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내가 너 잘되게 도와준다고 했잖아. 우리 약속했잖아.”
“너 지금 무슨 소리를.”
“너 카페 잘돼야 하는데, 그러려면 청연이 더 많이 알려지고 그러면 도움이 될 거 같아서.”
“…….”
“너, 넌 벌써 커피도 잘 끓이고 다 잘하니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이렇게라도.”
작게나마 웃으면서 시작했던 말이 자꾸만 떨리며 일그러졌다. 난 정말 잘해보려고 한 건데. 무책임하게 인하를 눌러앉혀두고 그냥 갈 수가 없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나마 최선을 다해보려고 했다.
길거리에서 서너 시간 기다리는 정도쯤이야.
인하를 생각할 때마다 따끔대는 그 마음보다 힘들 것도 없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강인하가 자신을 저리 무섭게 몰아붙이는 것만은 견디기가 힘들다. 희림이 저도 모르게 달아오른 눈가를 쓱 문질렀다.
“……그 사람들이 여기 예쁘게 잘 찍어주면, 너랑 너네 카페에도 좋은 일이니까,”
“나한테 필요한 걸 왜 네가 정해?”
“…….”
“네가 뭔데.”
짙은 어둠 속에서도 그의 그림자는 더욱 검게 일렁였다. 머리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의 압박감에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그녀의 손이 그에게 잡혀 있었다. 희림의 입술이 원망스레 열렸다.
“……내가 뭐라니. 넌 어떻게 그런 말을, 으읏.”
순식간에 내리 닿은 그의 입술이 그녀의 남은 모든 말을 집어삼켰다. 어찌 밀어낼 여력조차 없었다. 힘이 없는 건지 그럴 의지가 없는 건지, 그도 아니면 뜨겁게 파고드는 그의 움직임에 녹아버린 건지. 간신히 버티고 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대로 그녀가 주저앉기 직전, 깊이 얽힌 혀를 풀어낸 인하의 두 눈이 그녀의 시선을 앗아갔다.
“이제 알겠어, 나한테 진짜 필요한 게 뭔지?”
◇ ◆ ◇
청연을 받치듯 아래로 길게 둘러싼 한울산의 겨울은 온통 흰 눈뿐이다. 그 순백의 겨울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산수유 열매 하나뿐이라, 하얀 설산 위로 붉은 열매가 꽃처럼 흐드러졌다.
이것 좀 보라며, 산수유 가지를 꺾어주던 그녀는 손이 시리다며 하얀 입김을 뿜어냈다. 하지만 그 가지를 전해 받은 나는 이보다 더 뜨거울 수가 없어 입김조차 나지 않는 마음을 삼켜야 했다. 지금도 이리 뜨거운데 곧 다가올 봄은 얼마나 더하다는 건지, 잇새로 짓이기는 달콤 쌉싸름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겨울’ 4장, 한겨울의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