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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32/80)

31화

“너는 조연주랑 둘이 잘 있잖아.”

“야아, 그건 내가 뜯어먹을 것도 없는 알거지 개털이라서 안전한 거지. 너 같은 애는 조심해야 해! 특히 농민일보 어쩌고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면 함부로 눈길도 주지 말란 말이야.”

“…….”

“알았지? 응? 약속해.”

얼마나 조바심이 나는지 희림은 발뒤꿈치까지 들어 매달리듯 그를 재촉했다. 인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안심한 듯 그녀는 웃음을 되찾았다. 이제는 마음 놓고 들어가도 되겠다며 희림이 테이블로 향하는 순간, 멈춰 있던 그의 몸이 재빠르게 그녀를 막아섰다.

“아…….”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이에서.

“안 돼.”

“……응? 왜?”

“그냥. 나랑 여기 있어.”

“…….”

부스스 테이블을 돌아보려던 희림이 마른침을 삼켰다. 물론 그러려고 이곳까지 오기는 했지만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건지는 여전히 적응이 필요했다. 장난처럼 그를 밀어내볼까 싶었지만 이제 인하는 테이블을 바라보려는 그녀의 시선까지도 완전히 차단해버렸다.

“나 보러 온 거 아냐? 그럼 여기 있어도 되는 거잖아.”

“그건 그런데 난 커피라도 마시면서……. 아니다. 괜찮아!”

커피쯤이야 뭐.

너무 자연스레 그의 커피에 길들여지는 것 같단 생각에 희림이 고개를 흔들었다. 무엇보다 오늘은 나름대로 용건이 확실했다. 언제라고 아닌 적이 있었겠냐마는 더욱 자신감이 넘쳤다. 벌써부터 말을 하고 싶어 간질거리는 핑크빛 입술이 인하의 시선을 어지럽혔다.

“차라리 잘됐네. 이참에 우리 그냥,”

“나의 아름다운 숲!”

“…….”

이참에 제대로 이야기나 해보자 하려던 그가 서서히 손을 내렸다. 한순간 바짝 마른 눈가와 입술에 묘한 기대감이 스쳐갔다. 하지만 그조차도 희림의 두둥실 떠오른 기대감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나 아침에 누구 전화 받았는지 알아?”

“누구?”

“그 뭐냐면, 아아. 방송국이래!”

“…….”

“청연에서 다큐멘터리 찍는다고!” 

참고 참은 희소식을 드디어 꺼낸 희림이 자신의 입가를 두 손으로 가렸다. 한발 늦은 웃음으로 고개를 흔든 인하가 가슴 앞에 두 팔을 교차시키자, 그녀는 흥분을 어쩌지 못하고 그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나의 아름다운 숲, 그거 사계절 다큐멘터리 찍는대. 그것도 전세계 송출되고 그런 거라는데 대단하지!”

“그러게.”

그가 점차 자세가 삐딱해지는데도 희림은 장난스레 눈을 가늘일 뿐이다. 가느다란 몸으로 기쁜 소식을 온전히 감당하기 힘든지 춤을 추듯 어깨까지 흔들었다.

“진짜 생각도 못 했는데! 와아,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지?”

“……신났네.”

“아니. 그치만 확실한 건 또 아니라서.”

실컷 다 신나놓고, 희림은 한발 늦게 콧잔등을 찡그렸다. 인하의 의아한 시선에 그녀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사실은 거기서는 하고 싶은데 아직 작가님 허락을 못 받았대.”

“…….”

“그 작가가 원래 인터뷰 같은 것도 안 하고 이런 건 질색이라나 봐. 그치만 작가님 허락 받으면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혹시나 잘되면 나한테도 도와달라고 하는데…….”

종알종알, 희림의 음성이 갈수록 활기를 되찾았다. 청연은 저처럼 잘 아는 사람이 없다느니,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다는 둥, 허세 아닌 허세가 이어졌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는 듯한 그녀의 은근한 눈빛에 인하는 조용히 한마디만 물었다.

“그렇게 좋아?”

“……응? 그럼. 그럼그럼!”

뭘 당연한 걸 묻고 그런대.

희림의 동그랗던 눈이 환하게 휘어지며 그를 타박했다. 빙글빙글 그의 주변을 돌기도 하고 벌써부터 제 머릿속에 촬영이라도 하는 것처럼 진지하게 턱을 괴기도 했다. 꿈을 꾸듯 호숫가를 바라보는 희림의 들뜬 옆모습에 인하가 그대로 기둥에 등을 기대었다.

“…….”

해가 잘 드는 이곳에 서 있으면 저절로 깨닫게 되는 것들이 많았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그까짓 게 뭐가 그리 그렇게 좋은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최소한 뭘 해도 화가 나지 않는다는 감정만큼은 제대로 이해했으니까.

◇ ◆ ◇

“네에? 정말요? 정말 작가님이 허락을 하셨대요?”

어떡해. 난 몰라.

마을회관에 앉아 있던 희림이 잠시 수화기를 가리고는 가볍게 발을 굴렀다. 겨우 숨을 고른 그녀가 다시 조심스레 전화기를 귓가에 붙였다.

“네에. 그랬군요. 네에……. 그럼 그때 뵐게요.”

전화를 끊은 그녀가 이 벅찬 마음을 누리듯 휴대전화를 가슴에 꼭 안았다.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말 많고 궁금한 건 더 많은 회원들이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뭐여, 왜? 뭐 어케 된 거여?”

“한대요! 우리 마을에서 찍는대요!”

“진짜?”

와아아, 체육대회에 이어 다시 열화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사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회장님이 이렇게 기뻐하면 응당 좋은 일이겠거니, 희림이 비위를 맞추려는 심산이 대부분이었다.

“좋네, 좋겄지. 그럼!”

“그르니까. 젊은 회장님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시겄어?”

“아니에요. 이건 저 혼자 할 일이 아니란 말이에요.”

이제는 실전이다. 희림이 없는 안경을 눌러쓰듯 엄중하게 그들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이번 일이 어떤 가치와 의미가 있는지부터 설명해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응.”

“……아니에요. 됐어요 그냥.”

한껏 가슴이 부풀었던 희림이 고개를 흔들었다. 설명한다고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지만, 들을 준비부터가 안 되어 있었다. 당장 제가 전화를 끊자마자 모포 앞으로 돌아가 화투장을 붙잡는 회원들의 태도부터 고쳐야 했다.

“자, 지금부터 안온마을은 당분간 화투 없는 마을이 될 거예요. 아셨죠?”

“아 왜애! 그런 게 어딨다고 그려!”

“맞어! 어떻게 화투가 없는 안온마을이 있을 수 있단 말이여!”

“네. 그건 상가도 없는 상가 번영회 회장님이 대답해주겠어요. 화투 접으세요.”

“…….”

제 가게가 무너진 것이 오늘처럼 유용할 수가 없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딱 다무는 할머니들 앞에서 희림은 매섭게 눈을 빛냈다.

“일단 여기 할머니 두 분은 미화 담당이에요. 사흘 후에 거기서 답사를 온다니까 최대한 우리 마을 깨끗한 모습으로 보여줘야죠.”

“으응.”

“그리고 할머니는 뭐가 좀 있어 보이게, 풍성하게 보여야 하니까 당장 과수원에 가서…….”

한 분 한 분 빠지는 것 없이 골고루 임무를 분배한 희림이 두 손을 맞잡았다. 구시렁거리면서도 결국 임무를 수행하러 흩어지는 회원들이 깨알 같았다. 자, 이제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려는 그녀가 냉장고 옆에 걸린 희뿌연 거울을 앞에 섰다.

“어디 보자. 한희림 너는…….”

◇ ◆ ◇

오래된 군청에는 드나드는 손님들도 대부분 나이가 지긋했다. 건물과 함께 나이 먹어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머리부터 희끗했다. 차려입든 아니든 옷차림도 나이를 따라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꽃무늬가 있냐 없냐’ 혹은 ‘목 수건을 했냐 아니냐’ 정도의 차이점만 있었다.

그런 청연군청이 입구부터 번쩍번쩍했다. 희림의 등장과 함께 공기의 흐름부터가 달라진 듯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 뽀얗게 눈부신 피부와 공을 들인 눈화장, 단정한 듯 세련된 검은 원피스가 군청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간간이 “저기 회장님 닮은 미인은 누구냐?”라는 말이 들려왔지만 저 참견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직접 와서 묻지 않는 걸 보면 확실히 달라 보이긴 하는 모양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이 들어간 희림에게 있는 그대로의 감상을 내뱉을 수 있는 것은 군청 내 오로지 한 사람뿐이었다.

“돌았네. 오늘 뭐 어디 날 잡았냐.”

“…….”

들리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

연주의 커다란 감탄에도 희림은 모른 척 제 갈 길을 나아갔다. 물론 그냥 놓아줄 연주가 아닌지라 금세 따라붙어 키득거렸다.

“야, 진짜 장난 아니다. 힘 한번 제대로 줬네.”

“나 진심이거든?”

“알지. 어디 한희림이 진심 아닌 적이 있었겠어.”

농담 반 진담 반, 연주가 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도 이렇게 꾸며놓으니 정말이지 그 미모가 눈에 확 띄었다. 연예인이라 해도 믿을 정도라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했다.

이런 애가 이런 시골 바닥에서 회장을 빙자한 머슴 노릇이나 하고 있다니.

이것만은 차마 대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어 칙칙한 표정으로 대신했다. 그녀가 미리 부탁했던 자료들을 건네주자 희림은 반색했다.

“고마워, 조연주. 내가 네 덕 보는 날이 다 있네.”

“어려운 것도 아닌데 뭐. 근데 네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연주는 가방 속 자료들을 넘겨보는 희림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생각지 못했던 친구의 반응에 그녀가 싱긋이 웃었다.

“……으이그. 그래도 친구라도 내 걱정을 다 해주네.”

“아니. 네 걱정이 아니라 내 걱정. 일개 군민인 네가 이렇게 설치고 다니는데 나랏밥 먹는 넌 왜 놀고 있냐고 군수님이 뭐라 하실 거 같아서.”

“…….”

그럼 그렇지.

일말의 감동마저 취소한 희림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걸어갔다. 말은 이렇게 해도 청연에 관련된 자료들을 전부 모아준 건 연주였다. 무엇보다 대사를 앞두고 이런 사소한 것으로 싸울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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