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차마 키스라고는 도저히 말이 나오질 않아 뽀뽀라고 고쳤지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제가 생각해도 너무 뜬금없이 끌어다 붙였으니 저 눈치 빠른 승냥이가 눈치를 못 챌 리 없다.
“그, 그러니까. 내 말은,”
“그래서?”
“…….”
“그 뒤에 계속해보라고!”
잠시 잊었다. 연주가 정하를 좋아한다는 걸.
어느 때보다도 흥미진진하게 몰입한 승냥이에게 개연성은 겉치레에 불과했다. 이미 상상이라도 해보는 것처럼 배실거리는 그녀에게 희림이 매우 찝찝하게 말을 이었다.
“……그냥 그렇다고. 정하가 약간 불의의 사고 같은 걸로 너한테 뽀뽀했다고 치면 연주 넌 어쩔 건데?”
“혀부터 집어넣어야지.”
“…….”
“그다음에 자빠트릴 거야.”
너무도 구체적이고 가감 없는 답변에 희림이 술을 한 번 더 들이켰다. 그러고도 모자라 몇 잔을 연거푸 마셨지만 연주는 거칠 것이 없었다.
“한희림, 넌 뭘 당연한 걸 물어.”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좋아하는 사람이 먼저 뽀뽀까지 하면 거기에 안 넘어가는 게 말이 되냐? 내가 너네 마을 장승이야?”
벌떡 일어선 연주의 돌발행동에 희림이 억지로 그녀를 끌어 앉혔다.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급하게 키스할 수 있나 궁금했는데, 이제 연주의 입을 막을 수만 있다면 키스건 뭐건 못 할 것이 없었다.
“조용 좀 해! 이러다 누가 들으면 어쩌라고.”
“들으면 난 더 좋지 뭐. 많이많이 알다 보면 안정하가 알아줄 수도 있으니까.”
“야…….”
“그냥 쳐다만 봐도 좋은 애가 뽀뽀까지 알아서 먼저 해주는 걸 어떻게 참아? 내가 스님이야?”
이제 더는 주정도 아니었다. 진심 가득한 연주가 울상을 짓자 희림 역시 눈가를 짚었다. 마음 같아선 울어버리고 싶지만 여기서 울었다간 조연주랑 한데 묶여 드디어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까 참는 것뿐이다.
“가자, 집에.”
“……왜, 내가 부끄러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어, 좀 부끄럽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좋아하면 다 그런 거잖아. 자꾸자꾸 생각나고 어떻게든 해보고 싶고……. 밥도 잘 안 넘어가고, 이렇게 술잔 위에 떠오르고.”
연주가 허망한 웃음으로 제 술잔을 가볍게 흔들자 무작정 그녀를 끌고 나서려던 희림의 손에서도 힘이 빠졌다. 차마 연주처럼 혀를 넣고 덮치는 것까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지만, 조금 전까지 강인하의 얼굴이 떠 있던 술잔에 목젖이 울렸다.
하루 종일 굶은 빈속에 잘도.
“잊자, 잊어야지.”
결국 돌아오는 길에도 그녀가 할 만한 결심은 그것뿐이었다. 강인하가 무슨 마음으로 제게 그랬는지, 저는 또 무슨 마음에 가만히 있었는지는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한 달만 있으면 서울에 갈 거잖아.’
희림은 제 마음을 다잡듯 일부러 앞으로의 계획을 상기시켰다. 엄마 아빠에게도 미리 말을 해두었고,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생각해두었다. 안 그래도 동기들에 비해 늦은 출발이니 이렇게 보낼 수 있는 시간마저도 빠듯할지 모른다.
그런데 남자라니, 그것도 강인하라니.
“하.”
짧은 웃음을 터트린 그녀가 길거리의 돌부리를 쿡쿡 차보았다. 이깟 돌 하나도 제 마음대로 굴러가질 않는데 다른 건 더 말할 것도 없다.
설령 인하의 진심을 안다고 치자.
그렇다고 제가 그 대신 여기에 남을 것도 아니다. 어영부영 계획도 없이 저도 모르게 눌러앉아버리는 건 2년 전으로 충분했다. 그걸로 끝이 난 거다.
“희림이 네가 같이 있으니까 을매나 마음이 좋은지 몰러.”
이곳에 짐을 풀었던 첫날, 제 옆에 누운 할머니가 속닥거렸던 말도 애써 잊었다. 솔직히 아들 며느리도 아닌 손녀가 2년이나 함께했으면 할 만큼 한 거다. 서울에는 절대 안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도 할머니 본인이니 저도 더 이상은 도리가 없다.
“나 왔어!”
한번 강하게 먹은 마음, 밤늦은 귀가에도 눈치 볼 것 없이 성큼성큼 대문을 들어섰다. 만약 여자애가 술 먹고 이게 뭘 하는 거냐 타박을 하면 서울에선 매일 이러고 살 거라 뻥뻥 큰소리도 쳐버릴 작정이었다.
그런데도 제 방 앞에 곱게 놓여 있는 꿀물을 보니 맥이 툭 풀려버렸다.
속 버려, 꼭 마시고 자.
“……뭐야.”
아예 쓰질 말든가, 삐뚤삐뚤한 글자에는 더욱 울컥했다. 모른 척 들어서려던 희림이 무슨 생각인지 할머니의 방으로 향했다. 할머니는 늘 이런 식이라고, 왜 꼭 내가 마음먹을 때마다 귀신같이 알고 이러는 거냐고, 꿀물이 아니라 술주정을 부려야 속이 풀릴 것 같다.
“할머니! 자?”
드르륵, 문을 연 그녀의 숨이 벌써부터 들썩였다. 티브이 앞에 모로 누운 할머니는 이불조차 제대로 덮지 않았다.
“아니, 맨날 드라마 다 보고 주무시더니 왜 꼭 오늘 같은 날만…….”
“…….”
“할머니?”
무심결에 이불을 끌어 덮어주려던 희림이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음냐음냐 성가시단 손길로 이불을 밀쳐내야 할 할머니가 어쩐 일인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주무시는 거라고, 그리 생각하려 했지만 할머니 입가의 허연 거품에 그녀의 눈앞까지 하얘졌다.
“하, 할머니! 할머니이!”
애타게 부르는 목이 끓어올랐다. 제가 이러는 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 무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한 팔로 할머니를 붙들어 안은 그녀가 더듬더듬 휴대전화를 꺼냈다. 119, 누구나 아는 번호를 누르려던 희림의 손이 불현듯 멈추었다.
“……아냐.”
늦어. 늦다구.
읍내에서 바로 온다고 해도 동네 좁은 골목을 들어서지는 못한다. 서울의 부모님께 연락하는 것은 더욱 무모했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는 그녀가 저만 아는 번호를 길게 눌렀다.
“여, 여보세요! 인하야!”
- ……한희림?
“…….”
-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막 잠에서 깨어난 듯한 그의 잠긴 음성에, 이상하게도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희림이 매달리듯 휴대전화를 부여잡았다.
“흐으윽. 인하야. 우리 할머니 좀 살려줘!”
◇ ◆ ◇
“다행히 CT상으로도 큰 문제가 없네요. 출혈도 극소량이고 이 정도면 따로 수술할 것 없이 며칠 안에 자연적으로 흡수될 걸로 보입니다.”
“아아, 네에.”
“자세한 건 환자분이 깨어나셔야 알겠지만 아마 잠시 어질어질하다 바닥에 부딪히면서 출혈이 있으신 건 아닐까 싶네요. 아마 오늘 내일 안에 깨어나실 텐데 그래도 고령이시니 확실히 안정될 때까지는 당분간 여기서 경과를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의사의 말에 희림을 비롯한 온 가족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소식을 듣자마자 이곳까지 내려왔으니 잠 한숨 이루지 못한 눈들이 퀭했다. 이해한다는 웃음을 지은 의사는 이제 좀 쉬라며 인사했다.
“그래도 빨리 오기를 천만다행입니다. 어르신들 시골에 혼자 계시다가 쓰러져 제시간에 못 맞춰 오면, 쉽게 끝날 일도 큰일 치르는 게 부지기수지요.”
“네에.”
“아, 그나저나 한국대 본원 원장님이랑은 어찌 아시는 사이이신지…….”
“……네?”
지나친 안도로 기운이 쭉 빠졌던 희림이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의사의 말을 듣고야 겨우 이곳이 정안에 위치한 한국대병원 분원이라는 것을 깨달은 정도이니, 도무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누구인지,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겨우 앵무새처럼 되뇔 뿐이었다.
“한국대 원장님이요?”
“그분이 저희 은사님이신데 새벽에 갑자기 전화 오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빨리 병원 나와서 살려놓으라 호통치시는 통에 정신없이 달려왔지요.”
그의 말을 증명하듯 의사의 옷차림 역시 말쑥한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겨우 하얀 가운을 걸쳤을 뿐이지 흐트러진 머리며 옷이 제집에서의 모습처럼 편안했다.
“그래도 다행히 결과가 좋아서 저도 은사님께 욕은 안 먹게 되었네요.”
“아…….”
“제가 안 그래도 정신없는 분들 잡고 뭐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이야기는 다음에 하지요.”
웃으며 묵례하는 의사에게 희림과 가족들이 엉거주춤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기운이 쭉 빠진 엄마가 자리에 앉자 쌍둥이 동생들이 희림을 둘러쌌다.
“뭐야 뭐야. 누나가 한국대병원 원장을 어떻게 알아?”
“야, 뭘 그런 걸 묻냐. 누나가 급하니까 아무나 막 가져다 팔았겠지.”
“아니, 아까 그 의사가 어디서 전화 왔다고 하니까……. 하긴, 그게 중요한 게 아니구나. 우리 할머니 살았으면 그걸로 된 거지! 누나 완전 잘했어!”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주거니 받거니 투닥대던 그들이 할머니 침대맡으로 다가갔다. 지난밤과는 달리 말끔한 얼굴의 할머니는 정말로 잠든 것처럼 평온했다. 역시나 넋이 나간 것처럼 내내 아무런 말도 못 하던 아빠가 뒤늦게 희림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우리 장한 딸내미가 큰 고생 했네. 진짜 우리 희림이가 할머니 살렸지!”
“……아니야. 그런 거.”
“아니긴. 아빠가 너한테 얼마나 고마운지…….”
생각만 해도 울컥한지 아빠는 기어이 눈물을 훔쳤다. 늘 그렇듯 엄마가 눈물을 닦아주고서야 아빠가 진정하자 쌍둥이들이 그새를 못 참고 키득거렸다. 결혼한 지 30년이 되도록 죽고 못 사는 엄마 아빠를 비웃던 그들이 희림에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