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9/80)

58화

“또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

“아니, 그러고 보니까 내가 오늘 간다고 인사를 해야 하는데, 여기 있는 동안에 또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많아져가지고 내가 갑자기 없어지믄 나 죽은 줄 알 거 아니여.”

“……설마요.”

“아녀 아녀. 그래도 사람이 오믄 온다 가믄 간다 말을 해주는게 도리인데. 101호랑 102호부터 해가지고 쭈욱……,”

역시 회장님 할머니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병실부터 원장실까지 쭉 훑어대는 할머니의 걱정에 인하는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일단 집에 돌아가서 쉬세요. 그다음에 다시 오시고요.”

“그래두 나 죽은 줄 알고 안 그래도 아픈 사람들 기운 빠지기라도 하믄 내가 이 나이에 죄책감이…….”

“전 처방전하고 받아 올게요. 어디 가지 마시고 여기 꼭 앉아 계세요.”

시무룩한 할머니를 놓아둔 그가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왔다. 어쩐지 더 큰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걸음이 빨라졌다. 가쁜 숨을 참듯, 로비 끝에 가서야 난간을 잡은 그가 그제야 겨우 입가를 가렸다.

“흠…….”

“혹시 강 상무 아닌가?”

“…….”

상체를 숙였던 인하가 저를 부르는 음성에 곧장 돌아섰다. 강 상무, 저를 그리 부를 이라면 대부분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비즈니스 상대였다. 특히나 이곳에서 만날 사람이라면 한 사람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원장님 되십니까.”

“아아, 강 상무가 맞네. 아버님이랑 꼭 닮아서 한 번에 알아봤지. 이제 상무라더니 이렇게 훤칠하게 자랐을 줄이야.”

원장의 반가운 인사에 인하도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직접적인 친분은 없지만 제 부탁으로 희림의 할머니에게 특별히 신경을 써주신 분이니 그리하는 게 옳다.

“그나저나 10년 전에도 한 번 봤었지?”

“……네.”

“하여튼 그때도 자네 아버님께 큰 도움 받았지.”

“별말씀을요.”

인하가 가당치 않다며 고개를 그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감사해야 할 건 자신이었다.

“할머님께서 갑작스레 입원하셔서 경황이 없었는데 많이 배려해주셨다 들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아니야. 자네 부친께서 그리 당부하시는데 모른 척하면 안 되지. 우리 병원에 그렇게 두 번이나 통 큰 기부까지 해주시고.”

“……네?”

의례적인 인사로 대하던 인하가 몸을 세웠다.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이라니. 기억을 되짚어보던 그가 이내 쓴웃음을 되찾았다.

“아버지께서 이번 일로 전화 주신 것은 알고 있습니다.”

“아니, 전화 말고 직접 찾아오셨다니까.”

“…….”

“할머니 입원하던 날에 그 바쁜 분이 기어이 저녁까지 대접하겠다며 오셔서 신신당부하셨어. 잘 좀 봐달라고.”

원장은 새삼 우스운 듯 뒷목에 손을 얹었다. 그 잘나가는 기업가가, 10년 사이에 더욱 번듯해진 사람이 제게 그런 부탁을 하는 것도 우스운 판에 그 부탁의 대상이 더욱 아이러니했다.

“하도 간곡하게 말씀하시기에 혹시 모친이냐 물었더니 그것도 아니시라고.”

“……그럼.”

“뭐라더라. 지금 아들 잘 돌봐주고 계신 고마운 분이라고. 하긴, 이렇게 훤칠하게 커도 자식은 혼자 내놓으면 마음 쓰이는 법이지.”

“…….”

꾹 목이 막혀 뭐라 반응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냐며 끄덕인 고갯짓이 전부였다. 누군가의 부름에 한 손을 든 원장이 사라지고야 인하는 난간을 짚었다.

“인하 너도 괜찮으면 그냥 같이 가든가. 불편한 자리는 아닐 테니…….”

“하…….”

정말이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우리의 거래는 그런 게 아니었지 않냐고, 이제 와 멋대로 이게 무슨 짓이냐고, 지금 이곳에 있지도 않은 사람을 향해 부질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허탈하고 허망한 웃음이 한동안 계속되어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리 바쁜 척하시더니.

아니, 그리 바빠 놓고 왜.

무섭도록 규칙적이던 아버지의 생활을 떠올리던 인하가 마른 얼굴을 훑어내렸다.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는 건지. 그로서는 풀리지 않을 의문이 쌓여만 가는 도중에 병실 밖까지 나와 있던 할머니가 그를 맞이했다.

“이제 왔어? 왜 이렇게 얼굴이 허얘? 어디 아퍼?”

“아뇨. 괜찮아요.”

“다행이여. 젊은 애가 아프면 쓰나. 이제 보니까 나 말고 네가 빨리 집에 가서 푹 누워야 되겄네.”

“아뇨.”

“…….”

“전 괜찮으니까 할머니 마음만 편하시면 돼요.”

변함없이 이어지는 걱정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온 그는 할머니의 양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영문을 몰라 갸웃하는 할머니에게 보란 듯 문을 열어 함께 나섰다.

“101호부터 쭉, 인사 다 하시고 천천히 가요. 오늘 안에만 가면 되죠.”

“인하 너는?”

이 순간마저도 한희림의 할머니답게 일단 주는 기회는 놓치지 않는다. 벌써 옆방 병실 앞까지 쫓아가던 할머니가 그를 돌아보자 어느덧 복도 끝에 가 있던 인하가 손을 들었다.

“저도 인사할 데가 생겨서요.”

◇ ◆ ◇

“희림 씨,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커피를 든 성진이 그녀에게 다가와 한 잔을 건네주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내민 희림이 꾸벅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은 여전히 멍하게 굳어 있었다.

“낮부터 계속 안색이 안 좋네.”

“아, 아니에요. 괜찮은데.”

“괜찮긴, 내가 딱 보면 아는데.”

은근슬쩍 말을 놓은 그가 희림의 옆으로 붙어 앉았다. 다른 팀원들이 ‘또 시작이네’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성진은 거리낌이 없었다. 어차피 다들 제 아랫사람들이니 설령 잘못을 좀 한들 어떤가 싶은 우월감으로 가득했다.

“딱 보니까 고민하는 거 있나 보네.”

“……아뇨. 괜찮아요.”

“아니긴.”

그가 제게 말을 해보라는 듯 한 손으로 손짓을 했다. 그래도 희림이 별말 없자 괜히 들고 있던 스케쥴표를 뒤적거렸다.

“그럼 다음 촬영은 보석책방인가? 그 희림 씨 친구네라는?”

“네에.”

정하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가 처음으로 희미한 웃음을 지었지만 그뿐이었다. 인형처럼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희림을 보며 성진이 간을 보듯 인중을 늘였다. 

“뭐 누구 속 썩이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그런 게 아니라, 아뇨. 아니에요.”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엄밀히 따지면 그 반대다. 강인하는 최선을 다해 본인의 임무를 수행 중인데 저는 그렇지 못했다. 인하가 이곳에 와 있을 때는 제발 가라 떠밀어놓고 막상 그가 보이지 않자 세상 모든 것이 희뿌연 기분이었다.

‘화났을까?’

저 대신 할머니를 데리러 가달라 부탁까지 한 주제에 그리 매몰차게 굴었다니.

되돌릴수록 저 스스로에 한숨이 났다. 그를 돕겠다는 명목하에 오히려 제가 온갖 신세는 다 지고 있으니 왜 이런지 모르겠다. 아마 저 같으면 ‘뭐 저런 게 있나’ 단단히 기가 찼을 거라고, 다시는 보지 않겠다 앙칼진 결심을 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자 숨이 저절로 멈춰버렸다.

“그럼 혹시 남자친구 때문에 그래요?”

“네?”

“뭐 스태프들한테 들어보니까 요새 촬영장 주위에 남자 하나 왔다 갔다 거린다길래.”

그녀를 떠보는 성진의 눈짓이 보다 노골적이었다. 일찌감치 점찍어두고 있던 희림에게 누가 있기는 있는 모양인데, 그래봐야 저보다는 별거 아닐 거라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제가 피디로 여기저기 사람들 만나다 보면 별의별 사람들 다 있더라고요. 얼굴 좀 반반하다고 그것만 믿고 설치는 남자들도 있고.”

“…….”

“원래 우리 조감독이 오버를 잘하거든. 시골에서 잘나봐야 얼마나 잘났다고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하하, 그가 한켠에 선 조감독을 비웃었다. 희림이 제 이야기를 듣건 말건 그의 목표는 확실했다.

“그리고 그런 남자들 뭐 뻔하죠. 괜히 큰소리나 치고.”

“아뇨. 그런 적 없어요.”

“없기는. 희림 씨 표정 보니까 각 나오는데.”

성진은 오히려 그녀의 정색을 반기듯 다리를 벌려 앉았다. 제대로 된 대기업 하나 없는 이런 시골에서 촬영장이나 기웃하는 놈이라면 뻔하지, 시골 한량쯤은 경쟁상대로 두기에도 자존심이 상했다.

“저어, 피디님. 이제 들어가셔야 하는데,”

“잠시만!”

그가 자신을 부르는 조감독에게 성가시다 손짓을 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려는 것처럼 팀원들을 다루는 것도 점점 더 거침이 없었다.

“저런 새파란 애가 피디 말하는 데 끼어들고. 우리 때 같으면 상상도 못 하던 일인데. 하하.”

“…….”

“사실 우리 쪽은 입사하자마자 배우거든요. 자고로 사람은 주제를 알아야 한다고,”

“한희림!”

“아…….”

넋이 나간 것처럼 앉아 있던 그녀의 눈에 한순간 이채가 돌아왔다. 성진이 어찌해볼 사이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희림이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향해 단번에 돌아섰다.

“강인하?”

“…….”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그리고 오래 돌아볼 법한 남자였다. 어지간한 연예인들은 질리도록 보아온 제작사 직원들도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본능처럼 남자에게로 모여드는 사람들의 시선에 성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저 시골 한량이라기에는 제 예상에서 크게 빗나간 인하의 등장이 달가울 리 없다. 특히나 제 앞에선 인형 같기만 하던 그녀가 저리 당황하며 서두르는 것에 더욱더 신경이 곤두섰다.

“너, 너 뭐야. 언제 또 왔어? 병원 간다면서 갑자기 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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