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야, 조용. 쉬잇. 조용해야지!”
“회장님이 조용히 하랬잖아!”
날뛰는 혈기에도 거스르기 힘든 그녀의 말에 철저히 복종했다. 희림이 한 번 더 돌아봐주기를, 자신들을 향해 웃어주기를, 바짝 치켜든 뒤꿈치가 간절했다.
“자,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거기, 조용 좀 해주세요!”
“…….”
물론 또래답지 않은 침묵이 단순히 회장님에게 잘 보이려는 것만은 아니었다. 반나절도 안 되어 자신들의 워너비가 되어버린 이 위대한 남자를 극도로 의식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회장님을 보고도 태연하게 끄덕이던 고개와 무심한 눈짓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오두방정뿐인 남학생들에게 크나큰 깨달음을 남겼다.
무릇 남자란 이래야 한다고. 일단 따라 하고 보자고.
“근데 저기 저 감독 같은 놈은 왜 자꾸 회장님한테 치근거려?”
“그러니까.”
“…….”
연신 마른 목을 울리던 남학생이 결국 옆 사람의 귓가에 속삭였다. 자꾸만 희림에게 몸을 바짝 붙이며 말을 건네는 피디에 대한 적개심이 깊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라도 이 침묵을 깨트릴 용기는 없었다. 그저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이 전부, 억지로 입을 다물었다.
“저기 보라니까! 저 새끼 또 얼굴 들이대네. 회장 누나한테 아주……. 어어.”
퉁.
그들의 고개 사이로 농구공이 튕겨나갔다. 아주 자로 대고 그린 것처럼 정확하게, 카메라 앞으로 떼구르르 굴러가는 공을 모두의 눈이 따라갔다.
“아…….”
대체 이게 뭐냐며, 카메라가 흔들리며 그 뒤에 붙어 있던 두 사람의 고개도 떨어졌다. 입술을 깨문 희림이 대번에 그들을 찾아내 눈을 부릅뜨자 남학생들이 크게 당황해 서로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우리가 한 거 아니라고, 무엇보다 공은 우리가 들고 있었던 게 아니라…….
“그러게 조심 좀 했어야지.”
“……”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운 인하가 유유히 돌아섰다. 비록 반나절도 안 되어 워너비의 자리에서는 내려왔을지언정 후배들에게 인생의 교훈 하나는 제대로 남겼다.
남자라면, 자고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하는 거라고.
◇ ◆ ◇
“저기 저분, 희림 씨 아는 분이세요?”
“네? 아아.”
아아, 그 짧은 감탄사로 그에 대한 설명은 충분했다. 희림이 딴청을 피우듯 말이 없어지자 현장을 오가던 스태프 중 하나가 그를 넘겨보았다.
“요 며칠 촬영하는데 계속 나와 계신 거 같은데.”
“……네에.”
“그나저나 엄청 잘생겼네요. 이 동네가 물이 좋아서 이렇게 미남 미녀가 많은 건지. 하긴, 희림 씨만 해도 이렇게 예쁘신데.”
“저기, 잠시만요!”
더는 안 되겠다 싶은 희림이 스태프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저벅저벅 나아갔다. 곧장 인하에게 간 그녀가 그를 한쪽 구석으로 잡아끌었다.
“강인하, 너 왜 여기 서 있어?”
“너 이래도 돼? 나 아는 척하면 안 된다지 않았나?”
“어휴.”
무심히 응대하는 그에게 희림이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며칠째인지, 이런 데는 관심도 없을 것 같은 애가 이상하게 매번 얼굴을 비쳤다.
“정말로 왜 온 건데?”
“왜 오긴. 회장 대리로 할머니들 인솔해 온 건데.”
이것도 문제다.
오려면 혼자 오든가, 꼭 어디서 시끄럽고 말 많기로 유명한 사람들만 쏙쏙 발탁해서 오니 희림도 할 말이 없어졌다. 그제는 남자애들 어제는 시장 상인들 오늘은 할머니 부대까지. 저 없을 땐 분명히 ‘네가 이 동네 우두머리다’ 강력하게 세뇌를 시켰으니 이제 와 말을 바꿀 수도 없고. 그녀가 답답한 가슴만 두드렸다.
“왜 너까지 그래. 여기 뭐 볼 게 있다고.”
“그런 너는 왜 그렇게 여기 열심히 붙어 있는 건데?”
“몰라서 물어? 나야 당연히…….”
너 잘되게 해주고 싶은 거라고.
희림이 유독 관심을 보이는 정씨 할머니의 눈길을 피해 입술을 짓씹었다. 속마음을 그대로 말할 수도 없는 그녀가 결국 인하를 조금 더 가까이 끌어보았다. 오지 마랄 땐 말도 안 듣더니 이런 건 또 얼마나 순순히 잘 딸려오는지 모르겠다.
“강인하. 촬영 어차피 며칠 안으로 끝나니까 너도 이제 그만 좀 오란 말이야.”
“왜? 내가 부끄러워? 백수 남편 같아?”
“…….”
왜 꼭 이야기가 그렇게 흐르는 건지.
희림이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이렇게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어봤자 그닥 좋은 소리도 듣지 못하니 속이 상했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도 없고, 네가 있으면 신경이 온통 쏠려버린다는 말 역시 하기 어려웠다.
“또 뭐가 있어?”
“아, 아냐, 그런 거 없어.”
역시나 하나둘 저를 돌아보는 할머니들의 시선에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하여튼 오지 말라면 좀 오지 말라고, 인하의 팔을 잡고 발을 굴렀다.
“좀, 좀, 좀!”
“아아, 다 끝나고 알아서 나한테 보상을 하겠다고? 며칠간 소홀했던 거 전부? 우리 집에서?”
“…….”
그의 은밀하고도 제멋대로인 해석에 희림이 얼굴을 파묻었다. 갈수록 제가 아는 강인하가 아닌 것 같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괜히 한마디 더 해봤자 꼬투리만 잡히게 생긴지라 일부러 더 쌀쌀맞게 굴어보았다.
“가라구, 얼른.”
“안 그래도 가봐야 해.”
“……응?”
“너네 할머니 퇴원하시는 날이라 대신 가기로 했잖아.”
“아……. 맞다.”
소리 없는 웃음을 짓는 그를 보며 희림의 입술이 벌어졌다. 이제야 그에게 미리 부탁해뒀던 것이 떠올라 울상을 지었다.
“가, 강인하.”
“갈게, 너도 가봐.”
꼭 이런 때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인하를 두고 머뭇거리던 그녀가 결국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저를 부르는 촬영장으로 돌아갔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그는 사라져 보이질 않았다.
굳이 수많은 이들을 자세히 살펴볼 것도 없다. 강인하가 없다는 것은, 눈이 아닌 가슴이 먼저 알아채고 만다.
10년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 ◆ ◇
“있잖아, 강인하.”
제가 그녀에게 시간이 있냐 묻고 난 후, 희림은 부쩍 저를 부르는 일이 늘어났다. 원래라면 ‘으이그’ 콧잔등을 찡그리거나 장난스럽게 웃고 말던 일도 어쩐 일인지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고는 했다.
“음, 있잖아. 강인하.”
“응, 나 왜?”
일부러 모른 척했다. 그래보고 싶었다. 언제나 그녀에게 쩔쩔매며 벗어나지 못하는 건 자신이었으니, 딱 한 번쯤은 허세를 부려보고도 싶었다.
“왜? 나한테 할 말 있어?”
“어어?”
그리 물으면 희림은 늘 한발 늦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거 없다고, 그냥 가방 똑바로 메고 다니라는 별 웃기지도 않은 중얼거림으로 휙 그를 앞서갔다. 좁은 시골길에 그녀의 머리가 흩날리면, 교복 치마가 흔들리면, 그때부터는 온통 머릿속이 하얘져 그런 장난기조차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장담컨대 만약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내게…….
“인하야, 나 준비 다 됐다.”
“……네, 할머니.”
병실 창가에 서 있던 그가 할머니의 부름에 돌아섰다. 제법 길었던 입원 생활이었으니 짐도 꽤 많았다. 온갖 간식거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음료와 차들, 그 대부분이 자신의 집에도 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할망구들. 하여튼 금방 간다고 필요 없다니께 뭘 이렇게 짐스럽게 바리바리 가져와가지고는.”
“괜찮아요, 제가 들고 가면 되니까.”
“하여간에 인하 네가 나 때문에 웬 고생이여.”
가득한 짐을 보며 구시렁거리던 할머니는 오늘도 그의 손등을 토닥였다. 아들 며느리도 안 오는, 정확히는 못 오게 한 퇴원 길에 인간 안 될 줄 알았던 인하가 대신 왔으니 그 감회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인하 너한테 꼭 은혜를 갚아야 하는디. 응당 사람이믄 그래야 하는 건디.”
“나중에요.”
그래도 싫단 말은 안 하는 거 보니 제법 욕심도 있다. 역시 남자는 이래야 하는 거라며 할머니의 총애는 더욱 각별해졌다.
“우리 고을 선비님은 나중에 장가가믄 얼마나 사랑받겄어. 아니, 장가 안 가도 네 식구들 다 얼마나 좋아하겄냐.”
“……그런가요?”
“응. 내가 지금 느네 집 사정까지는 잘 모르겄지만 그래도 인하 너라면은 당연하겄지. 세상 어느 부모가 너 같은 아들이 자랑스럽지 않으까. 그러니까 내 말은…….”
한희림 할머니는 역시 한희림 같은 이야기만 하신다.
그렇게 결론을 낸 인하가 웃으며 끝까지 담담하게 이야기를 들어드렸다. 세상이 그리 동화 같지는 않더라고, 특히나 제게는 그렇지 않더라는 말은 필요치가 않았다.
정작 누군가에게 꼭 해야 할 이야기는 아직 하지도 못했는데, 그 외의 말들이 뭐가 중요하다고.
“……핏줄이 원래 그런 거여. 느그 할머니도 그랬지만, 아버지도 어련히 마음은 다 그런 거라고.”
“네.”
“하여튼 내가 노망이지. 은인을 붙잡고 별 얘기를 다 하네. 머리 검사받는 김에 노망 검사를 했어야 하는디. 에휴.”
할 말을 다 하고 뒤늦은 자책에 빠지는 것도 한희림과 비슷했다. 웃음을 꾹 참는 그의 앞에서 할머니는 무언가를 빠트린 것처럼 눈가를 축 늘어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