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4/80)

23화

눈만 마주쳐도 침이 먼저 꿀꺽하고 마는 산짐승 앞에서는 그런 촉도 무용지물이었다. 인하의 고요하고도 서느런 눈빛에 연주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예전엔 희림을 사이에 두지 않으면 말도 잘 못 해봤던 강인하와 이렇게 대화라는 것을 하는 자체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러지 말고 인하 너도 그날 와서 구경해.”

“됐어. 애도 아니고 유치하게 뭘.”

“좀 그렇긴 하지?”

혹시나 사진이나 한 장 건져볼까 했던 연주는 그럴 줄 알았다며 욕심을 접었다. 바랄 걸 바라야지. 고등학교 때도 농구나 좀 했지 제대로 뛰는 것은 보지 못했다. 서서히 짐을 챙겨 일어서는 그녀 곁으로 인하가 다가와 배웅했다.

“연주 넌 이제 군청으로 가?”

“아니, 정하네 좀 들렀다 가게. 참, 정하가 너도 시간 되면 같이 오라고 했는데 같이…… 안 가겠지?”

“다음에.”

제 눈치를 살피며 말을 고치는 연주에게 인하가 피식 웃었다. 그새를 못 참고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연주의 손이 우습기도 했다.

“정리할 게 좀 있어서.”

“그렇구나. 오늘은 하여튼 다들 안 되는구나. 에휴, 희림이 이것도 그렇고.”

“……한희림이 왜.”

“말도 마. 여기 오기 전에 안 그래도 안온마을 갔다 왔는데 날 보자마자 할머니들이 하나같이 입을 풀로 붙인 것처럼 딱 다무시고는 날 투명인간 취급하지 뭐야! 뭐 갈매기인지 기러기인지 내쫓아야 한다 어쩌고 하시면서.”

“음.”

아마도 ‘러’가 아리고 ‘레’일 거라고, 인하가 조심스레 침묵을 지켰다. 그 유치한 작전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거 같아 인하의 입가에 서서히 웃음이 실렸다. 그가 제 말을 믿지 않아 그런다 싶어진 연주만 속을 끓였다.

“진짜라니까!”

“그래.”

“하여튼 다들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고. 희림이가 남자를 만나서 어딜 가? 아, 완전 웃겨.”

“…….”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연주의 발소리가 거칠었다. 한희림이 남자라니, 그걸 누가 속는다고, 열변을 토하는 정씨 할머니에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글쎄 군청에서 나오는 길에 무슨 남자가 희림이를 보쌈하듯이 낚아채서 데려갔다는 거야! 그래봐야 정하겠지 무슨!”

“…….”

“정씨 할머니 내가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닌데, 유치하게 그런 데 속을 줄 알고. 어디 속눈썹 하나 까딱하는지 보라고…… 인하야!”

“가자.”

그녀가 어느새 차 키를 들고 나선 인하를 올려다보았다. 속눈썹 대신 온몸이 끄떡이는 듯한 그의 팔뚝에서 손등까지 푸른 핏줄이 그물처럼 감쌌다.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는 와중에도 고맙고 흐뭇해 연주의 음성이 떨려왔다.

“어, 어딜?”

“정하네.”

머리를 쓸어올린 인하가 이를 질근 물었다. 꽉 사리문 잇새로 내뱉는 한 음절, 한 음절마다 살벌한 웃음이 감돌았다.

“친구가, 초대했는데, 당연히, 가줘야지.”

◇ ◆ ◇

“안 그래도 되는데.”

희림이 제 앞으로 내어지는 빛깔 고운 한우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근처에서 가볍게 차나 한잔할 줄 알았던 상현이 굳이 제집으로 가자 핸들을 꺾으니 중간에 내릴 도리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거하게 한 상을 차려 나올 줄이야, 그녀는 가볍게 이마를 쓸었다.

“난 이럴 줄도 모르고 빈손으로 왔는데 미안해서 어떡해.”

“됐다니까, 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

“얼른 먹으라니까.”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덧붙인 상현은 싱글벙글 웃음이 넘쳐흘렀다. 사실 희림과는 고등학교 동창이었으니 밥 한 끼 같이 못 먹을 사이는 아니다. 다만 상현은 그때나 지금이나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내가 네 사정 모르는 것도 아니고 무슨 우리 사이에!”

“……어어.”

“많이 먹어. 우리 집 고기 좋은 거 알지? SNS 이런 데 엄청 올라가서 주말에는 이 넓은 홀이 꽉 찬다니까?”

상현은 새삼 자랑스러운 얼굴로 커다란 홀을 가리켰다. 과연 청연에서 제일 큰 고깃집답게 커다란 규모의 내부가 번쩍거렸지만, 희림은 어쩐지 앉은 자리가 불편했다. 겨우 한 수저 뜬 그녀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런데 너 나한테 할 이야기라는 게 뭐야?”

“아아, 그거! 너도 참 성격 급하긴!”

뭐가 그리 재미있다고 껄껄 웃던 상현이 품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주춤하던 희림이 그것을 받아 들자 그의 쩌렁대는 설명은 더욱 커졌다.

“내가 이번에 군청 근처에 2호점 내기로 했거든!”

“아, 그렇구나, 축하해.”

“그래서 말인데 네가 2호점 매니저 하면 어떨까 해서.”

“……응?”

적당히 맞장구나 치고 말려던 그녀가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영문 모르겠단 표정을 짓는 희림에게 상현은 의자를 더욱 가까이 끌어 앉았다.

“너 어른들 상대하고 그런 거 잘하잖아. 이 동네에서 회장도 오래 하고.”

“저기, 말은 고마운데.”

“에이 뭐 어때. 내가 네 사정 빤히 다 아는데.”

“……내 사정이 어떤데?”

순간 희림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자 눈을 끔뻑대던 상현은 멋대로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걸 몰라서 묻느냐는 듯한 눈짓이 매우 노골적이었다.

“에이, 괜히 자존심 세우고 그러지 말라니까.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는 또 무슨 사이고?”

“한희림 너도 고집 참.”

“…….”

“솔직히 고향 내려와서 하는 일 잘 안 되고 지금 네 나이에 다시 번듯한 데 취직하는 것도 어려운 거 누가 몰라.”

퉁퉁한 다리를 보기 싫게 교차시킨 상현이 고개를 넌지시 기울였다. 그동안 그 말을 하고 싶어 어떻게 참았는지, 이거 보라며 그녀의 앞에다 젓가락을 두드렸다.

“너 서울에 좋은 대학 갔을 때만 해도 너에 대한 마음 접어야 하나 보다 했는데, 이렇게 또 기회가 오더라고. 너도 생각해봐. 내 나이에 이 정도 가게 하는 거 쉬운 거 아니다?”

“……그러니까 나한테 매니저 하라는 것도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거네?”

“다른 이유는 무슨. 그냥 너도 백수로 할머니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거보다야 그럴듯한 매니저 직함이라도 하나 다는 게 낫지 않아? 잘만 되면 돈도 서울의 어지간한 회사 못지않게 챙겨준다니까?”

상현은 돈이라도 세는 것처럼 그녀의 앞 허공에서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비볐다. 점차 굳어가는 그녀의 얼굴에도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솔직히 요즘은 학벌 하나로 되는 세상 아니잖아. 네가 우리 지점에서 능력도 좀 보이고 하면 이참에 우리 엄마도 널 좀 다르게 볼지도 모르고.”

“너네 엄마가 날 왜 다르게 봐야 하는지 말해줄래?”

“에이, 알면서 그런다. 원래 남녀 간에 한데서 일하다 보고 그러면 다 그렇고 그런 거지. 어디 우리라고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 있냐? 하하.”

“…….”

그러니까 이게 고깃집 매니저 스카우트 자리가 아니라 신붓감 면접 자리인 모양인데.

하다 하다 여기까지 왔나 싶어져 희림은 수저를 완전히 내려두었다. 더 떨어질 입맛도 없겠다 했더니 상현은 기어이 한마디 더 보탰다.

“우리 엄마가 너 똑똑하다고 마음에 들어 했는데 너 이렇게 됐다는 소식에 얼마나 안타까워했다고.”

“어어, 그래.”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우리 엄마가 여자 보는 눈이 좀 깐깐해야지. 놀고먹으면서 남편 돈만 쓰는 여자들 질색하니까. 희림이 너도 얼굴만 믿지 말고 뭔가 능력을 보여주면 더 좋을 거 같지 않냐?”

“응. 전혀 그럴 것 같지가 않네.”

자리에서 일어선 희림이 상현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당장이라도 저 벌건 숯에다 얼굴을 밀어버리고 싶지만 합의금이 없어 참는다. 새삼 살벌해진 그녀의 기세에 간만에 학생회장 시절의 포스를 느낀 상현은 주춤거렸다. 

“왜, 왜 그러는데? 벌써 가게?”

“어머, 이게 누구야. 희림이 아니야?”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그를 지그시 노려보던 희림이 가게에 막 들어선 상현의 엄마에게 인사했다. 절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그녀의 살가운 태도에 상현이 오히려 쭈뼛했지만 희림은 몸에 밴 듯 공손하게 응대했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지요?”

“응. 그런데 네가 여기 어떻게…….”

하지만 상현의 엄마 역시 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 얼떨떨해하던 그녀가 희림을 아래위로 주저 없이 훑어보았다.

“어이구, 그래도 생각보다는 멀쩡해서 다행이네! 안 그래도 너 이제 어떻게 사나 걱정했는데.”

“네에.”

“상현이랑 고기 먹었니? 하긴,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어려운 처지에 고기 한 끼 정도는 먹여줘야지. 나도 뭐 그 정도까지는 크게 어렵지 않으니까.”

인심을 쓰는 듯 아닌 듯, 그녀의 음성이 은근히 선을 그었다. 이 동네에서는 나름대로 벼락부자가 된 집답게 교양을 차리는 것 같았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내 아들이랑 친구로만 지내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으음, 희림아. 그러니까 이 아줌마 말은,”

“잘 알죠. 그럼.”

청년회 회장님 2년 차에 그 정도 어르신 말을 못 알아들을 희림이 아니었다. 희림이 두 손을 모으고 친절히 웃자 상현은 물론 그의 엄마까지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 그래. 그러면 다행이긴 한데.”

“아니, 엄마는 왜 또 그런 소리를 해가지고는!”

“내가 괜히 그래? 네가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처럼 계산 하나 제대로 못 하니까 그런 거지!”

결국 두 모자는 서로를 탓하며 언성을 높였다. 가만히 지켜보던 희림이 티격태격 주고받는 모자간에 조용히 끼어들었다.

“에이, 아니에요. 아주머니. 그런 걱정 하나도 안 하셔도 돼요.”

“응?”

“상현이 정말 제가 본 남자 중에 제일 계산적이거든요.”

“…….”

욕인지 칭찬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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