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1/80)

50화

희림의 한마디에 다른 아이들 모두 소리 높여 동조했다. 그 시간에 한 자라도 더 공부하는 게 빨리 청연을 뜰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은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아니, 굳이 알고 싶지가 않았다.

“평생 여기 살다간 우리는 아무것도 모를걸. 좋은 건 서울 애들이 다 해먹고.”

“그러니까!”

“진짜로 저런 연예인들 맨날 보고 살면 기분이 어떨까.”

한숨을 푹 내쉰 아이들이 티브이 속 세상에 더욱 빠져들듯 굴었다. 아이돌을 향한 뜨거운 함성 대신 매미 소리나 울려대는 따분한 시골에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불만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저런 애들처럼 허구한 날 방송국 구경 가는 기분도 평생 모르겠지.”

“난 연예인까진 바라지도 않고 그냥 버스 안 타고도 마트 가는 기분 알고 싶다.”

“조연주, 너는?”

이런 일에는 제일 먼저 앞장서던 연주가 그날은 웬일로 조용했다. 심지어 그 틈을 노려 떡볶이를 먹어치우는 것도 아니다. 멍한 얼굴로 티브이 대신 텅 빈 농구 코트를 향해 턱을 괸 그녀는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좋아하는 애가 날 좋아하는 기분.”

“휴우우.”

10년이 지난 오늘, 연주는 그때보다 더욱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없는 공터 벤치에 걸터앉아 세상 모든 시름을 쏟아냈다. 

“내가 진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런 시골 바닥에 눌어붙어서는.”

“…….”

“우리 예전에 떡볶이 먹으면서 이야기할 때, 그때 깨닫자마자 진즉 떴어야 하는 건데.”

이제는 사라진 분식집 자리를 바라다보며 연주는 눈가를 문질렀다. 들어가지도 않은 모래 탓을 하며 구시렁거렸지만 그렇다고 속이 시원할 리도 없다.

“내가 빨리 청연을 떠버려야……. 야, 한희림, 내 말 듣고 있어?”

“으응?”

연주가 팔꿈치로 꾹 찌르고서야 희림은 헐레벌떡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오늘만큼은 친구 못지않게 눈동자가 흐릿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대충 맞장구치는 게 전부였다. 

“그, 그럼. 듣고 있지.”

“하여튼 전부 다 우리가 여기 붙어 있어서 그런 거야. 서울에 있었으면 전부 다 해봤을 텐데 이 젊은 나이에 여기 짱박혀 있으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바보처럼 사는 거라고.”

“……그래도 여기도 이만하면 괜찮은 편인 것 같은데.”

“한희림, 너 지금 뭐랬냐?”

평소 이런 말에 제일 화르르 타올랐을 희림이 오늘따라 소극적이었다. 아니, 발그스레한 뺨이 어쩌면 청연이 꽤 마음에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새침한 표정만 보면 이 시골구석에서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모든 이치를 통달해버린 것 같기도 했다.

허구한 날 연예인을 보는 기분이라든가 버스 안 타고도 마트 가는 기분까지는 모르겠지만, 그 외의 모든 기분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야아, 너 뭐냐.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야반도주할 생각밖에 없던 애가.”

“……야반도주는 무슨.”

“하여튼 희림이 너 뜰 때 나도 같이 떠버려야겠어. 너 가기 전에 꼭 나한테 말해. 같이 가게.”

“…….”

“아니, 대답은 또 왜 안 하는데!”

오늘따라 매우 비협조적인 희림의 태도에 연주가 버럭 했다. 네가 어찌 이럴 수 있냐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어봤지만 희림은 슬그머니 눈을 피할 뿐이었다.

“요새는 청연에도 있을 건 거의 다 있는 거 같은데 뭘.”

“……누구냐 너.”

“하여튼 너무 극단적으로 그러지 말라구. 건강에 안 좋아.”

이대로는 더욱 궁지에 몰릴 것 같아 희림이 냉큼 일어나 물러섰다. 지금 아무리 ‘예전 네가 모르던 답을 나는 알 것도 같다.’ 입이 근질거린다지만 그리 말했다간 일말의 우정마저 파탄 날 것이다. 희림이 그나마 연주의 기분이 풀어질 만한 방법을 떠올렸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정하네나 가보자.”

“미쳤어? 내가 거길 가게!”

“…….”

누구냐, 조연주 너.

이제 같은 질문을 제가 연주에게 묻고 싶어졌다. 정하라면 반사적으로 입에 침부터 고이던 애가 웬일인지 코웃음을 쳤다.

“나 이제 거기 안 가.”

“왜, 싸웠어?”

말을 해놓고도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청연의 신선 안정하와 싸움을 할 수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대단한 일이다. 그 대단한 장본인답게 연주는 도도하게 눈을 내렸다.

“나도 언제까지 걔만 보면서 애걸복걸할 수는 없잖아. 네가 아무리 매달려도 먼저 안 가.”

“……별로 매달릴 생각까지는 없는데.”

“하여튼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웃기지만 나 나름대로 1등 신붓감이야. 이거 애 이래. 졸업하자마자 공무원 붙어서 적금도 차곡차곡 들어놨고 온 동네 어른들이 나만 보면 며느리 삼고 싶어 난리라고.”

“……그걸 왜 나한테 어필하는 건데.”

“왜냐면 네가 안정하네 간다니까.”

또박또박 쏟아내던 연주가 급격히 소심해졌다. 그러나 금세 또 희림의 옷자락을 붙잡고는 협박 같은 부탁을 잊지 않았다.

“방금 내가 했던 말 외워서 안정하한테 좀 흘려줘.”

“……내가 왜?”

“네가 말하면 안정하가 좀 귀 기울여 들을지도 모르니까.”

“…….”

“그렇게 보든 말든 난 자존심 같은 거 없어.”

연주의 손에 잡힌 제 옷자락이 더욱 팽팽해지자 희림은 어쩔 수 없이 다시금 그 옆에 주저앉았다. 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하냐 따지고 싶지만 사실 남 말 할 처지가 아니다. 지금 청연에서 제일 과거에 얽매여 있는 게 바로 자신일지도 모르니까.

“아……. 예전엔 서울로만 가면 세상일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그치?”

“응.”

희림을 따라 연주도 두 팔을 뒤로 짚었다.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나면 세상 모든 고민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그 답을 이렇게 다시 돌아와서야 깨닫게 된다는 것이 아이러니할 뿐이다.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나 봐.”

“웃겨. 그렇다고 서울로 안 가버릴 것도 아니면서.”

“그건…… 그렇지.”

그래서 더욱 문제였다. 아직 이곳을 떠날 거라는 제 계획은 변함이 없는데 갈수록 제 마음만 변하고 있다. 정작 인하는 그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데, 자신은 그의 모든 반응 하나하나에 촉각이 기울었다.

강인하가 제가 끓여준 라면을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비워냈던 바로 그 밤부터.

일부러 모른 체했던 그의 마음 한 자락을 훔쳐본 것 같은 그 순간부터.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조금이나마 알게 되자 이제는 남은 부분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다. 그놈이 어떤 마음으로 그리 느긋하게 제 곁에 머물러 있는지 갈수록 애가 탔다.

사실 그에게 궁금한 것은 그 하나뿐만이 아니다.

지난 10년간, 강인하가 어찌 살아왔는지 처음으로 진지하게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을 겪어왔을지, 제가 없던 시절의 그가 알고 싶어졌다. 그걸 모두 알게 된다 하더라도 제가 곧 떠날 거란 사실은 변함이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여튼 네가 정하한테 가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 좀 꺼내봐. 준비한 것처럼 말고 평소에 생각하던 것처럼…….”

“미안. 나 오늘 거기 못 갈 거 같아.”

연주의 구차한 디테일에도 불구하고 희림이 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마음도 이 순간만큼은 버렸다. 연이어 울리는 휴대전화를 꼭 쥔 그녀가 부리나케 공터를 빠져나갔다.

◇ ◆ ◇

생활 속의 농민일보 - 일일 기상예보

지난 며칠간의 봄비가 그치며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 완연한 봄으로 접어들었다. 낮 최고기온이 25도까지 오르며 갑작스런 더위와 직사광선에 유의해야겠다. 한편 날이 풀리며 본격적인 관광객의 행렬도 늘어나 한울산의 계곡에도 이른 물놀이를 즐기는 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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