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갈수록 똘똘한 송아지의 존재에 희림은 벌써 이방인이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괜히 대청마루에서 다리를 까딱해보던 그녀가 휴대전화를 꺼내어 들었다. 연락이라 봐야 연주에게서 마치고 술이나 먹자든가, 정하에게서 해장국은 챙겨 먹었냐든가, 그 외엔 모두 회장님으로서의 공적인 연락이 전부다.
늘 그래왔던 일상임에도 막상 화면을 마지막까지 내리던 손끝에 허전함이 길게 남았다.
“……왜 그려. 뭐 이번에도 누구 초상났대?”
“아냐 아냐.”
할머니의 섣부른 추측에 희림은 부랴부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주민들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갑작스런 부고가 드문 일은 아니지만 제가 그 정도로 기운이 빠져 있었다는 데 더욱 놀랐다.
내가 왜 이래.
그녀가 보란 듯 어깨를 돌리며 운동화를 꿰신었다. 안 그래도 송아지에게 밀리는 차에 어디라도 훌쩍 가버리고 싶은데, 당장은 갈 만한 곳이 없었다. 나이 서른을 코앞에 두고 갈 곳이 없어 서성이는 기분이 낯설면서도 울적했다.
“저기, 할머니. 있잖아.”
“알어 알어. 너 뜬다고 한 거. 인하한테 회장 넘기고 뜨는 거.”
“…….”
청연을 뜬다는 것 때문인지, 그의 이름이 나와 그러는 건지.
둘 모두라 해도 무슨 상관이겠냐만 괜히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래봐야 친구 사이에 술 먹고 연락 한 통 없는 무정한 놈인데. 시무룩하던 희림이 뒤늦게 손안에서 울리는 벨 소리를 알아챘다.
“…….”
이번에도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다. 02로 시작되는 낯선 번호를 보며 고심하던 그녀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설령 광고 전화라 해도 이번만큼은 최대한 반갑게 받아줄 작정이었다.
“네에, 여보세요?”
할머니와 꽃순이를 의식한 희림의 목소리가 옥구슬처럼 매끄러웠다. 세상에 갈 곳 하나 없어 서성이는 여자 대신 서울에서도 찾아 헤매는 비즈니스 우먼처럼 등을 반듯이 세웠다.
“네에. 제가 한희림인데 어쩐 일로……. 네?”
보험 가입이든 상조회사든 오랜만에 긴 통화를 해보려 했던 그녀가 우뚝 발을 멈추었다. 왜 그러냐는 할머니와 송아지의 눈망울에도 희림은 번뜩 달라진 얼굴로 수화기를 다른 손으로 바꾸어 잡았다.
“다시 한 번만 말씀해주시겠어요?”
◇ ◆ ◇
“어때? 사진 괜찮지?”
신문을 한 아름 들고 온 연주가 인하의 반응을 떠보았다. 아무리 봐도 알 수 없는 무심한 표정에 안달할 법도 했지만 오늘따라 그녀는 여유가 넘쳤다.
“내가 찍었지만 진짜 역동적인 거 같아. 숨겨진 재능이 드러났다고 할까, 현장에서 발로 뛰는 체질이라는 거지.”
“뭐, 그래.”
“군수님도 이참에 사진 아주 크게 뽑아다가 청사에 걸어놔야 하지 않겠냐고 하시는데.”
“아니, 사양할게.”
비스듬히 웃으며 신문을 내린 그가 칼 같은 거절로 연주의 청을 잘라냈다. 그러나 보통 이쯤에서 물러나야 할 그녀는 어쩐 일인지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 부끄럽다거나 쑥스럽다거나.”
강인하를 알게 된 이후로 그를 상대로 제가 이렇게까지 자신감이 넘치는 적이 있었을까. 주춤하기는커녕 새삼 인자한 미소로 인하를 응대했다.
“그래도 내 사진 실력 진짜 괜찮지 않아?”
“음.”
인하가 뻔뻔하게 들이대는 연주에게 눈을 치떴다. 주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사진들이긴 하지만 확실히 생동감 있는 사진들이 꽤 감각이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이제야 한희림이 왜 이렇게까지 기러기와 신문에 치를 떨었는지, 드디어 알게 됐다는 깨달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인하가 지극히 제삼자를 대하는 기본 매너로 가장 시의적절한 대답을 내어놓았다.
“그래. 앞으로도 쭉 열심히 정진하기를 응원할게.”
“어어, 그래서 말인데…… 아마 힘들어 같아.”
“…….”
설마 왜냐고 물어봐야 하는 건가.
안경테 너머 미간에 잠시간의 고심이 스쳐갔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연주는 완전한 제삼자라고는 할 수가 없다. 희림의 두 친구들 중 그나마 정하보다는 마음에 드는 존재였으니 그도 전에 없던 인내심을 발휘했다.
“무슨 일 있어?
“그게 말이야……. 휴우.”
도입부부터 심상치 않지만 인하는 잘 참아냈다. 사실 참고 기다리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남자였다.
“안 좋은 일인가 본데.”
“내 말이! 인하 네가 그렇게나 궁금해하니까 너한테만 살짝 말해주자면…….”
과연 연주가 기다렸다는 듯 바짝 달려들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그녀의 연기를 바라보던 인하가 한마디로 요점을 정리했다. 대뜸 신문을 싸들고 들이닥칠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그러니까 후원이 필요하다고?”
“으응. 솔직히 너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얘기 하는 게 염치없는 거 나도 아는데, 그래도 체육대회 날 보니까 네가 의외로 마을 일에 관심이 많은 거 같아서.”
“…….”
“설마 구상현을 그렇게 내리꽂을 줄이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체육대회 같은 건 유치해서 절대 싫다고 하던 바로 그 네가,”
“얼마면 되는데?”
점차 의미심장해지는 연주의 말에 인하가 조용히 결론으로 넘어갔다. 당연히 거절 따위는 모르는 그녀였지만 염치가 있는 인간이다 보니 돈 이야기에는 조심스러워졌다.
“……이게 지금 우리가 일주일에 한 번씩 내서 배달까지 하고 있는데 그것도 힘들어질 거 같아서. 그래도 이거 챙겨 보는 분들 생각보다 많거든. 여기 산골짝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다른 소식통도 별로 없고……. 그래서 내 생각에는…….”
들릴 듯 말 듯 소심한 액수를 알아들은 인하가 헛웃음을 삼켰다. 도대체 얼마를 말하려고 저리 뜸을 들이나 했는데, 옷 한 벌도 안 될 만한 소소한 금액에 허탈함이 밀려왔다. 한숨과 함께 머리를 짚은 그가 고민을 하고 있나 싶었는지 연주는 슬쩍 눈치를 살폈다.
“물론 공짜는 아니야. 부록이 있어!”
“……응?”
“자그마치 농민일보 제1호 호…… 후원자님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에 상응하는 혜택이 있어야지!”
드디어 숨겨둔 비장의 카드를 꺼낸 연주의 온 얼굴에 비장한 웃음이 감돌았다. 온갖 험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갈고닦은 실력의 ‘맞춤형 포토그래퍼 스페셜’이다. 누구든 한 번 보면 마음에 들지 않을 수가 없는, 더구나 말 한마디에 씨름판에 뛰어들 남자라면 빠지지 않고 배길 수가 없는 인물 사진 앨범을 그에게로 공손히 밀었다.
“정기구독도 가능합니다, 고객님.”
◇ ◆ ◇
긴 협의 끝에 연주가 돌아가고 나서도 그는 한동안 테이블 앞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손안의 사진들을 넘기며 찡그리다 피식거리다, 이렇게 하루가 가버릴지도 모르겠다. 바로 어젯밤에 찍은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괴고 있던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근데 있잖아. 난 너한테 화가 안 나.”
차라리 화를 내든가.
그가 쓸데없는 미련으로 테이블 위 손가락을 또르륵 굴렸다. 저에 대한 감정이라면, 그것도 울컥 터져 나오는 감정이라면 더욱 좋았다.
화가 나지 않는다니, 그게 가능하구나.
씁쓸한 웃음이 입술 끝에 맺혔다. 언제든 터져버릴 것처럼 불쑥 감정이 치솟는 것은 아직 저뿐인 모양이었다. 어제 그 한마디에 도리어 저는 혈관이 바짝 당기는데, 그녀는 어찌 그럴 수가 있는지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긴, 귓가에 속삭이는 그 음성에 담은 말이 무엇이든 머리에 온전히 남았겠냐마는.
“…….”
똑똑, 노크 소리에 그가 사진을 덮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주가 다시 돌아온 모양이라 그녀가 놓아두고 간 모자를 집어 들었다. 설령 그게 아니라면 다시 지갑을 열면 그만일 테니 망설일 것도 없었다.
“그거 봐. 모자랄 바에 처음부터 넉넉하게 준다…….”
“강인하! 인하야!”
“…….”
눈앞이 다 환해지는 희림의 웃음에 그가 자연스레 지갑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왜 희림이 이곳에 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그녀에 대해선 어떤 이유도 한 번에 와 닿은 적이 없다. 그냥 왔으면 온 거다. 그 외에 뭐가 더 필요하려나.
“자고 있었어? 뭐 했어?”
“……그냥 좀.”
“그런데 그거 뭐야? 그거 연주 모자 아니야?”
인하가 미처 던지지 못한 모자를 발견한 희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할지. 인하가 눈썹 앞머리를 문질렀다. 딱히 오해랄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오해를 할 성격도 아니지만, 한 번쯤 그녀가 깜짝 놀라 울상 짓는 모습을 보는 것도…….
“안 돼!”
“……응?”
“절대 안 돼! 조연주랑 말하고 그러지 마!”
비록 그가 생각한 반응과는 달랐지만 이것 역시 새롭기는 했다. 연주의 모자를 뺏어 저 멀리 내팽개친 희림이 그를 감싸듯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걔랑 절대 둘이 있으면 안 돼! 응?”
“왜?”
“그냥 안 돼. 나나 되니까 걔를 상대하는 거지 너는 못 당한다니까? 걔한테 한번 잡아뜯기면 너 개털 될지도 몰라.”
단번에 울상이 된 그녀가 그에게 다짐을 받듯 옷자락을 꼭 잡아당겼다. 얼른 약속하라는 듯 발까지 구르자 인하가 겨우 입술을 맞물었다.
“음.”
내가 생각한 질투도 아닌 모양이고, 네가 생각하는 개털도 될 일이 없건만, 어찌 이렇게까지 즐거운지 모르겠다. 이 역시 언제든 찾아오는 그녀에게 이유가 필요치 않은 것처럼 상대가 희림인 이상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