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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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쯔쯧, 혀를 찬 정씨 할머니가 고개까지 흔들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굳이 더 늘어놓지 않아도 새 회장님은 충분히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듯했다.

“……그랬군요.”

인하의 읊조림이 나직하게 내리깔렸다. 어울리지도 않는 다정한 웃음 대신 진지하게 굳은 얼굴이 찡그렸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짚이는 데라도 있는 것처럼 짧은 탄식이 터졌다.

“아…… 그래서 그때.”

“응? 그때가 언젠디?”

“아뇨. 아닙니다.”

몸을 세운 인하가 정색하듯 할머니들을 마주했다. 어깨 한번 제대로 폈을 뿐인데 꼭 드라마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위압감이 넘쳐흘렀다.

“어쨌든 생각보다 서두르긴 해야겠네요.”

“으응, 그렇제.”

“…….”

정확히 뭘 서두르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인하의 비장함만큼은 알아줘야 했다. 무슨 일을 내도 내고야 말 법한 그의 눈빛이 강건했다.

“안 그래도 맡겨둔 게 있어 주말에 서울에 좀 다녀올 생각이었습니다.”

“그려. 그럼 우린 새 회장님만 믿겄어.”

“그러시죠.”

“근데 무슨 비책이라도 있는 겨?”

이것 좀 놓아보라며, 기어이 할머니 한 분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인하의 표정을 보아하니 분명 생각해둔 것이 있는 모양인데 이 나이 최고의 관심사인 건강과 직결된 이상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

“뭐 서울에 기력 차리는 데 좋은 약이라도 있는 거여?”

“음…….”

설명을 해보려 머뭇거리던 인하의 입술이 이내 길게 늘어났다. 희림을 생각하기만 해도 본능적으로 움찔대는 입꼬리처럼, 이것 역시 그에게서 본능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조금은 떨리는 듯 긴장이 어린 것 같기도, 초조한 가운데 쉴 새 없이 웃음이 났다. 

왜 저러는 거여.

결국 보다 못한 할머니들이 안달했다. 우리 회장님만 이상한 줄 알았더니 새 회장님도 마찬가지다. 어디 저래서 되겠냐고, 영 믿을 수가 없다는 불신의 눈초리가 질책처럼 이어졌다.

“아니, 지금 새 회장님이 사태의 심각성을 잘 몰라 그러나 본디 우리 회장님이 아주 많이 이상하다니께?”

“이럴 때가 아니여. 사람이 막……. 어어, 왔네, 왔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회장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벅저벅 다가서는 희림의 기세 좋은 걸음을 따라 문 앞에 옹기종기 모인 이들의 고개가 한 번에 돌아갔다. 누구든 한 번쯤 움찔할 법한 광경이었지만 그녀는 그조차도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여기서 다들 뭐 하시냐는, 그런 뻔한 질문 따위는 던지지도 않았다. 어차피 제 눈에 보이는 것은 단 한 사람뿐, 시선을 고정한 그녀가 곧장 가운데에 있는 집주인 앞에 자리를 잡았다.

“강인하.”

“응.”

“바빠?”

팔을 교차시킨 그녀가 인하를 응시했다. 이제 갑작스런 침입이나 제안 정도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인하조차 이번만큼은 목젖이 길게 넘어갔다.

“……뭐, 보다시피 지금은.”

“아아.”

희림이 그제야 할머니들을 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쉽게 물러서지 않을 할머니들의 흥미진진한 눈초리에 일단 한 수를 접었다.

“그럼 내일은?”

“내일은 군청에 좀 나가봐야 하는데. 서류도 제출하고 해결할 것들이 좀 있어서.”

“그렇구나.”

입안을 질근거린 그녀의 한숨이 낮아졌다. 인하가 그러지 말고 들어오라는 듯 손을 내밀었지만 이미 희림은 번쩍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럼 다음 날은?”

“……응? 다음 날은…… 주말이라서, 어딜 좀 가봐야 하는데.”

그제야 어딘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는지 그의 눈가가 좁혀들었다. 인하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자 주말 소리에 동요한 할머니들이 대신 나섰다.

“주말은 안 되제. 절대 안 되야!”

“그려. 주말에는 우리 새 회장님 저어기 멀리, 일 보러 가셔야 한단 말이여. 꿈도 꾸지 말어.”

“네에.”

연이어 거절당한 희림의 가슴이 들썩였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러고도 그녀는 물러나지 않았다. 세상 그 무엇이 막아선다 해도 그럴 생각 따위는 없는 듯 다시 한번 주먹을 꼭 쥐었다.

“그럼 주말 다음은?”

“한희림.”

“그다음 날, 그다음다음 날도 좋아. 나 꼭 너 만나야 돼.”

“…….”

상기된 뺨에 흔들리는 속눈썹, 그럼에도 한 사람을 향한 마음만은 멈추지 못했다. 아니, 더 이상 멈출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부끄러움과 떨림, 본능적인 두려움 역시 이겨내야만 했다.

카메라를 통해 보이던 이 남자의 마음 한 자락을 잡아챈 이상.

“강인하,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 ◆ ◇

농민일보 주말 특집

지난 2주간 이어졌던 ‘나의 아름다운 숲’의 사전촬영이 마무리를 앞두었다. 청연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낸 이번 촬영은 청연의 발전을 바라는 주민들의 열망만큼이나 높은 관심을 샀다. 특히나 책 전경으로 등장하는 보석책방(사장 안정하, 청연중 53회, 청연고 42회 졸업, 영업시간 월-금 10시~19시, 주말 22시까지. 주차 가능. 약도 별도 첨부. 청연페이 가능.)은 마지막 촬영 장소로서 앞으로도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익명의 관계자이자 본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H씨에 의하면 제작사 측에서는 이번 사전촬영을 통해 충분한 가능성을 타진했다며, 이른 시일 내에 본격적인 촬영 일정을 잡을 예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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