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그녀가 촬영팀에서 받아 온 서류를 넘겨주었다. 몇 가지 사항들을 대충 짚어주자 눈으로 따라 읽던 정하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나야 뭐 이런 거 본다고 아나. 희림이 네가 알아서 하겠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방송국에서 하는 건데 뭐.”
“그래도 너 예전에 대학 다닐 때 이런 일 하고 싶어 했었잖아. 이러고 있으니까 진짜 그쪽 사람들 같아서 신기하다.”
“……이건 그냥.”
머뭇거리던 그녀가 눈을 내리깐 채 서류를 추슬렀다. 세상일이 꼭 제 생각 같지는 않더라고, 이미 세상 험한 일을 겪을 만큼 겪은 정하에게 이런 소릴 하는 것도 우습다.
“어쨌든 이틀 후에 여기로 온다고 하는데 구석구석 많이 찍을 건가 봐. 그래서 그날은 너 다른 손님들 못 받을 수도 있다는데 괜찮아?”
“어차피 주말도 아닌데 상관없어.”
“진짜 촬영은 다음 달이라는데 뭐 이렇게 유난인지 몰라. 서울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서 그런가.”
희림이 은근히 그쪽 사람들과의 선을 그어보았다. 그러면 자신은 꼭 거기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아주 멀찌감치 서류를 밀어놓았다.
그런다고 마음이 편해지냐면, 그럴 리가.
“휴우우.”
“왜? 촬영 때문에 그래? 힘들어서?”
“아냐. 그거야 금방 끝날 텐데.”
“그러게. 정말로 끝날 때가 되긴 했나 보다. 우리 서점까지 온 거 보면.”
잠시 머릿속으로 책 속의 순서를 되짚어보던 정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끝이라는 단어 하나에 이렇게 마음이 아릴 줄 알았다면 그냥 모른 척하고 있을걸. 희림은 애써 입가를 늘여보았다.
“정하 넌 그 책 다 읽었으니까 언제 끝나는지도 알겠다.”
“글쎄.”
“……응?”
“내 생각엔 안 끝날 것 같은데. 영원히.”
“야아, 안정하!”
넌 어떻게 그렇게 내 마음에 드는 소리만 하니.
이러니까 내가 널 어찌 좋아하지 않겠냐며 희림이 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렸다. 정하야 아무것도 모르고 한 소리겠지만 이미 그녀에게 안정하는 세상에서 제일 올바른 말만 하는 똑똑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그 참에 못다 한 말을 꺼내려 희림이 슬쩍 운을 떼어보았다.
“있잖아, 정하야. 너 말이야.”
“응.”
“여기서 서점 물려받기로 했을 때, 왜 그랬던 거야?”
“…….”
안다. 부질없는 거.
저와는 달리 수년째 열심히 책방을 운영 중이고 앞으로도 그럴 정하에게 이제 와 이런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픈 다리로 이왕이면 가족들의 곁에 머무는 것이 편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처음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려 결심했던 그 마음만큼은 저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룻밤을 꼬박 새우며 이유를 찾던 그녀와는 달리 정하의 대답은 산뜻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으니까.”
“응?”
“나 다치고 나서 늘 다른 사람들이 나 도와줬잖아. 그래서 이제라도 돌려주고 싶었어.”
말을 하다 보니 쑥스러워졌는지 눈썹 끝을 긁적거렸지만 정하는 여전히 다정했다. 그 많은 어려움을 겪고도 그 다정함을 지킬 수 있도록 그를 보살폈던 모든 것에, 그는 진정으로 감사했다.
“꼭 돈이나 힘쓰는 거 아니라도 여긴 내가 해줄 것들이 있더라구. 우리 엄마 아빠한테는 하나뿐인 아들 잘 지내는 거 보여줄 수 있어서 좋고, 여긴 역 앞이니까 동네 어른들이나 애들한테도 뭐라도 하나 더 챙겨줄 수 있고,”
“안정하.”
“아, 너 언제든 쉬었다 갈 자리도 줄 수 있고.”
그가 희림이 앉아 있는 스툴을 가리켰다. 정하의 장난스러운 웃음에 그녀는 공연히 푸른 벨벳 끄트머리를 매만졌다. 처음부터 제 것이라 단단히 맡아둔 자리가 오늘따라 감회가 새로웠다.
“그냥 그랬다고. 나도 여기선 누군가한테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게 좋아.”
“연주한테도?
“음……. 그건…….”
뭐든 다 생글거리며 대답할 것 같은 정하가 처음으로 망설였다. 그가 적당한 웃음으로 때우려 하자, 희림이 일부러 소리 나게 서류를 부스럭거렸다. 정하가 모른 체하겠다면 자신도 모른 체로 응수할 수밖에.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청연 사람들 다 합친 것보다 조연주가 더 널 필요로 할걸?”
“……그래도. 그건 좀.”
“왜?”
“그냥. 난 이 정도면 만족해.”
잔을 내려둔 정하가 멋쩍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름대로 마음에 담아둔 생각이 많은 것 같기도 했다.
“여기서 더 바라는 것도 웃기잖아. 연주는…… 얼마든지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고. 나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평생 이렇게 살 텐데,”
“정하 너 되게 웃긴다!”
“응?”
“기적 벌써 일어났잖아. 10년 전에 너 그렇게 수술받을 수 있었던 게 기적이 아니면 뭐야?”
짐짓 화가 난 희림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안정하가 세상에서 제일 옳은 말만 한다는 것도 취소다.
“바로 서울로 안 가면 가망 없다고, 다 틀렸다고 그랬는데 그 많은 의사들이 마침 이 시골구석까지 와 있었다는 건 뭘로 설명할 거야?”
“아…… 그건 그렇지.”
“나한테는 지금의 네가 기적이야, 안정하.”
울컥한 그녀가 그를 단단히 꾸짖으며 일어섰다. 세상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최소한 안정하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심장이 멈출 것 같아, 희림은 그만 가방을 챙겨 들었다.
“나 간다. 촬영하기 전에 옷 좀 예쁜 걸로 잘 챙겨 입고.”
“으응.”
“하여튼 다시 그런 말 하기만 해봐.”
강인하와는 어색할 때 할 거라도 있다지만 정하와는 어색해봤자 욕밖에는 나올 것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 당차게 서점을 나서봤자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괜히 거리를 서성거리던 그녀가 언젠가 인하가 서 있던 서점 근처의 좁은 틈에 기대섰다.
“하…….”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
누가 안정하 아니랄까 봐 어느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말이다. 그런데도 그 말에 미련을 못 버려 더욱 깊이 벽 틈으로 들어가 몸을 기대보았다. 이런 좁은 곳에 강인하 같은 커다란 몸이 어찌 구겨져 있었을지 생각하면 이 상황에도 비죽 웃음이 났다. 그리고 이제는 버릇처럼 천천히 숫자를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어어, 아빠.”
어쩌면, 하고 다른 이를 기대했던 희림이 엷은 웃음으로 휴대전화를 들었다. 조금 아쉽기는 해도 한 번쯤 아빠와의 대화가 필요하던 차였다. 하지만 그녀가 아빠를 반기는 것보다는 아빠가 그녀를 훨씬 더 격하게 반겼다.
- 우리 딸! 언제 오는 거야!
“…….”
처음부터 이렇게 나오면 나는 어쩌라고.
벌써 말문이 막힌 희림은 그저 다른 손으로 휴대전화를 바꾸어 들었다. 가다듬는 목소리가 어찌 들릴지 까지는 장담을 못 하겠다.
“음……. 아빠는 잘 있었어?”
- 그럼. 내가 어제 할머니 전화 받고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이제 여한이 없더라니까. 엄마랑 쌍둥이들도 다 됐다고, 어제 우리 한우 구워 먹었어!
“…….”
전 밥 한 끼 제대로 못 먹었는데, 서울에서는 이미 축제가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계속해서 말이 없자 그것을 오해한 아빠가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 걱정 마, 우리 희림이 오면 아빠가 한우가 뭐야, 아예 소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서,
“안 먹어. 나 소 키워.”
- ……어어.
잔뜩 신이 났던 아빠가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모든 시름을 던 것처럼 금세 수화기 너머에서는 웃음이 넘쳐흘렀다.
- 이게 다 웬일인지 모르겠네. 내가 2년 만에 푹 잤다니까.
“아빠.”
- 하나 있는 아들이 그리 말하고 매달려도 눈도 깜짝 안 하던 양반이 희림이 네 말은 들으시네. 내가 우리 딸 보면 감사의 절이라도 해야겠다!
굳이 그런 공치사가 아니더라도 아빠의 숨결엔 안도가 가득했다. 지금껏 말은 않았지만 아빠 역시 한 번도 마음 편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어, 그녀가 힘겹게 입을 떼어냈다.
“……그렇게 좋아?”
- 그걸 말이라고. 이제 좀 마음이 놓인다니까.
“하긴 할머니 올라가시면 아빠도 이제,”
- 아니, 할머니 말고 너.
“…….”
- 아빠는 당연히 우리 딸이 제일 보고 싶지.
비밀처럼 속닥이는 아빠의 말에 희림이 휴대전화를 꼭 부여잡았다. 보이지 않겠지만 고개를 끄덕이는데, 코끝이 찡했다.
- 진짜야. 아빠는 우리 딸만 있으면 돼.
“……응.”
- 그래서 말인데, 엄마랑도 이야기해봤는데 전에 네 말처럼 우리 가게, 희림이 네가 이참에…….
“저기, 나중에 또 전화할게. 나중에.”
툭, 결국 멋대로 전화를 끊어버린 희림이 힘겹게 목을 넘겼다. 서점 간판에 불이 들어왔는데도 희뿌연 시야에 뭐든 흐릿할 뿐이다. 제가 그리 필요하다는 사람의 전화를 받고도 이리 울컥한 것을 보면 세상에 저 같은 천하의 불효녀가 또 있나 싶다.
혹은 아직도 기적이나 바라는 순진한 여자라든가.
◇ ◆ ◇
“색상은 이걸로 할게요, 그리고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테이블의 가운데에 앉은 인하가 제법 오랜 시간 제 의견을 살펴나갔다. 뭐든 좋은 게 좋다며 박 비서에게 맡겨둘 때와는 달랐다. 그렇지만 그런 열의와는 달리 정작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은 이들은 인하의 얼굴을 살피느라 혼이 나가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사실은 저희가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