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내가 왜 이러지.’
몇 번이고 눈을 힘주어 깜빡거리고, 안 되겠다 싶어 고개를 들어 비를 맞아봐도 정신이 쉽게 돌아오질 않았다. 인하와 농도 짙은 키스를 하던 그 순간부터 뛰기 시작한 가슴이 이제는 턱 끝까지 치달았다.
이게 다 강인하 때문이야.
매번 같은 결론을 내면서도 이번엔 속이 시원하질 않았다. 차가운 빗방울을 그리 맞고도 얼굴은 갈수록 뜨거워졌다. 그런 걸로 치면 제게 옷까지 벗어주고 온몸으로 비를 맞는 강인하는 얼마나 뜨거울지, 차마 상상이 가질 않는다.
저렇게 들러붙은 셔츠 속으로 몸이 훤하게 비치는데도.
“의외네, 한희림. 이런 데 약하고.”
“어?”
“비 오니까 무서워서 그래?”
강인하가 그리 물으니 또 그런 것도 같다. 그의 젖은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것을 들키기라도 할까, 그녀가 재빠르게 시선을 내렸다. 하얀 얼굴에 새초롬한 모습이 인하에게도 꽤 새로운 모양이었다.
“나한테 잘 따라다니라더니.”
“그, 그렇게 놀려봐야,”
“귀엽다고.”
“…….”
안 그래도 인형 같던 희림은 눈동자의 초점마저 흐려졌다. 이제 저로서는 감당이 안 되는 이 두근거림을 제외하고라도, 세상 모든 잘못은 다 강인하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단단히 굳어졌다. 강인하만 없으면 이 세상은 더없이 안전해질 것이다.
“조심하라니까.”
“아…….”
급기야 있는 줄도 몰랐던 물웅덩이에 발을 내딛기 직전, 인하가 번쩍 그녀를 들었다. 빙그르르 돌려 곧 내려두기는 했지만 그때부터는 겨우 서 있던 다리에마저 힘이 풀려 흐느적거렸다.
쟤는 서울에 가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여자한테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이런 일이 그렇게 자연스러운 걸까.
억지라는 걸 알면서도 한번 그리 생각하자,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나마 집 앞이라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그대로 파묻혀 수재민이 될 뻔했다.
“……다 왔네.”
인하 역시 그때부터는 급격히 웃음이 사라졌다. 뒷목에 올린 손이 보는 것만으로도 뻐근했다. 그리도 씩씩하게 그녀를 이끌던 걸음이 이제는 한 걸음도 더 내딛기 전에 진흙탕 속으로 푹 꺼져버릴 것처럼 무거워졌다.
“……난 그럼 돌아가서,”
“혹시 라면,”
“어.”
희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금세 정신이 돌아온 것처럼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도 못 본 척했다. 본인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몰라 머뭇거리는 그녀의 손을 낚아챈 인하가 제집처럼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넌 그럼 그 정도도 안 주려고 했어?”
◇ ◆ ◇
희림은 현실을 잘 파악하는 여자였다. 자신도 그다지 똑똑하게 살아왔다곤 생각하지 않지만, 그런 저보다도 멍청한 세계 3대 바보를 점찍어두었다.
첫째는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책 속에서 소시지를 코에 붙인 서양 남자였고, 두 번째는 서울에 가고도 남을 성적에도 기어이 정하의 곁에 있고 싶다며 청연군청에 눌러앉은 연주였다. 그리고 마지막 자리는 라면 먹고 가라고 했더니 진짜 라면만 기다리는 강인하가 차지했다.
“다 됐어?”
“어어. 아직.”
뭘 바란 거람.
가스 불 앞에서 한숨을 쉰 그녀가 대충 물을 부었다. 대충 면을 넣고, 역시나 대충 스프도 넣었다. 심지어 마구 휘젓는 젓가락도 성의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혹시 몰라 뒤를 돌아보는데 그는 어느새 꽃순이의 축사를 손보고 있었다.
“…….”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된 걸까.
툭, 희림이 또 한 번 답 없는 질문을 던지며 싱크대에 기대섰다. 그가 이곳으로 내려온 지 겨우 한 달여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믿기질 않는다. 언제나 늘 저렇게 있던 것처럼, 인하는 뭐든 자연스러웠다.
꼭 오늘 제게 했던 가슴 떨리는 행동만이 아니다. 지금껏 청연에서 보내는 그의 일상 어디에도 위화감이 없었다. 무심히 길을 걷다 웅덩이가 나오면 자리를 바꾸고, 별말 없이 쓰러진 푯말을 세워놓기도 했다. 제집에 있는 양 남의 송아지를 쓸어주는 손길 또한 지나치게 친숙했다.
“아…….”
꼭 제 머리를 쓰다듬는 것만 같은 뜨거운 감촉에 희림은 저도 모르게 매만지던 머리칼에서 후다닥 손을 내렸다. 누가 볼까 놀라 얼른 팔을 털어냈지만 당혹스러움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제 자신은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지 않는 정도의 분별력을 갖추었다. 세계 4대 멍청이가 될 예정이 아니라면 두 번은 속지 않는다.
특히 강인하에게는.
“……이제 다 되지 않았어?”
“어어, 응.”
주방으로 들어선 인하가 목에 걸친 수건으로 머리를 가볍게 쓸어냈다. 흘깃 희림의 어깨 너머 내려다보는 그의 머리칼에 고여 있던 빗방울이 그녀의 어깨로 떨어졌다. 직접 닿은 것도 아닌데 어찌나 머리가 쨍하게 울리는지, 놀란 그녀가 서둘러 가스 불을 껐다.
“다 됐어. 잠깐만 기다려.”
“응.”
또다시 그에게 닿기라도 할까 적당히 물러선 희림이 냄비를 식탁 위로 옮겼다. 정작 저는 식욕이 뚝 떨어져 물 한 잔도 제대로 마시질 않으면서 남의 라면은 한강 물을 부어놨다.
“먹어 얼른.”
“……넌?”
“난 됐어. 머리나 좀 닦고 오려고.”
어쩐지 그와 마주 앉아 있을 자신이 없어진 그녀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할머니가 병원에 계시니 이 집에 혼자 있는 게 당연한데도 인하가 보이지 않는 순간부터 가슴이 허전해졌다.
‘미쳤어, 한희림.’
흐느적대는 팔로 수건을 꺼내 든 그녀가 서랍장 위 거울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 꼴로 그러고 다녔다니. 온통 달아오른 얼굴은 둘째 치고 이렇게 흐리멍텅 넋 나간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자 차라리 빗속에 파묻혀 있을 걸 싶었다.
“정신 차려야지. 눈 똑바로 뜨고.”
거울에 비친, 일부러 소리 내어 되뇌는 입술도 제 것 같지가 않다. 그럴 거면 왜 돌아가는 인하를 불러 세워서는. 대체 저도 무슨 생각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 걸로 치면 군수님 딸이 그에게 관심 있단 소리에 앞뒤 없이 내달렸던 순간부터 되돌아봐야 한다.
‘아니, 왜 나 혼자만 이러는 거야, 강인하는 멀쩡한데.’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건 그거대로 억울해졌다. 제집처럼 이곳을 휘젓고, 제 것처럼 제 마음을 휘젓는 그의 존재가 괜히 울컥했다. 지금도 저는 어쩔 줄을 모르고 서성이는데 인하는 저리도 태연하다. 느긋하며 여유롭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양 무덤덤했다. 새삼 수없이 느껴왔지만 인하가 그런 남자로 변해갈 동안 저 혼자만 예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기분이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서울에서 큰 성공을 하고 왔다는 그가 그대로이길 바라는 것이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제가 좁은 세상에 갇혀 있는 동안 인하는 큰 세상에서 보다 많은 이들을 만나왔겠지. 그리 생각하자 거울 속 자신이 더욱더 볼품없이 느껴졌다.
“한희림, 뭐 해?”
“……응, 가.”
멀찍이 저를 찾는 목소리에 그녀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제 마음이 어떠하든 인하의 앞에서는 별다른 동요를 하고 싶지 않았다. 빠르게 주방으로 돌아간 희림이 별것 아닌 것처럼 태연한 표정을 흉내 내어보았다.
그래, 신경 끄자.
강인하는 알아서 잘 사는 놈이다. 수건 주고 라면 줬으면 나도 해줄 만큼 해줬다. 여기서 더 해줘봤자 양심도 없는 몸에 밸까지 없어질 뿐이다.
“한희림 너도 좀 먹지.”
“아냐, 난 됐어.”
그제야 마음이 조금 편해진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라면을 보니 연주의 타박이 떠올라 뒤늦게 아차 싶었다.
“인하 너도 입맛에 안 맞으면 굳이 안 먹어도 돼.”
“아껴 먹는 건데?”
“…….”
얘가 뭐래.
미간을 찡그린 인하는 라면을 젓가락 가득 들어올렸다. 안경을 안 쓰면 허여멀건 국물도 보이질 않을 텐데, 그는 뚝뚝 끊기는 불어터진 면발을 한 가닥도 놓치지 않았다. 희림의 버석대는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게 맛있어?”
“당연하지.”
“…….”
“한희림 너 예전부터 라면 하나는 진짜 잘 끓이잖아.”
여전한 그녀의 솜씨에 감탄하는 그에게선 일말의 웃음기도 없었다. 그야말로 세상에 단 하나 남은 마지막 음식처럼 소중히 먹던 인하가 문득 말이 없어진 희림에게 고개를 들었다.
“……너 울어?”
“아니이.”
수건을 아래로 눌러 덮은 희림의 머리칼이 찰랑거렸다. 왜 그러냐 당황한 인하가 손을 뻗고서야 그녀는 보일 듯 말 듯 수건을 걷어내며 겨우 입가를 올렸다.
“음…… 김치도 줄까?”
◇ ◆ ◇
굳이 목련나무에 소원을 매달지 않아도 모든 청연고 아이들의 공통된 소망은 따로 있었다. 하루빨리 청연을 뜨는 것, 어린 시절부터 잠재되어 있던 그들의 소망은 키가 크고 머리가 커질수록 더더욱 강해졌다.
“짜증 나. 우리만 여기 사니까 저런 것도 모르고.”
분식집의 티브이 앞에 앉아 있던 연주는 리모컨을 집어 던질 기세로 흥분을 했다. 주로 티브이에서 휘황찬란한 도시가 펼쳐질 때, 세상의 모든 신나고 좋은 일은 도시에서만 일어날 때, 그들의 탈출 욕구는 거세어졌다.
“우리도 빨리 대학 가서 서울 가야지. 청연에만 사니까 나날이 바보 되는 기분이라니까.”
“내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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