눈을 찡그렸지만 사실 정하는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이렇게 조용히 웃는 날이 대부분인 놈이었다. 희림의 곁에 머물면서도 유일하게 고백하지 않는 남자아이, 심지어 덜떨어지거나 어디 모자란 구석도 없어, 더욱 제 마음에 들지 않던 인간이었다.
“걱정하지 마. 아직 7시도 안 됐는데 희림이 금방 올 거야. 걔 이 동네 아주 꿰고 있다고.”
“…….”
“물론 너만큼은 아니겠지만.”
“안정하.”
파르스름한 턱을 들어올린 인하가 잠시 이를 갈았다. 하지만 이런 신경전이나 벌이고 있기엔 그새 해가 한 뼘은 더 기울어버렸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그가 문을 박차고 나서자 정하의 목소리가 등에 따라붙었다.
“걱정하지 마! 나 비밀 잘 지키는 거 알잖아!”
“……저걸 그냥.”
돌아보는 대신 가벼운 욕설을 짓씹은 인하가 습관처럼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잡힌 담배도 이내 꺾어버렸다. 이런다고 달래질 마음이 아니라는 것쯤은 자신이 제일 잘 안다.
“하아아.”
툭, 그대로 벽 사이에 몸을 기대었다. 좁은 틈이 답답하기도 할 텐데 그나마 조금 살 것 같았다.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좁고 좁은 동네가 지금만큼은 이렇게 크고 막막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제집도 연주네도 아니라니, 인하에게 청연은 두 배로 더 넓어져버렸다. 그러나 언제까지 여기 머무를 수도 없다. 어디로 먼저 가야 할지, 정처 없는 마음이 10년 전 그때처럼 불안했다.
이 동네 토박이인 희림이 딱히 길을 잃을 일은 없다는 것도, 아직 7시도 안 된 이른 시간임을 알면서도, 언제나 한 사람의 잔상이 지배하는 머리는 그것을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